팩션 FACTION

라임라이트 시절 (2-끝)

원평재 2007. 7. 9. 22:40

 

27438

 

공무원 통근 버스가 있던 시절이었다.
출근 시간이 급하여 나는 아무 대책도 강구치 못하고 통근 버스를 탔다.
경황없는 내 모습을 보고 아내가 놀란 눈으로 가방을 손에 쥐어주었다.
출근부에 펀칭을 하자마자 나는 책상 위의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곧장 "라임라이트 살롱"으로---.


사무실에는 근무시간 중의 일탈, 예컨데 주식시세를 탐색하는 등의

행위를 막기위하여 불시 검색을 하는 장치가 있었으나 나는 모두 무시

하고 부팅을 하였다.
그런데 아, 맙소사.
이번에는 맨 아래에 레드로즈의 창황한 변명의 메일이 깔려있고 그 위로는
수많은 회원들이 나와 장미님을 질타, 규탄하는 엄�난 분량의 댓글들이

이미 떠있는 게 아닌가.

당황한 장미님이 이번에는 나에게 메일을 친다는 것이 모든 회원들에게
날라가는 메일 시스템을 클릭한 모양이었다.
자빠지고 엎어지고---.
장미님은 두번의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지금의 인터넷 환경을 생각해 보면 남녀가 그 정도의 감정을 사이버 상으로
교류한 것이 그토록 경천동지할 일은 아닌지 모르겠다.
오늘날 인터넷의 바다에서는 익명의 편의성을 이용하여 얼마나 많은 감정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는가.
아니 어쩌면 실명이나 오프 라인에서도 교유랄까, 교류는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추측해 본다.
인터넷 카페 혹은 살롱에 뜨는 저 수많은 '정모'와 '별모' 공고를 보라.
하지만 초창기의 풍속도는 아직 이런 자유주의적인 분위기를 용납치
않았거늘---.

그리고나서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서 살롱 "라임라이트"는 막을 내렸다.
감당하기 힘든 주인장, 장미님이 살롱 폐쇄 신청, 즉 파산선고를 해버린
것이다.

낮모르는 사람들이 사이버에서 헤어졌으니 표면상으로는 아무런 풍파가
있을리 없었다.
하지만 마음 속의 상처는 형언키 어려웠다.
특히 주인장과 특별회원 대우를 받던 몇사람의 심리상태는 공황상태
였다.
그건 나의 심리 상태를 보면 짐작이 어렵지도 않으리라.
나는 며칠간 식사도 할 수 없을 정도였고 실제로 하루 이틀은 중병에

걸린듯 자리에서 일어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어떻게 손을 쓸 방도를 알 수 없었다.

이 엄청난 사태의 수습에 나선 것은 특별회원 중의 한 사람인 "강남희"

님이었다.

닉네임과 가면으로 형성된 이 살롱 마당에서 그녀는 처음부터 본명을

들고 나왔었다.

그녀는 실명으로 행동을 할만큼 인간 관계에 자신이 있었고 폭이 넓었고
그래서 이런 비상사태 때에 그녀의 인간관계와 지혜로움이 그렇게

돋보일 수가 없었다.

강남희 님은 "도움 살롱"에 사정을 알리고 폐쇄된 카페의 주인인 "레드로즈"
님과 나를 포함한 운영자들의 메일 주소를 확인하여 연락을 취하였다.
알고보니 그녀는 화가인 강남철 화백의 친여동생이기도 하였다.
그녀의 오빠인 강남철씨는 감성적인 시도 쓰면서 이미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그녀는 오빠의 그늘이 싫어서 자신의 재능에도 불구하고 실공간을

외면한채 디지털 세계의 여황제이자 어둠의 자식을 자처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남매의 고급스런 심리적 갈등도 사치일 따름

이었다.
그녀는 오빠의 실질적 조언을 받아서 팔을 걷고 나선 것이었다

강남희 님은 끼가 번득이는 눈빛으로 레드로즈와 나를 꾸짖었다.
내용이야 "감정 관리"에 관한 상식적 수준이었으나 한때 이와 비슷하게
감정이 과잉이었던 자신의 사랑과 정열, 그리고 그 파탄을 예로 들었기에

설득력이 있었다.
강남희 님이 어둠의 자식이 된 감정 과잉의 숨겨둔 스토리가 있었으나 여기에

오늘 밝힐 일은 아닌듯하다.

레드로즈님은 안전 유원지에서 진짜 살롱을 운영하는 여성으로 뚱뚱한
편이었는데 젖가슴은 과잉이었고 키는 왜소하였다.
속눈섭이 진하여 한마디로 강한 인상이긴 했으나 청순함을 찾는 내

취향으로는 오래 싸우며 살았던 아내의 수준에도 못미치는 사람이었다.
안전 유원지에서 <안전 싸롱>이라는 옥호로 빈대떡과 동동주 집을 경영

하면서, 그 영업의 바깥 일을 도맡고 있는 남편과의 관계도 그녀는 대체로

원만하였다.

남편을 능멸하며 하루하루를 어렵게 살아가는 "성인 동화"의 주인공과는

거리가 멀었다.

멧돌과 첼로가 뒤섞여 생긴 "멧첼" 전설도 그때는 없었다.

통나무로 만든 "안전 싸롱"에서 동동주를 마시며 우리는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다를 바가 없음을 체험하였고 세상에 사이버라고 하는 특별한
공간은 따로 존재할 수 없음을 체험하였다.
모든 것은 인간이 만든 또 하나의 환상의 굴레에 다름 아니었다.


일찍 대머리가 된 내 모습과 무다리의 작은 키에 가슴만 터질듯한

 레드로즈 님의 체형이 그날 거기 모인 모든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안도감을 주는듯하였다.
우리는 그렇게하여 상처난 가슴을 치료할 수 있었다.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자세한 기억은 없다.

그러나 온라인의 신화나 오프 라인의 현실계가 별반 다를 바 없다는

확인 작업만으로도 위로와 치유는 끝난듯 싶었다.

아, 조금 다른 부분은 있었다.

살롱과 싸롱 정도의 표기 차이였다.

아직도 음주운전이 관대한 대접을 받던 시절이어서 우리는 동동주를
몇되나 되게 들이키고 자정을 넘긴 시간에 자동차에 키를 꽂았다.
후진을 하면서 나는 뒷 범퍼를 쌓아놓은 장작더미에 부딪쳤고 범퍼는
찌그러 내려앉아 떨그렁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내 어줍잖은 낭만 정신의
한 귀퉁이를 박박 긁어대고 연신 나를 비난하는듯 하였다.

내가 차를 멈추고 운전석에서 "윈도우"를 내린다음 걱정스레 뒷편을 보고

있을 때 강남희 님이 자기 차에서 내리더니 성큼 걸어왔다.
"통나무 집에서 자고 내일 새벽에 가면 안될까요?"
하지만 내 처지는 그렇지 못하였다.
"제가 공처가, 아니 경처가 아닙니까. 전에 한번 살롱 이야기 방에도
올렸듯이---."
"앞으로는 칼럼이라는 것을 한번 만들어서 운영해 보시라는 이야기를

할까 했는데---."
"칼럼이 뭐죠?"

그날 나는 안전 유원지에서 밤을 새우며 강남희 님으로 부터 "칼럼"의
세계를 전수 받았다.

칼럼은 그 후에 블로그로 진화하였으나 시끌벅적한 모습들이 그 때 만든

칼럼에 비교가 되지 않는다.

지나간 것이 아름답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칼럼"을 구축하여 빛나는 지성의 한마당이 되도록 할 수 있는 기본 바탕을

갖추고 있는 것은 문화재 관리국의 자료를 입체 영상화하여 올리면서 적당한

역사적 배경과 설명을 붙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강남희 님은 설파하였다.

나는 내 신분도 솔직히 다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벌써 "칼럼"을 1년 이상 운영하면서 문학작품과 그림과 클래식을

하나의 공통분모로 묶어서 저 유명한 "문학과 음악 기행/짧은 인생에서"

라는 "칼럼"  공간을 이끌고 있었다.
칼럼의 장점은 주인이 모든 것을 이끌어나가고 회원은 짧은 감상문 만을
달 수 있을 따름이었다.
아니 그런 감상문 코너까지도 아예 빼버리고 독불장군으로 지낼 수도

있었다.
"왜 우리에게는 그 세계를 살롱에서 진작 소개해 주지 않았나요?"
내가 불평하였다.
"라임라이트에서 회원을 빼가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았지요. 두개의
사이트가 개념은 완전히 다르지만 사람이 여러군데 시간을 낼 수는

없을테고  그렇다면 라임라이트, 아니 레드로즈님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어서였지요."

"그래도 하여간 재미나는 공간을 이제야 알려주니 원망스럽군요."
"사실은 이걸 운영하기도 힘들어요. 일주일에 한두번씩 계속 글과 그림을
올리는 작업을 생각해 보세요. 저야 사실은 오빠의 지원을 많이 받고 있죠.

근데 전 지금 고도근시로 고생하고 있어요, 제기랄!"
그녀는 분명히 제기랄, 혹은 그 이상의 욕설을 하였다.

"회백 등불"이라는 문화재 관련의 영상 칼럼이 생긴 것은 그날 이후였다.
라임라이트는 영원히 사라졌다.
그날 모였던 운영자들은 가끔 '벙개'를 통하여 만나기도 한다.
그러나 안전 유원지까지 가지는 않고 광화문의 조계사 근처에서 만난다.
레드로즈 님도 가끔 나온다.
그러나 실공간에서는 사이버 공간 같은 감정이 통 일어나지 않아서
맥은 빠져도 마음은 참  편하다.
레드로즈님의 자빠지고 엎어진 일생일대의 실수는 재난이 아니라 도움이
된 셈이었다.
사이버나 실 공간이 사실은 똑같은 인간들의 동일한 공간임을 우리는
아주 일찍부터 깨닫게 되었으니까---.

 

(이번 이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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