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前派를 아시나요? 예술의 유파 중에서는 평소 거리가 가까우면서도 그 실체가 사실은 오리무중인 경우가 많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그러하고 모더니즘도 예외는 아니다. 이론의 시대라고 하는 20세기 후반부터 그런 사태는 폭발적이 되었지만, 또 모른체 하면 그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라파엘 前派"의 그림과 詩가 가슴으로는 오래 전에 들어와 앉았는데도,이론적 정리는 혼란스럽기만 하였다. 우선 이 유파의 화가, 시인들은 르네상스 이후의 "人本的"자유의지가 너무나 다원적으로 확장되어서 오히려 역겨움을 느낀데에서 그들의 주장을 출발시켰다. 이들은 聖畵의 대가이자 중세의 종교화를 경건하게 그렸던 "라파엘로"이전으로 돌아가서 혼돈된 가치관을 정리하자는 데에로 뜻을 모았다. 대표적인 화가로는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가 있고 그의 누이 동생이자 시인인 크리스티나 로세티는 죽음과 삶에 관한 깊은 천착으로 유명하다. 그녀가 결혼을 하지않고 평생을 경건하게 산 것은 라파엘 前派의 신봉자로서는 당연할지라도 외경스럽다. 그런데 이 유파의 그림들이 매우 몽환적이고 세속성과 인간적인 상상력을 극도로 확장시켜주는 것은 위의 정의와는 맞지않는다.이 무슨 모순인가---. 놀랍게도 이들은 세기말이 닥아옴과 함께 세기말적인 유파, 다다이즘, 아나키즘, 유미주의 등으로 마침내 합류한다. 아니 합류가 아니라 선도적 역할에서 그 진면목을 드러낸 경우도 많다. 왜 그랬을까? 인터넷 세상이 아니라면 나는 이런 의문도 가볍게 즐기면서 그냥 그들의 그림이나 시를 혼자 사랑하고 말았을 것이다. 세상에는 내가 모르면서 지나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여기 지금" 창공과 같은 사이버 시대가 오면서 마음의 행로가 달라졌다. 이걸 한번 캐보고 이 창공에 띄워보자, 그렇게 마음먹고 다시 앞뒤를 캐어보니 수수께끼는 좀 쉽게 풀리는 듯도 하다. 아마도 이 사람들은 경건한 이상을 갖고 라파엘 이전으로 돌아가 보았을 것이다.그런데 이전으로 돌아가보니 중세 교부철학의 시대로만 회귀한 것이 아니라 마침내 저 그리스 로마 시대로까지 지평이 넓어졌을 것이다. 그곳에는 人本과 상상력이라는 動力을 단 "뮈토스", 곧 신화의 광활한 4차원이 전개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를 맛본 그들이 어찌 중세 교부철학의 영토만으로 자신들의 예술을 절제, 국한시킬 수 있었으랴---. 인터넷의 세계에 들어온 우리가 다시 이 울타리를 벗어나기 힘들 듯이---. 혹시 뜻한 바 있어 이 인터넷 울타리를 벗어나고자 할지라도 그/그녀는 선언하기를,"이제 나는 인터넷 혹은 사이버의 밖에 있다"라고 아이러니컬한 상대적 표현으로 자신을 나타낼 수밖에 없듯이---.그들이 세기말적 요소로 합류한 것도 "예술지상주의"가 세기말로 나아간 것과 같은 맥락이리라. 즉 아름다움의 끝간데는 역시 데카당(퇴폐)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 아름답고 맛있는 과일은 벌레가 약간 먹어야하지 않던가. 보들레르의 미학은 "악의 꽃"이었다. 한때 강의실에서 잘 써먹은 조크는 "화장하지 않은 여인, 게으른 여인"이었다. 시대가 바뀌어 본격적인 "성담론"은 인기 최고의 강좌가 되었지만 어설픈 농담은 성희롱이 될까봐서, 이제 이런 농담은 삼간다. 그러나 나의 지론에는 변함이 없다. 화장하지 않은 여인 게으른 여인, 가장 아름답기 위해서는 퇴폐의 경계를 아슬아슬 넘나들 수 있는 가슴---. 글이 길어져서 크리스티나 로세티의 죽음에 관한 명상을 그린 "나 죽거든---", 이라는, 死觀에 관한 시는 여기에 옮기지 못함을 유감으로(혹은 다행으로) 여기면서---.
Veronica Veronese Ecce Ancilla Domini ! The Annunciation
Il Ramoscello The Blessed Damoz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