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애야, 너무 서두르지 말어."
배 교수가 턱 밑에 붙은 그녀를 조금 떼어놓았다.
사람의 성격이나 성정이 빛을 분광할 때처럼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보통의 정상 스펙트럼에 속하고 어디서 부터 그 범주를 넘는다고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정애의 속도감은 너무 한 것 같다고 배 교수는
생각하였다..
원래 배 교수가 이번 남부 여정을 계획할 때에는 사실 이런 식의 속도감을
전제했거나 염두에 둔 것이 아니라 우선 그녀의 주변을 살피고 그간의
감정 교류가 예상하고 기대한 만큼의 적절성이 있는지를 탐색하자는 생각
이었다.
모든게 만족할 수는 없겠지만 미래를 내다볼 수만 있다면 그는 용단을 내릴
각오도 되어있었다.
자신의 현재를 지옥과 같다고 비유하지는 않고 있지만 어지간하면 그녀와의
두번째 생활에 후회는 않을 수 있으리라, 그는 작정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정애가 펼쳐놓고 사는 삶의 영역이랄까, 예컨데 그녀의 배우자나
여타의 가족관계가 있다면 그런 인간관계가 끊어질 때에 그 주변인들이
얼마만큼이나 파괴되지 않고 견뎌낼 수 있을까 하는 인장력(引張力) 같은것,
그런걸 직관에 의하건 어쨌건 할 수 있는데까지 파악해 보고 또 그런 이야기부터
나누면서 인생 최후의 무대를 어떻게 꾸며야 할는지 서로 입장을 한번 정리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남부 여행을 떠나오기 얼마전에 그런 내용을 e-메일로 미리 보낸 것도
마음의 자세랄까, 미래에 대한 연구를 좀 해보라는 취지에서 였다.
그런데 이 곳 현장에서 마주친 것은 예전에도 익히 보았던 정애의 그 행동주의,
충동적 모습의 재탕같은 것이 아닌가---.
"정애야, 내가 평생을 선생 노릇하며 살아왔기에 내 식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풀어볼께.
내가 이제 인생의 마지막 프로그램을 짜는데 지금 우린 진도가 너무 빨리 나가는
것 같구나.
조금 숨을 돌리고 이야기하자.
또 우리 둘 뿐 아니라 주변인들이 견뎌낼 힘도 생각해야지.
인장력이랄까, 끊어지지 않고 버틸 힘---, 뭐 그런거부터 점검해 보아야 되지
않을까. 지금 우리에게는 그런 시간이 필요해."
"선생님, 무슨 말씀이세요. 우리의 관계를 그렇게 강의실에 빗대어 표현하신다면
그동안 우린 너무 결강이 많았어요.
진도라니요, 우리 진도는 지금 한 페이지도 나가지 못했어요.
선생님, 수업 시작의 종이 이제야 겨우 울렸어요.
안아주세요. 견딜 수가 없어요.
우선 출석을 부르신다고 생각해도 좋아요.
첫 수업의 오리엔테이션이라고 해도 좋아요.
저의 이 벗은 모습 보세요. 아직 너무 아름답지 않아요?
엉덩이가 쳐지지도 않았고 제 허벅지도 이렇게 아직 팽팽해요.
아이를 키우지 않은 젖가슴도 이거 보세요.
제 주변인이래야 피부도 다른 남편, 서울의 늙고 병든 어머니 뿐인데
모두 여기까지 도달한 저로 인해서 절망할 일도 심줄이 끊어질 일도
없어요.
인장력이라고 하셨던가요. 익스텐션, 뭐 그런 말씀인가요.
그거라면 제 몸의 특징이고 특기가 아니겠어요.
이렇게 제가 탄탄하고 탄력이 있고 탱글탱글해요."
그녀는 발가벗은 몸으로 이제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중년의 여인이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몸매는 흔한 사진이나 그림을 포함
하여서 그가 아직까지 본 기억이 없는 명화의 수준이었다.
"정애야, 인장력이 문제라는 건 나의 가족 관계도 염두에 둔 것이고,
내 몸의 인장력이 턱도 없이 딸린다는 것도 문제라는 거야.
정애의 몸이 문제가 아니야.
우선 여길 봐.
내가 이렇게 배가 나왔어. 배뿔둑이는 아직 아니지만 벗어 놓으면 크게
실망스러울 거야.
또 내 근육질도 문제 수준이야. 섹스라던가 모든 걸 다 포함해서 말이야."
"네, 그러니까 어서 벗으세요. 길고 짧은건 대봐야 안다는 한국 말, 아직도
안잊고 있어요.
그러니까 저에게 검진, 아니지 뭐라더라, 검증을 받으셔야지요. 그러시고
싶으신거 아니세요?
그리고 어쩌면 낙제 점수를 받으셔서 우리의 관계를 피해가실 핑계를
마련하시고 싶어 하실는지도 모르겠네요.
지금 어물어물 하시는 모양이 말하고 있네요.
그러니까 어서 벗어보세요. 국민윤리 교수니임~!"
그녀가 이제는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그의 벅클에 손을 대었다.
왠일일까,
그녀의 손길이 벅클과 지퍼쪽으로 닥아오자 그는 마치 거미가 닥아오는
스물스물한 전율을 갑자기 느꼈다.
"남편이 두 다리를 잃고 누웠다고 그랬지?"
"다리는 잃었어도 누워있다고는 하지 않았어요. 지금이 어느 때인데요.
생각처럼 그렇게 비참한 상태는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제가 모든 걸 다 말씀 드린건 나중에라도 자책에 시달리지 않고 스스로
사기꾼이었다는 생각에 매몰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선생님, 안아주세요. 얼른요."
"정애야, 조금 더 신중하게 생각하자."
"그럼요. 걱정마세요. 지금 무슨 미래 계약서 쓰자는거 아니에요.
일단 오리엔테이션 수준에서---."
"지금 이 순간의 시간 문제도 그렇구나. 우린 새벽에 출발해서 점심도
햄버거로 떼우고 달려왔어.
내가 수작을 좀 부려서 그나마 자유시간을 얻었지만 우리 일행 중에는 재즈
메이니어가 있어서 이것 저것 다 볼려면 내일 새벽까지 돌아다녀도 모자랄
판이야."
"갈 사람은 가라하고 우린 여기에서 사랑만해요. 선생님이 오시면 이리로
모시고 와서 어떻게 하겠다고 제 머리 속에서는 다 계획이 세워져 있다니까요.
팬터지 수준이라고 웃으셔도 좋아요.
저는 간호사 생활을 시작한지 삼년만에 집을 장만했어요.
모기지로 사니까 현찰없이 신용으로 다 되었지요.
아틀란타의 스와니라는 곳에 멋진 집을 장만했어요.
포스터의 스와니 강은 나중에 지도를 갖다놓고 플로리다로 점을 찍었다고
합디다만 저는 조지아 주, 아틀란타의 스와니가 진짜 제 고향 같았어요.
백 야드가 1에이커나 되는 그리로 선생님을 초청해서 노후에는 모시며
살고 싶었어요.
그 꿈이 모두 의료분쟁으로 박살이 난거죠.
선생님, 스와니 강은 아니더라도 이 곳도 좋아요.
이번 입국하실 때에는 6개월 체류허가 받아서 오셨지요?"
"그게 문제가 아니야, 정애야.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에서처럼 나는 아직 해가
지기 전에 가야할 길이 있구나---."
"십리도 못가서 발병이 나실걸요."
"아니 사랑한다면서 어째 그런 말을---?"
"그럼 왜 오셨어요? 사모님 모시고 사는 괴로운 인생살이에 제가 조금 위로가
될듯하여서 보러 오셨어요?
벌 받고 사는 제 몰골을 잠시 눈으로 보고서 위로나 받자고 이렇게 오셨어요?
아니면 인생 앨범에 사진하나 더 박아넣으시려구 여기 잠시 오셨어요?
자, 제 이 발가벗은 모습 찍어가세요."
"정애야, 나도 할 말은 많아. 하지만 이제 현실을 바라보니 너무나 가혹하여서
말을 삼가하겠다만, 이렇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이번에는 일단 돌아가는
수 밖에 없겠구나---."
"쉽게 가지는 못하십니다. 선생님, 저걸 한번 보세요."
그녀가 가리키는 곳을 배 교수가 보니 침실 벽면에 인테리어로 아프리카
흑인들의 주술 신앙인 부두(Voodoo)교의 상징들이 주욱 붙어있었다.
조각과 봉제로 만들어진 그 상징들에는 바늘로 안면을 찔러서 변심한
애인의 마음을 돌리려는 주술 행위도 보이고 지극한 애정의 표시로 남녀
성기가 열리고 닫힌 모습, 그리고 또 살해 의식 같은 것도 보였다.
"죄송하지만 저는 그동안 제가 정을 주는 남자 두엇과 잠자리는 나누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선생님을 제 마지막 반려자로 찍어놓고 있었어요.
지금 만약 선생님이 떠나시겠면 그냥 이 문을 나가실 수는 있어요.
하지만 금방 어디가 아프실거예요.
제가 저기 부두 신상(神像)에 보이듯이 봉제 인형을 하나 걸어놓고 저렇게
찌르고 자르고 땅바닥에 패대기 칠테니까요.
그럼 몸의 어디가 아파오실 것이고 결국 저를 찾아오게 되세요.
틀림없어요.
확신해요.
제가 버리지 않는한 아무도 저를 버리고 가지는 못해요.
카준 크레올인 제 남편이 부두교 광신자인데, 저도 필요할 때는 무섭게
신끼가 올라요.
자,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 저를 안으시던가 아예 남으시던가 아니면
떠나시던가 결정하세요."
배 교수는 아무말도 않고 일어나서 정애의 맨 몸을 안았다.
에어컨이 나왔지만 그녀는 땀을 뻘뻘 흘리며 사시나무 떨듯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의 목에서 짭짤한 물끼 몇 방울을 빨아서 달게 마시고 등을 돌렸다.
그녀가 쓸어지면서 부두의 목신상을 부러뜨리는듯 싶었으나 그는 돌아보지
않았다.
그리고 잔 다르크가 황금빛 투구와 갑옷을 입고 기다리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날 저녁에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어렵게 찾아낸 한국인 식당에서 재즈 카페 주인, 정 사장이 한국 술을 시켰다.
20달러로 값이 매겨진 '천년의 약속'이었다.
그는 자꾸 가이드 청년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스케줄에 따르면 저녁만 이곳 프렌치 쿼터에서 먹고 변두리로 나가서 잔 다음,
내일 새벽에 뉴 올리언즈를 떠나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재즈 메이니아는 하루밤을 이 곳 프렌치 쿼터에서 자고 내일 하루 종일
거리에 산재한 재즈 악사들의 연주를 충분히 감상한 다음에 이 곳을 떠나도록
스케줄을 바꾸라는 것이었다.
"뉴 올리언즈에서 단지 일박일일이라니, 이게 뭐야!"
일박일일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그가 큰 몸짓을 움직여 가이드에게 역정을
내었는데, 어떻게 된 행동의 연장선에서 인지 내두르는 손길에 배 교수의 턱
끝쪽이 부딛쳤다.
그 서슬에 결국 배 교수가 평소 앓으며 삭이며 달고 다닌 어금니의 충치 치통이
도져버렸다.
통증은 순식간에 기절을 할만큼 배 교수를 압도하였다.
재즈 카페 주인, 정 사장의 부인이 마침 상비해온 생리 진통제, '게보린'이
있어서 일단 그 날의 통증은 다스려졌으나 남아있는 여정이 문제였다.
아틀란타에 간호사 딸을 둔 부부는 외면하였다.
다시 재즈 카페 주인의 부인이 녹스빌에서 교수를 하는 딸에게 휴대폰으로
구원을 요청하였다.
그 여교수는 마침 자기 친구의 남편이 녹스빌에서 치과의사로 있어서 연락이
닿았다.
그 치과의사는 다시 이쪽으로 연락을 해주어서 내일 아침에 그들이 묵고 있는
인근 월그린 마트의 약국으로 배 교수가 가면 전화로 원격 처방을 해 주겠다고
하였다.
항생제와 진통제를 쓰면 이틀이면 다 나을것이라고 치과의사는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이런 난리 법석통에 가이드 청년이 제 자리와 권리를 찾아서 부르짖었다.
"우리의 남부 여정이 2000마일이 넘거든요. 이제 겨우 반도 오지 않았으니
빨리 이곳을 뜨자구요.
여기가 마음쩍으로 항상 찝찝하고 겁나는 동네라요.
아프리카 귀신들이 노예들과 함께 왔다고도 해요.
그래서 저주받은 땅이라고도 하잖아요."
그가 몸을 부르르 과장되게 떨었다.
"그래도 명품 물건 값은 쌉디다. 안 그래요, 남지희씨?"
배 교수 부인이 노년의 난청으로 얼토당토않게 '얼쑤' 추임새까지 먹여
가이드의 말에 응대를 한 꼴이되자 모두들 까르륵 배를 잡고 웃어서 자연스레
귀신 이야기의 퇴마록이 되어버렸다.
"불쌍한 사람들---."
남들은 웃었지만 이가 아픈 핑계로 배 교수는 오랜만에 철철 눈물을 흘렸다.
(끝)
'팩션 FACTION'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팩션) 폐궁, 시크리 잔해에서 찾은 DNA (1) (0) | 2007.10.29 |
---|---|
(논 팩션) 제49호 경매 품목 (The Crying of Lot 49) (0) | 2007.09.22 |
딕시랜드의 그녀 (8) (0) | 2007.09.17 |
딕시랜드의 그녀 (7) (0) | 2007.09.15 |
딕시랜드의 그녀 (4) (0) | 2007.09.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