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문학 산책

스케치 북

원평재 2005. 1. 7. 11:01


중고등학교를 지역의 대표성이 있는 두 군데에서 따로 수료한 것은 나에게 행운이었다.
두 학교는 모든 분야에서 거의 양극을 달리는 특성이 있었다.
그 구체적 양태를 제시하자면 한이 없겠지만 단적인 표현을 하자면 보수적 성향과 진보적 
성향의 차이라고 이분법적인 정리를 할 수도 있겠다.
물론 이 이분적 양극 사이에는 수많은 스펙트럼의 띠가 있어서 조금씩 다른 빛갈들이야 
일일이 매거 할 수도 없겠으나, 나는 이런 양극의 현상들을 독특하게 체험하며 항시 
즐거워 하였고 속 마음으로는 양극적 요소들을 변증법적으로 정리하여 향유하였다.
오늘날의 이 인터넷 시대에도 양극적 현상은 여전하여서한 쪽은 동기회 사이트를 
꼼꼼하게 웹 디자인하여 독특하게 개발했으나 활동은 다소 이완된 상태이고, 
다른 한쪽은 그토록 공들이고 힘들일게 무어냐는 식으로 "다음 카페"의 틀을 활용하여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모습을 보이며 활동은 상대적으로 다이나믹하였다. 
오늘은 이 다이나믹한 쪽의 동기회 "카페" 이야기이다.
오년전쯤 나는 이 카페를 만들었는데 내가 몸담고 있는 기관에서의 내 역할이 점점 
바빠져서 마침내 카페를 만든지한 이년만에 카페 주인의 자리를 다른 동기에게 맡기고 
뒷전으로 물러나고 말았으나 동기들은 여러면에서 계속 우리 카페와 창업주인 나를 
동질시하여서 개인적 입장의 장단점은 반반이었다.
며칠전에도 대기업의 고문으로 있는 친구가 몇 사람을 초청하여 저녁 밥상을 차렸는데 
주제는 마침내 카페 문제였다.
모인 장소는 옛날 화신 백화점 자리의 33층 스카이 라운지였다.
구성원들은 고위 공직에 있었던 친구들, 특히 대사를 했던 친구가 셋이나 있어서 분위기는 
컬러풀하였다.
내가 이 카페를 넘길 때만해도 회원은 겨우 200명가량이었는데 지금은 2000명을 육박하였다. 
이런 성황의 배경에는 현 주인장의 헌신적 노력이 기본이었지만더불어 내가 손을 뗄 때에 
카페의 성격을 "사교, 문화"의 범주로 바꾸고 회원의 자격도 모든 사람들에게  오픈한 영향도 
컸다고 할 것이다.
이 개방적 변신의 틀을 이용하여 지금의 주인장은 동기가 아니더라도 우리 세대에 속하기만 
하면 많은 사람들을 회원으로포용하여 다양한 외곽 세력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만사에는 음영이 있는 법이다.이 부분에 대해서 일부 동기들은 부정적 시각이다.
갑자기 낯 모르는 글쟁이들과 웬 중년의 여인들이 설치느냐, 이런 식이었다.
그런 말을 하는 동기들은 아이러니컬 하게도 카페 활동을별로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무튼 이런 불만 부분에 대해서 이날의 중론은 소수의견도 경청은 하되, 그로 인하여 
현재의 역동적인 카페 성격을 바꾸지는 말자는 쪽으로 금방 가닥이 잡혔다.
토론의 두번째 주제는 아주 최근에 카페를 공개 개방체제에서 비공개 공간으로 변경한데 
대한 의견 수렴이었다.
함께 참석한 주인장이 고충을 이야기 하였다.무차별 음란물 게재 문제와 특히 최근 
음악 저작권 문제로 부터 우리 카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설명에 참석자 
대다수는 이해를 하면서도 너무 소극적 자세가아닌가, 
다시 오픈 체제로 가야한다는 강한 주문이 대세를 이루었다.마지막으로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너무 한정적이라는 불만이 동기생들 간에 있다는 여론을 밥상머리에 올려 놓고 
난상 토론을 하였다.
특히 꼬리말, 댓글을 너무 주인장 혼자서 달고 있어서 모양새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도 
전달되었다.
이런 비판, 저런 비평이 충분히 이해가 되면서도 어쩔 수 없는답답한 노릇이었다.
나는 한 때나마 주인 노릇을 해 보아서 그 안타까운 정황을 십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소위 카페의 활성화란 쌍방 커뮤니케이션이 필수적인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참여에는 
인색하면서 부지런한 구성원들을 매도하는 일반적 현상이 우리 동기회 카페에도 예외없이 
찾아온 모양이다.
그렇다.글쟁이에 대한 "칭송과 폄하"라는 두가지 상반된 잣대는 동서고금에 공통적이었다. 
글을 쓴다고 하면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당대의 지식인들이라고 할 수있다.
그들이 쓰는 글들은 항상 고담준론의 범주에만 국한 되지않고 느슨함과 일탈의 경계를 
넘나들게 되어있다.그 필력의 한계가 끝간데 없을 때 독자들은 매료되고 함께 즐기다가 
어느날 갑자기 그들은 매서운 눈초리로 변덕과 시기를 부리게 된다. 
이것은 인간성의 본질이기에 탄식할 일도 되지 못한다.특히 문화의 층위가 척박하고 덜 
성숙한 사회에서 이런 현상은 더 심하다고 할 수 있다.나는 동기회 사이트에 글 올리는 
빈도수를 무척 자제하고 절제하여서 이런 분위기를 비켜가고 있지만,지금의 주인장은 
고지식한 데가 있어서 안타까운 마음에꼬리글, 댓글, 펀글을 연달아 올리며 고군분투하는 
모습이 자주 있었다.
이런 심정을 누가 이해하랴---.
마침내 주제가 심각해져서 떫은 얼굴을 하고 있는 주인장에게 내가 말했다.
"자, 이 33층 경관 좋은 곳에서 떫은 얼굴을 펴라구. 
미국의 개척 시대 문학적 대가인 워싱턴 어빙의 이야기를 타산지석으로 한번 
이야기 해 볼께---.
"워싱턴 어빙 "Washington Irving(1783~1859)" 은 당대의 지식인이었다.
그가 쓴 스케치 북은 당시 뉴욕을 중심으로 한 시중의 황당한 이야기와 뻥이 
태반인 풍물들을 스케치한 내용이었다.
예컨데 이 책에는 Rip Van Winkle이라는 청년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거인들과 
구주회(지금의 볼링)를 한 후에 자고 일어나니 20년이 지났더라 하는 너무나 황당 무계한 
이야기와 The Legend of Sleepy Hollow의 목없는 귀신에 쫓겨 도망간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하지만 이런 내용을 어빙은 용의주도하게도 그냥 싣지 않았다.
책의 제목을 우선  《The Sketch Book of Geoffrey Crayon》이라고 하여서 
책을 원래 쓴 저자는 "제프리 크레욘"이라는 사람이라고 슬쩍 발을 빼는 형식이다.
자신은 그저 번역과 정리만 하였지 고상한 지식인인 내가 이런 황당한 이야기를 
쓰지는 않았다는 면피이다.
"제프리 크레욘"이라는 이름도 재미있다. 
"제프리"는 중세의 대 문호 "제프리 초서"에서 따 왔을 것이다.
"크레욘"은 영어로는 그림 그리는 색연필이지만 프랑스어로는 연필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마스크 전략, 탈 춤 전략으로 그는 글쟁이에 대한 사회적 비난과 취약점에 
방어선을 폈다.
우리가 오늘날 이 인터넷의 세계에서 닉 네임으로 대처하는 방법론과 비슷하지 않은가---.
"자, 사랑방 카페를 위하여!"
내가 건배제의를 하였다.
"사랑방 카페"란 우리 동기회 카페의 이름이었다.
우리는 도합 세 병에 이르는 와인으로 건배제의를 계속하였다.
거의 모습을 다 드러낸 청계천과 꼬리를 문 자동차의 불빛 궤적이 아름다웠고 
스테이크도 두께는 좀 얇았지만 맛이 일품이었다.
스테이크 주문을 웨이터가 와서 받을 때 다른 사람이 "미디엄"이라고 하면 
나는 꼭 "라지"라고 햐여서 좌중을 웃기던 농담도 이 저녁에는 삼가하고 
"미디엄-웰던"으로 주문하여서 잘 구운 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이윽고 스카이 라운지에서 내려와서 보니 종로 바닥에 "오비스 캐빈"이라는 
맥주집이 있었다.
명동 시대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는 우리 세대가 "참새-방아간" 속성을 
외면할리가 없었다.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생맥주 피처를 몇번씩 비우며분투 노력하였다. 
흐르는 곡은 쇼펭의 "마주르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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