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보고다닌 투어

스모키 마운튼을 헤메며---

원평재 2007. 8. 27. 08:54

29058

이 더위에 함께 너무 멀리 다니시게 해서 미안합니다.

이번 남부 7개주 여정이 약 2000마일이어서 어쩔수 없습니다.

이제 발길은 테네시 주의 "개틀린버그"와 "피죤 포지"로 달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노쓰 캐롤라이나의 체로키를 거치면서 장엄한 스모키 마운튼을

넘어갑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 이전에 우리가 들리게 될, 테네시 주의 여러 관광 명소들도 

모두 이 스모키 마운틴의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래서 스모키 마운튼은 The Great Smoky Mt. 이라고 합니다.

원래 이 "스모키" 라는 표현에는 깊은 뜻이 묻어납니다.

"안개낀 산"이라면 그저 "더스크" 같은 말을 붙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체로키 인디언들이 이 곳에 자리를 틀고 있었을 때에는 이 거대한 산록에

어떤 정기와 영험같은 것이 서려 있었답니다.

그 영적인 에스프리의 색갈이 바로 파르스름한 스모키였다고 합니다.

 

그런 말을 들어서 그런지 이 날 아침에도 협곡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오싹스레

푸른 띠가 산자락에 깔려 있는듯 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광경을 볼 수 있는 순간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오염"된 산이라는

뜻의 스모그 마운튼으로 변질되지만 않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그러고 보니 협곡의 정상에서 내려다 보며 느낀 안개같은 것도 서울에서 자주 겪은

박무(薄霧) 현상, 그러니까 오존 경보 같은 것이나 아니었는지---.

몰락한 체로키 인디언처럼 슬픈 정경이었지요---.

  

 

 

 개틀린버그는 하계 휴양지이자 칸추리 뮤직이 밤새 들려오는 고장입니다.

아울러 시가지와 먼 스모키 마운튼의 영봉들을 내려다 볼 수있는 스카이 라이더를

타는 곳이기도 합니다.

 

이어서 도달한 피죤 포지라는 동네에서는 칸추리 음악 연주의 한마당이 펼쳐지는

대극장에서 남북 전쟁 주제의 신나는 딕시 쇼우를 감상하며,

개척기의 미국식 디너, 치킨과 감자 통구이를 먹고 저녁 한 때를 즐겼습니다.

 

딕시 쇼우의 전개는 단순하였습니다.

여러가지 남과 북의 의견이 상충했던 당시의 상황을 거대한 실내 그라운드에서

재현하고, 남북의 전장 장면을 생생하게 재연한 다음 결국 상호 이해를 거쳐서 평화를

위한 화해의 휘날레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것이었습니다.

 

 

 개틀린버그로 가는 도중에 거꾸로 서있는 호텔을 지나갑니다.

현상에서의 발상의 전환을 하라는 상징물 같습니다.

 

  

 

  

 

 

 본격적인 딕시 쇼우를 하기 전에 프레 쇼우로 손님들의 칸추리 뮤직에 대한

열망을 충족시켜 줍니다.

 

 열광의 끝이 화장실 휴지로 끝나는게 재미 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손님들도 남군과 북군으로 갈라져서 자리를 하게 됩니다.

화장실도 남과 북이 따로 쓰라고 구분되어 있습니다.

 

 

 북군 양키의 복장은 청색이고 남군은 회색입니다.

 

 

날이 밝은 다음 날 보게된 동네 모습은 개척 시대를 그려보게 됩니다.

 

 

 

 

  

 

 

 

개틀린버그로 다시 내려와서 스카이 라이더를 타고 마을 구경을 합니다.

이어서 미국 개척기의 마을을 도보로 돌아다녔는데 현상수배자들의 얼굴이 붙어있는 등

미국 개�기 영화 속의 장면들을 떠올리게 됩니다.

  

 

 

 

 

 

 

 

 

 

 

 

 

 

 저 멀리 보이는 첩첩 산맥들이 The Great Smoky Mt.입니다.

일행은 이제 노쓰 캐롤라이너의 애쉬빌로 이동합니다.

 

 

 

Ashville에서는 밴더빌트라는 대 부호가 세운 세계에서 가장 큰 호텔에 구경꾼으로

들어가 봅니다.

숙박객은 아니었습니다.

호텔의 전관이 모두 큰 돔 속에 들어차 있는데, 그 속에 폭포와 분수가 솟았다 떨어졌다하고,

시냇물이 아니라 강물 수준의 물길 위에 떠다니는 유람선이 기를 죽입니다.

아, 물론 우리도 제주도에 L 호텔 등의 장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밴더빌트 가문은 거대한 호텔에만 투자를 한 것이 아니라 명문 밴더빌트 대학을 만들었습니다.

아웅산 사건 때에 순국한 각료들 중에 이 곳을 나온 분들이 많습니다.

당시 정부간의 파견 협정으로 이 명문 대학의 행정학 분야로 공무원들이 많이 왔을 것입니다.

 

밴더빌트의 사촌은 뉴욕주의 포킵시에 큰 밴더빌트 장원을 세웁니다.

루즈벨트 기념관의 옆에 있는데 나중에 한번 들어가 볼 셈입니다.

 

이제 피곤한 열흘간의 여정도 막바지에 왔습니다.

다음날은 아틀란타로 돌아옵니다.

아틀란타라고 하니 갑자기 고향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