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운사'에서 아침을 맞이하니 이제 전북의 명 고장이자 옛 터인
'고창(高敞)'을 향할 일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복분자 술은 음미했으나 정작 복분자 식물은 구경도 못했네."
누군가의 아쉬운 소리를 싣고 버스는 휭하니 달렸다.
달리는 버스 속에서는 또 "고창은 짧게 발음할게 아니라 '고-창'이라고 높을
'高'자를 살려야 한다"는 말도 나왔고, 그럼 '창'자는 무슨 뜻인가에 갑론을박이
오고갔다.
결국 헛간 창(廠)으로 내가 잠정 결론을 내렸으나 가서 알고보니 '높을 창(敞)'
이었다.
틀린건 민망했으나 고고한 고창 마을의 이미지를 살리기에는 잘 틀렸다 싶었다.
그건 그렇고 고고한 고창 마을은 객인들을 쉽게 들여보내지는 않겠다는 듯이
중간에 저 유명한 '고인돌' 무더기를 펼쳐놓아서 유한한 인간의 상상력을 크게
시험하고 있었다.
고인돌 선사마을의 솟대가 의미심장하다.
영혼을 하늘로 실어가는 매체로 옛 사람들은 새를 생각하였다---.
고창 읍성 들어가기 4km 떨어진 얕은 야산 일대에 고인돌, 지석묘, Dolmen 등으로
불리는 '큰 돌 문명'의 유적지가 홀연 눈 앞에 나타났다.
그동안 먹고살기 바빠서 우리가 오래 방치하였던 이 놀라운 유적지는 이제야
지역의 손길들이 문화, 문명의 유적지로 새로 가꾸고 더욱 발굴, 계발하여서
아름답게 보존하는 숨결을 느끼도록 하고 있었다.
휴일이라 그런가 우리 말고도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서 사진도 찍고 진지한 대화도
나누고 또 새로 만든 체험장에도 발을 디디고 있었다.
약 5천년 전부터 2천년 전까지 축조된 이 큰 돌들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저 옛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해버리기에는 아쉬움이 따른다.
돌무더기 사이에 사람의 주검을 놓기에는 옹색한 곳도 많이 있다고 한다.
일종의 제단이었을 가능성, 장례 이후 육탈을 시킨 후에 뼈만 모셨다는 설도 있다.
물론 거대 지석묘도 많이 있다---.
북방식은 탁자형이고 이 곳 고창은 남방식에 가까워 굄돌이 흙 밑으로 들어가
있어서 큰 대석 만 땅위에 놓여있는듯이 보인다는 사실 설명만으로는 무언가
아쉬움이 따랐다.
종교심 같은 갈망이 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하긴 그런 과학적 관찰로서의 설명만을 부연한다면 이 곳에는 남방식 말고도
특이하게 북방식이 혼재해 있다는 연구도 있고 지금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고인돌
군락으로는 최대 규모라는 말도 따른다.
고인돌 말고도 선돌이 있고 이런 큰 돌 문명을 '태양 거석기 문명'이라고 고등학교때
세계사 선생님에게서 들었던 기억도 난다.
그때 선생님은 새파란 젊은이였는데 깊은 인상을 주시고 아마도 대학으로 가셨던 것
같다.
황해붕 선생님이라는 이름도 지금 기억이 난다.
이야기가 엉뚱하게 빠졌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기억과 시간, 영원성에 대한 갈망, 희구,
모든 떠나가는 것에 대한 가슴을 찢는 비통한 그리움,
긴 인류사에서도 이런 느낌으로부터 자유로웠던 시절이 한 순간이라도 있었을까.
어떤 시대, 어떤 종족의 어떤 종교도 그 역할을 다 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얼마 전에 보았던 갠지스 강가에서의 적멸의 장면에서 느낀 감상이 다시 치민다.
지금, 여기에서 이런 상념을 떠올리고 뇌까리는 순간도 사치한 순간이고 오만한
말장난 같기만 하다.
이 돌더미를 멀리있는 원석에서 잘라내어 이리로 운반하고 축조한 다음,
그들은 죽은자를 돌 아래에 모셨을 것이다.
노동력으로 계산을 하면 최대 1700명의 장정이 오래 애써서 일군 노작이라고
해설서에는 과학적 고찰을 하고 있다.
이윽고 묘기가 완성되고 나면 땀흘린 사람들은 겨우 한숨을 내 쉬었을 것이다.
그러나 묘기의 당사자들은 내세를 염두에 두었어도 당장의 별리를 통곡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그들도 다 흙에서 흙으로, 재에서 재로 돌아갔고 지금 이 거대한
돌 무더기들 만 남아서 유한한 인간들에게 무한을 보여주고 있는게 아닌가.
일정상 짧고 바튼 시간이 할애되었지만 나는 카메라를 들고 줄이 쳐진 묘기들의
가장자리로 달려갔다.
미리 온 관광객 들이 조금 북적거렸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돌 구조물 앞에 바짝 모였다.
"고창에 살아도 이렇게 가까이 와 본 건 처음이네."
"여그는 남방식과 북방식이 같이 있다메?"
"그래, 여기 판석 밑에 굄돌이 이렇게 받쳐주고 있잖여. 이건 북방식이야."
"모르는 소리 말어. 내가 여기 고인돌 재정비할 때 내 손으로 그 굄돌을 갖다가
고인거여. 돌 색갈이 다르잖여."
여러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오래 듣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고인돌 축제가 곧 열릴 모양이라서 지역의 지식인, 유지들이 모인 모양
같았다.
버스는 다시 헉헉대며 우리를 고창으로 데리고 갔다.
"저기 복분자 식물이 보이네."
누가 차창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고창도 복분자가 유명하다고 한다.
딸기과의 복분자 식물을 처음 보았다.
조금 깔끔하고 깨끗하다는 인상 외에는 별반 다른데와 다를 데가 없다 싶은
'고창'은 버스가 읍성 쪽으로 가까워 가면서 이제껏 무심했던 사람들에게
자격은 없지만 보여준다는 식으로 역사물들을 하나씩 끄집어 내어 보이는데
주눅이 들 정도였다.
역사물이란 꼭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하드 웨어만 말하는 것이 아니어서
문화유산으로 계승해온 판소리 처럼 소프트 웨어 부분도 찬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워낙 많은 역사적인 고창 문물은 여기에서 다 헤아릴 여지가 없어서 놓치기 아까운
몇몇 피사체들만 눈에 들어온 데로 소개한다.
신재효 판소리 전수관---. 그 분 생가를 담지 못했다.
답성놀이를 형상화해 놓았다.
돌을 이고 음력 3월이던가, 성채를 한번 돌면 어떻고 두번, 세번이면 행운이 모두
더하게 된다는 믿음을 민속으로 만들어서 성곽의 유지, 보수에 민중의 힘을
모았고 이고 올라간 돌은 유사시에 석전의 자원이 되었다.
특별히 척화비가 눈에 확 들어왔다.
대원군 때 세운 전국의 척화비가 일제 강점기에 다 사라졌는데 이곳만 남았다고 한다.
고창 읍성이 면면하게 유지 되어온 그 기개와 함께 이 곳 고창 사람들의 고고함과
나라 사랑하는 고집이 보인다.
여기 대나무 밭이 유명하다고 하여서 허위단심 달려 올라왔다.
영화 같은데에 많이 나온다고 한다.
여기는 내아라고 하여서 성주가 와서 살며 손님을 불러 모은 곳이라고 한다.
성내가 매우 넓었다.
고창 여중고가 이 안에 있었다고 나중에 들었는데 명당이었구나 싶다---.
이제 일정이 막바지에 도달했다.
백양사를 거쳐서 호남 고속을 타고 올라가면 되었다.
하지만 백양사도 만만치 않다.
아직 단풍은 들지 않았지만---.
백양사 대웅전 들어가는 입구에 '이뭣고'라는 화두의 석탑이 서있다.
세상사에 다시 한번 의문을 제기하여 자신을 알라는 강한 설법이었다.
델포이의 신전에 있는 현판, 'Know Thyself'와도 맥이 닿는지 모르겠다.
대웅전 용마루 기왓장 맨 가운데 한장은 청기와였다.
이 뭣고?
기와를 모두 청기와로 해서 부처님을 모셔야하겠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중생들의
돈이 너무 들어가서 한장의 정성만 올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모두 청기와로 하는 것 보다 훨씬 좋게 보였다.
일정의 끝에 기어코 비가 내렸다.
그러나 우리의 여정은 끝이어서 운치를 더하였다.
백양사 앞 큰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는데 우리가 두런거린 회사 이야기를
주인이 듣고서 인연이 있다며 집에서 담근 복분자 술을 몇 병 주었다.
빗 속을 질주하는 버스 속에서 후한 이 곳 인심을 이야기하며 복분자 술을 금방
비워냈다.
(이번 기행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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