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즈라호(Khazuraho)로 가는 길은 바라나시에서 약 400킬로미터의 거리였다.
최근에 포장이 좀 되었다고는 하지만 길은 멀고도 험했다.
힌디 청년 가이드는 "한국에서는 카메라만 없다면 이 따위 거리야 2시간이면
되지요, 하하하."하는 것이 칭찬인지 다소의 야유가 들어있는지 모르겠다.
어쨌거나 가파른 산을 넘어가는데 앞에서 트레일러 하나가 고장이 나서 꼼짝도 못하는
바람에 싱갱이 끝에 가까스로 빈틈을 비집고 우리 차가 올라왔다.
승객을 태우고 그대로 곡예를 하려는 것을 내가 우선 승객은 다 내리게 해야한다고
큰 소리를 쳐서 일단 위험한 국면은 면하기도 하였다.
이날 늦게 일행은 카즈라호에 도착하여 호텔에서 하루밤을 지내고 다음날은 아침부터
인력거, 즉 이곳 말로 '릭사'를 타고 유명한 힌두 사원, 즉 카마수트라 성애사원에 도착
하였다.
동서로 나뉘어 있는 이 힌두 사원은 A.D. 950~1050년에 “달의 신”을 표방하는
찬드라의 아들 찬델라왕에 의해서 축조되었다.
성애사원을 세운 목적은 불교를 억압하고, 자신이 섬기는 힌두교를 확장시키며, 인구 증가를 꾀한 거창한 역사였다. 이 카마스트라 성애 사원에는 그들이 섬기는 신들을 내부에 조각해 놓고 그 외벽과 그 안에 여러 가지 성 행위를 상상의 극치를 자극하며 묘사한 조각들로 장식해 놓았다. 성애를 표현하는 여자들은 모두 압살라라고 하여서 성애의 요정들이며 당시에는 일종의 성매매도 하였던 계층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캄보디아에 갔을 때 그곳 앙코르 와트 사원에도 압살라들이 있었던 기억이 났다. 인도의 힘이 예전에 앙코르 와트에 미쳤다는 이야기도 되며 지금 캄보디아 언어가 옛 산스크리트어와 인연이 있다는 이야기가 실감으로 떠올랐다.
이슬람세력이 이곳을 정복했을 때에는 사원의 조각들이 너무나 성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여서 대대적으로 파괴해버리는 바람에 현재는 85개의 사원중
22개만 남게 되었다고 한다.
85개의 사원이라는 숫자도 성애의 테크닉 숫자에 맞물리는 것이라고 한다.
여든 다섯가지 체위, 내지 테크닉이라니---.
놀라운 일이다.
이 성애의 기교가 바로 카마수트라에 비전되어서 동양의 소녀경과 쌍벽이라던가---.
아무튼 남아있는 사원들은 전체로서도 하나의 예술작품에 다름아니고 거기 외벽을
장식하여 부조한 조각들은 거의 모든 에로티시즘을 표현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요염하고 관능적인 성행위 장면들이 파노라마 처럼 시각을 어지럽힌다.
왜 이런 일들이 진정 있었을까---.
남녀 결합의 극치를 통해 신과의 성스러운 합일을 기도했던 것으로 파악이 되지만
당시의 생활풍속도의 일부이리라는 짐작도 가능케한다.
사원 전체는 몇 개의 소그룹으로 나뉘어진다.
우선 서쪽엔 시바신(파괴의 신)을 모신 깐다리야 마하데바 사원과 데비 자가담바
사원이 나란히 세워져 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하는 사원 안은 박쥐들이 가득하고 내부는 여성의 자궁을
상징하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다.
촛불을 밝힌 승려만이 신자와 관광객들을 맞고 있고 천년의 세월을 간직한 사원은
빛바랜 모습으로 당시의 모습을 말없이 전해줄 뿐이다.
사원의 외곽을 장식하는 조각들은 그야말로 카마수트라, 섹스 테크닉의 전당이다.
여러명의 남녀가 교합하는 장면과 동물과의 성행위 장면 등 끝이 없는 이 에로틱한
상상들은 당대의 뛰어난 조각가와 예술가의 손을 빌어 생생하게 현대인들에게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동쪽 그룹의 사원 역시 예외는 아니다.
앞서의 사원들보다는 규모도 작고 조촐하지만 빠스바나트 사원과 샨티나타 사원,
그리고 자이나 교의 사원들이 흩어져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자이나교의 사원은 성애의 미투나상을 기대할 순 없지만 모든 소유를 버림으로써
비로소 자유롭다는 자이나교의 창시자답게 나신으로 만들어진 조각상이 자리하고
있다.
약 100년간 집중적으로 건립된 카즈라호의 사원들은 당시 북인도에 대두된
탄투리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이는 '자신과 절대자와의 완전한 동일성'을 주창하는 것으로 그런 절차의 첫 번째
의식은 성적인 의례였다.
미투나상은 그 상징적인 표현인 셈이다.
건립 의도야 종교적인 에너지에서 비롯되었다해도 그처럼 오랜 세월동안 숱한
전쟁과 파괴의 연속에서도 꿋꿋이 살아남은 것은 신비로운 수수께끼가 아닐 수
없다.
부조를 한 '바탕 돌'은 사암이라고 한다. 석질이 부드럽기는 했겠으나 살아있는
피부를 연상 시키는 수준으로 돌을 깎은 석공의 테크닉이 입을 다물지 못하게하며,
또 그 많은 상상력을 발휘한 기획 단계가 더욱 신비롭게 연상된다.
모든 양태는 또 실천적 자세라고 한다.
놀랍다.
맨 왼쪽의 괴수와 여인의 허리에 감긴 뱀은 정염이라고 한다.
힌디 청년은 이러한 정염을 처리하는 수단으로 성애가 더욱 강조되었다고 한다.
석공의 기술이 몸의 구석구석을 모두 그냥 놓아주지 않았다고 그는 또 강조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부조 형상을 보고 설화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그건 '석두'이리라.
그 힌디 청년은 무슨 악기 연주의 조합같은 이야기도 늘어놓고 스와핑, 게이,
등등의 이야기를 풀어놓았고, 일행은 또 그 말이 떨어지자 말자 그 형상에 렌즈를
갖다 대었으나 지금 메모해 놓지 않았던 그 이야기들은 모두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팔뚝에도 털이 숭숭난 그 청년이 이건 사랑의 미약, 곧 비아그라를 만들던
절구통이라고 지적하였다.
여기에서는 왜 손가락이 나왔는지 모르겠다---.
괴이한 이 낙서는 언제 나왔을까---. 보수 과정에서인듯 하다.
인류의 문화 유산으로 지정은 되었으나 아직도 보수할 일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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