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보고다닌 투어

갠지스 강변, 바라나시의 새벽 길

원평재 2007. 10. 13. 21:03

 

바라나시라는 도시의 이름은 갠지스 강의 지류인 바라 강과 나시 강 사이에

위치하여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힌두교 7대 성지 중의 으뜸으로 생전에는 이 곳에서 목욕재계하는 기회를,

사후에는 이곳 화장터에서 불살라지는 것을 힌디들은 최고의 보람으로 삼는다.

 

갠지스 강의 흐름 중에서도 이곳은 우리 안동 땅의 하회처럼 물이 한 구비 돌아서

흐르는 곳으로 윤회의 모양을 상징하는 지형인데, 이들은 이 형상의 중간쯤에 있는

여기 바라나시의 강변에서 몸이 불살라지면 윤회의 업으로 부터 해방되어 극락으로

영원히 들어간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것이다.

힌두교나 불교가 60퍼센트는 같다는 설명이 실감이 나고 또 이해가 쉽기도 하였다.

다만 윤회의 사상을 보다 나은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하는 염원 쯤으로 생각한

상식은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 현생에서의 삶을 고단하게 보는 것은 이곳 힌디들 뿐만 아니라 우리 중생

모두의 공통적인 생각이리라.

삶이 고해일진데 다시 환생하는 것도 고통의 연장이나 반복이 아니겠는가.

 

 

요즈음 DNA 우주관으로 보면 생명체의 영원한 승자는 DNA라고 한다.

우리의 육신은 그 DNA의 영속성을 유지해주는 표피같은 존재, 껍데기에 다름

아니라고 보는 것이다.

수행 비구니들이 그래서 독신을 내세우는지도 모르겠다.

고해 속에 끝 없이 반복 던져지는 자신의 DNA를 구하기 위하여서---.

갠지스 강변에서 묘한 명상, 혹은 망상에 사로잡혔다.

  

 

 백만 이상의 힌디들이 해마다 인도 도처에서 몰려 와서 몸을 씻는다는데,

우리 일행은 눈을 씻고 그 광경을 보러 역시 새벽 길에 나섰다.

나뭇단을 잘라서 파는 여인이 있기에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우리로 치면 치솔

을 파는 여인이라고 한다.

나무 껍질의 결이 고우면서도 요철이 심하여 이를 닦기에는 그만이라고 한다.

갠지스 성수로 이를 닦고 몸을 씻고 또 그 성수를 마시는 데, 아무 탈이 없다고

한다.

치솔 파는 여인이 새벽 길의 수행자 같았다.

 

 거리의 밥집도 문을 열었는데 미리 밥을 먹어도 되는건지,

갠지스로 가는 사람들이 아닌지, 중요한 것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소를 성스럽게 여기는 그들의 신앙과 전통을 나그네가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도처에 너무 넘친다.

갠지스 성수로 가는 길목에서 자고 있던 소들이 안면방해, 혹은 수면방해를

받고있는 셈이다.

 

 

 

 

 거지들이 새벽부터 한 줌의 시혜를 바라고 있다.

 

 갠지스 강변의 노숙자들이 보인다.

 

  

 마침내 갠지스 강변에 도달하였다---.

우리는 배를 빌려 갠지스 강상을 오르내리며 저 거창한 현장을 보고 또 찍었다.

어두움이 서서히 걷혔다.

  

 

  간밤의 유등행사에서 남은 불꽃인가, 새벽에 새로 띄운 염원인가---.

 

 화려한 꽃잎을 뿌리고 순례자들이 물에 들어갔다---. 꽃을 파는 보트들이

강상에 즐비하였다.

 

  

  

  

 무슨 새벽 의식 같은데 업소의 여주인이 아닌지 모르겠다---.

 

 가끔 성수에 입욕하는 수준이 아니라 멀리 헤엄쳐 다니는 사람들도 보인다.

큰 축복을 바라는 몸짓이자 염원이고 과시일 수도 있겠다---.

  

 기행문에 흔히 등장하는 성자의 모습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성자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이 녀석들이 포즈를 잘 취해주지 않는다. 돈을 달라는 것이다.

 

 

 

 

  

 

 

  

  

  

 

 이 곳 사자상을 지나서는 사진을 찍지 말라고 한다.

갠지스 강변 화장터의 경계지대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나는 적당한 정도에서 규정을 약간 위반하기로 작정하였다.

함께 간 일행 중의 한사람은 많이 위반을 하다가 큰 코를 다쳤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