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보고다닌 투어

갑작스런 남도 기행 2-1 (새만금 방조제에서 채석강 까지)

원평재 2007. 10. 9. 2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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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닷없이 새만금 방조제 공사장에 구경을 들어가게 되었다.

새만금 사업단장의 배려로 비응도 쪽에 나와서 기다리는 안내자를 만나 구경 한번 잘 하였다.

공사장에 들어오지 못하는 외제 승용차들이 바깥에 즐비하였다.

그런 사람들은 땅을 보러온 사람들이었고 우리는 물을 보러 온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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둑을 쌓는 기초는 물론 돌이었지만 그 초석 위에 쏟아붓는 흙은 바다를 준설하여 올라오는

바다 모래라고 한다.

이 공법으로 공사비가 다른 나라 보다 반 밖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내가 다니는 곳에 ROTC 모임이 있어서 봄, 가을로 국토 순례 비슷한 행사를

한다.

덕분에 땅굴도 여러군데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보았고 요즈음 말이 많은 연평도

근해의 NLL도 오래전에 답사, 그러니까 '해상 답사' 같은걸 해 보았다.

심청이 팔려가던 인당수 물길도 그 어디메쯤에 있다는 이야기를 브리핑 장교가

하여서 농담삼아 들었는데 사실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게 되었다.

 

금년에는 완도, 진도를 끼워서 땅끝 마을까지 1박 2일 작전계획을 집행부에서

잡았다가 최종 순간에 새만금 방조제와 변산반도의 격포 채석강, 내소사, 선운사,

그리고 다음날 고창을 일주하고 돌아오는 일정으로 변경이 되었다.

적절하게 작전 계획이 변경된 것이었다.

일기예보도 작전 변경에 한 몫을 하였다.

 

새만금 방조제 공사장은 사업단장의 배려로 안내자가 나와서 그간의 경과와 기대 효과,

발전 계획 등을 7층 관람대에서 소상하게 설명해주고 이어 공사가 계속되는 둑과

이미 건설된 수문이 있는 곳까지 친절하게 안내, 설명해 주었다.

하지만 거대한 숫자가 기본이 되는 많은 설명은 지금 기억에 남아있을리 없고

둑을 쌓는 큰 돌하나가 3톤에 3만원이라던가---, 철제 수문 하나가 몇 십톤이라던가

내가 여기서 지금 뻥을 쳐도 읽는 분들이 개념 파악을 잘 못할 그런 말들이 귓전을

스쳤을 뿐이다.

하여간 일을 맡은 분들이 환경론자들과 그래도 잘 타협이 되어서 늦게나마 국가 기간

산업들이 들어오고 중국과의 무역, 관광, 생산시설 등등에서 전초기지가 된다는 말만

기분 좋게 내 마음에 남아서 개념을 설정하고 있을 따름이다.

땅을 살 생각이나 여유는 없으니 천만다행이다.

그래도 부동산 업자들이 공사장 입구에서 나누어준 질이 좋은 광고지를 배낭에 넣어

갖고 왔으니 현장에서 버린 일행중의 일부 보다는 마음을 덜 비우고 사는가,

나중에 좀 부끄러웠다.

 

 

  

  

  이쪽은 공사가 끝나서 이미 철제 갑문이 어마어마한 역할을 하고 있었다.

바다물이 드나드는 곳을 내려다보니 몸이 빨려내려갈듯 하였다.

 

새만금 방조제를 구경하고는 변산반도 국립공원으로 내달렸다.

방조제 공사장에서 질문을 너무많이 하고 설명이 길어져서 점심 때를 놓치고 있었다.

군산 식당이라던가 매스컴도 많이 탄 격포의 식당에서 시장이 반찬인지 어쨌던

남도 음식의 진수를 맛보는듯,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점심도 처음이었다.

음식 이름은 '충무공 밥상'으로 단돈 만원이었다.

복분자 술도 또 얼마나 달고 맛있었던지---.

 

 

 

 

 

"충무공 밥상이라니, 이순신 장군이 왜 격포에 오셨어? 여기 무슨 관계야?"

누가 모르는 소리를 하였다.

 

충무공이 어디 한둘인가.

이 동네에도 충무공 시호 받은 어른이 없으란 법 있나.

여럿이 몰매를 주었다.

모르는 소리를 했다가 타박을 받은 분이 조금 있다가 거북선을 앞세우고 반격에

나섰다.

"그럼 충무공이 도대체 몇 분이야?"

아무도 그 반격에 대답을 못했다.

궁금한 일들, 몰라도 상관없는 일들이 우리 주위에 얼마나 많은가.

예를 들면 여기 식당 골목으로 들어오다가 본 미장원, 아니 헤어 샵의 이상한

이름도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밥을 먹고나서 일행은 인근에 있는 채석강으로 가서 초가을의 아름다운 해식

해변을 보고 즐겼다.

 

 

 

일행은 이제 '내소사'로 달려갔다.

내소사의 유래는 좀 마음에 껄떡지근하였으나 그때로 치면 또 국제화가 되고

'소'씨 성가진 외국군 장군이 들어오고 뭐 그런건지 아닌지도 모르겠는데,

하여간 절집의 아름다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저기 돌탑 같은 곳은 살아있는 자가 떠날 때 생전의 것을 모두 태우고 가는 곳이다.

그림 그리는 아이들이 그 흔적을 잡으려는듯 싶다---.

 

 

 

 

 

 

 

가을이 풍선처럼 떴다---. 

 

마침 인도에서온 여류 과학자를 만나 이야기를 좀 나누었다.

대전의 카이스트에서 무슨 국제 과학자 세미나가 있어서 왔는데 우리나라 교수가

안내를 하다가 내가 인도를 최근 다녀왔다고 말을 걸었더니 반색을 한다.

"사람들이 인도 사람을 이상하게 보고 경원시해서 참 민망했는데 말을 걸어주시니

감사하고 체면 유지가 되었어요."

그런 인사치례를 받고 나니 괜히 기분이 좋았다.

"방가롤로"에서 왔느냐고 아는체 하니 그곳에 있다가 "분자브"로 옮겼다고 한다.

"펀잡 말인가요?"

내가 영어 투로 또 아는체 했더니 맞다고하며 "델리"에서 멀지 않다고 한다.

인도가 커서 사실은 서울 부산 보다도 더 먼 거리일 것이다.

 

방조제와 내소사 절집에서 시간을 많이 흘려서 일정에 차질이 생기다 보니

한군데를 빼야하는 사단이 생기고 결국 '미당 서정주' 시인의 생가 방문이 거기

걸려든다.

제일 만만한게 '홍에(어의) 뭐'라고 인문이고 예술이다.

 

어쨌거나 선운사 가는 길이 정말 급했다.

아직 가을해는 남아 있었으나 사람들은 선운산정을 밟거나 적어도 마애석불까지는

가야한다는 것이었다.

선운사 관광호텔에 짐을 냅다 팽게치고 일행은 낙조의 선운산정을 향했다.

마애석불이 인자하게 우리를 맞아주었다.

석불의 배꼽 쯤에는 구멍을 메꾼 흔적이 있었다.

그 속에는 무엇을 넣고 메꾸었을까---.

설이 많다고 한다.

아무것도 없을 수도 있다고 한다.

 

 

 

 

 

내려오는 길은 칠흑처럼 캄캄하였다.

풍천장어와 복분자 술이 기다리는 식당을 향하여 구보에 다름아닌 속도를 내는

일행들을 만류하여 경보 수준으로 속도를 조절하였다.

휴대폰이 손전등 역할도 하는줄을 이날 처음알았다.

부상병, 아니 부상자가 생겼을리 없다.

모두 마애석불의 보살핌 덕분이었다.

선운사 쪽 풍천장어와 복분자에 관한 이야기를 여기에서 해설한다는건 내 주제를

넘는 부분이다.

단지 맛있게 먹고 멋있게 취하였다.

 

아, 저 위 '거꾸로 가위' 헤어 샵의 뜻은 가위 솜씨가 너무 좋아서 나이를 거꾸로 가게

한다는 그런 뜻이었다.

일행 중의 한분이 묻고 내가 앵글을 맞추었다.

복분자 낮 술이 준 용기였나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