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문화의 파편들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가리---.

원평재 2008. 2. 3. 14:56

   "계간 문예지"에서 "이 한장의 사진"이라는 주제로 원고 청탁이 왔습니다.

일상 속에서 무슨 드라마틱한 사진이 있으랴, 망설이던 중 아래 사진을 찾아냈습니다.

 

약간의 히스토리가 묻어나는 사진이지만, 막상 글을 쓰려니 좀더 극적 요소가 없으면 재미가

없을 것이고---,

그런 마련으로 애를 쓰다보니 감정의 기복을 조금 극화한 부분이 생겼습니다.

 

개인적으로 모르는 관계이면 상관이 없는 한 편의 에세이에 불과하겠지만 나를 아는

향우들에게는 혹시 마음의 상처가 될 수도 있겠기에 가볍게 읽어주시기 부탁 드립니다.

 

 
<맨 왼쪽이 구미 초등학교 때의 은사이신 박영옥 선생님, 필자는 서있는 줄의 맨 오른쪽)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가리.

 

고향 대구로 내려가는 새마을 호 기차를 타기 위하여 새벽에 일어나서 <분당-수원>간의 버스를

탔다.

어둠 탓인가, 기차 여행을 떠난다는 마음이 버스를 탈 때부터 설레었다.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서 새벽 기차를 타고 구미에서 대구를 오갔던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동시에 내 고향이 “대구”인가, “구미”인가 하는 막연함이 어둠 속에서 나를 엄습하였다.

 

나는 그때만 해도 보잘 것 없이 한촌인 구미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후, 대처인 대구의 명문,

"경북 중학교"를 들어가면서 집안도 대구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구미와 나의 관계는 더 이상

깊이 성숙되지 못하였다.

지금도 초등학교 동기회가 있지만 나에게는 모두 "재 대구" 혹은 "재경"이라는 한정사가 붙는

모임이었고 그나마 잘 나가지도 않아서 내 고향은 어언 "대구"로 정착되고 말았다.

 

대구는 한동안 이 나라 정치사의 주류 인맥을 배출한 산실이 되어서 나는 알게 모르게 그런

인맥 속에서 삶의 바탕을 이루며 평생을 살아 온 모양이었다.

심지어 "박정희 대통령 추모, 현양회" 같은 데에서 초청이 올 때에도 대구 출신의 선후배,

친구들이 마련한 모임이었을 뿐, 구미 사람들의 마당은 아니었다.

 

우리 집은 사실 너무 일찍 구미를 떠났으니 그곳에는 집이나 터전이 남아있지도 않았다.

더구나 대구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이후, 나는 줄곧 서울과 수도권에서만 살았다.

해마다 가을이 되어 초등학교 운동회가 있을 때면 구미에서 내려오라고 연락도 왔지만

특별한 연고가 없는 그곳은 객지처럼 불편한 땅이었고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함께하는

초등학교 동기들도 적당히 서울에 올라와 살며 가끔 "재경 구미 동기회"의 이름으로 

잊지 않을 만큼은 만나고 살아왔다.

 

하긴 그런 마련해서는 대구도 마찬가지였다.

별달리 연고가 남아있지 않는 대구도 이제는 먼 타향이 되어갔고 동기라는 이름의 내 친한

친구들은 모두 서울에 살며 공연히 "대구"라는 이름만 들먹일 따름이었다.

 

"새마을 호" 기차는 대구까지 3시간이 걸린다고 낯 선 “수원역”의 열차 시간표는 알리고

있었다.

그런데 새벽어둠을 헤치고 도착한 나는 마치 “구미”행 기차표를 끊어야하는 사람처럼

매표 창구에서 잠시 머뭇거렸다.

"구미에도 새마을호가 섭니까?"

"네, 드릴까요?"

"아, 아니오. 대구 표로 주시오."

그래, 대구에 가려면 어차피 구미를 거쳐야하고 그때 가서 나는 진정한 고향을 택하여

보리라.

고향을 선택한다는 게 철없는 오만 같기도 하지만 내 성장 과정 때문에 두 도시는 필연적으로

선택의 카드를 내게 내민 게 아니겠는가. 내 잘못이 아니잖은가---.

 

기차는 어둠 속을 달리기 시작하였고 나는 창밖만 응시하였다. 현대는 속도의 시대라더니

기차는 금방 “신탄진”, “대전”을 지나서 “김천”에 와 닿고 있었다.

김천에는 “직지사”라고 하는 고찰이 있다.

구미 초등학교를 다니며 "육이오 한국 전쟁" 시기를 빼고는 매년 봄가을 소풍을 다닌 곳이

동네 앞의 "금오산"이었다.

쌍봉을 이루며 영험하게 서있는 이 산은, 가난한 “깡 촌마을” 구미 사람들에게 천년의 약속을

지키러 나타날 영웅의 정기가 서린 희망봉에 다름 아니었다.

그래서 구미 초등학생들은 이 금오산 자락으로 봄과 가을이면 열심히 소풍을 갔다.

아니 졸업을 앞두던 육학년 때에만 단 한번, 이 곳 김천의 직지사로 수학여행을 온 적이

있었다.

1박2일의 가슴 설레던 여행이었다.

넓은 절집 한 모퉁이의 큰 방에서 남녀 학생들이 둘로 갈라져 함께 잤는데, 그 중간에

선생님들이 대짜로 누워서 남녀가 유별함을 몸소 가르쳐 주셨고 우리는 수학(修學)하였다.

 

그 때만해도 오래 기차를 타고 직지사로 수학여행 갔던 기억을 더듬는데 내가탄 새마을호는

어느새 쏜살같이 멀리 금오산이 보이는 곳을 달리고 있었다.

쌍봉의 금오산이 불러 온 불세출의 인물은 박정희였다.

경부선 옆 가난했던 동네 “구미면 상모리”에 그분의 생가가 있다.

그러나 나와 그분은 그저 관념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그분이 위대했다는 평가가 옳든 그 반대이든 모두 관념의 차원이다.

 

하지만 동시대인의 숙명으로 한 동네에 살았던 그 집안사람들이라면 그런 차원을 넘어서서

무언가 맥락이 닿는 관계, 하다못해 어떤 감상의 공유 부분이라도 나와 맺고 있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 집안의 두 번째 분, 내가 한 번도 상면치 못했던 박상희 선생을 떠올린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한 시대를 얼마간이나마 같이 살았던 박정희는 미토스의 세계로 내게

남는다면 그 분의 중형, 박상희는 에토스의 정서로 내게 남는다.

 

광복 이듬해이던가, 대구 경북 지방에는 삼남의 물난리 이후에 들이닥친 흉년으로 인심이

흉흉했다고 한다. 이어서 사소한 일로 촉발된 민중의 봉기가 그해 10월 1일에 대구 근방을

중심으로 폭발하였다. 이른바 대구 십일 사건이었다.

경찰서와 공공건물들이 성난 군중들로 부터 습격당하여 점령, 파괴 되었다고 한다.

구미에 있는 경찰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습격을 받았고 서울에서 이른바 토벌대가 올

때까지 박상희를 중심으로 한 체제 전복의 이상주의 세력이 얼마간을 버티었다고 한다.

 

박상희의 마지막에 대하여서 구미 사람들은, 특별히 나의 어머니는 지조가 있는 사람이라고

내 어린 시절에 쉬쉬 하시면서도 극찬하였다.

남들이 막판에는 다 도망을 갔는데 그 사람만 끝까지 경찰서에 남아서 싸우다가

죽었노라고---.

서슬이 퍼런 반공 시대에도 박상희 씨는 그런 실화와 또한 다소의 미화가 곁들여져서 진보적

지식인으로 전설의 고향을 이어갔고, 그분의 미망인은 유복자를 낳는 어려움 속에서도

꿀리지 않고 살아갔다. 주장이 강한 여장부 형이었다고 나는 기억한다.

그분의 맏딸이 저 위에 있는 사진의 맨 왼편에 계신 내 초등학교 때의 담임 선생님이시다.

 

한국동란 기간에 대구로, 다시 밀양으로 피난을 갔다가 돌아 와보니 초등학교는 잿더미로

사라졌고 우리는 이리저리 공간이라는 곳이 있으면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서 수업을 받았고

그것도 없으면 "갱빈"(낙동 강변)으로 나가서 모래 싸움을 하며 야외 수업을 즐기고 놀았다.

저기 위에 보이는 선생님의 성함은 “박영옥”이었으며 김종필 전 총리의 부인이 된다.

김종필 씨가 군사정권의 초기에 분투노력하고 있을 때에 나는 어머니의 성화로 옛 담임

선생님인 박영옥 여사와 그분의 친정어머니 조 여사를 자택으로 찾아가서 인사를 한 적이

있었다.

내 돌아가신 어머니는 조금 잘 사시면서도, 고향에서 어려웠던 시절의 그 댁과 친교가 늘

있으셨다.

바쁜 중에도 박 선생님은 찾아간 우리를 환대하였지만 이야기가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자,

그 초등학교 교사 시절을 썩 반겨하지는 않는듯 하였다.

선생님 노릇이야 자랑스러우셨겠지만 그 험한 시절을 반추하여 감내하기는 힘이 드셨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나중에는 대학에서 인문학을 가르치는 먹물 샌님이 될 성격이어서 그 날의 상면 분위기를

부담스러워하며 다시 인사를 여쭙지는 않았다.

 

내가 지난날을 잠시 반추하는 사이에 기차는 구미역에 닿았다.

나는 잠시나마 나가서 쌍봉의 금오산을 카메라에 담으려 하였으나 플랫폼을 덮은 건물의

위용 때문에 조금 전까지 객차에서 보이던 금오산을 잡아낼 수가 없었다.

정말 구미 정거장도 공단으로 발전한 도시의 건물답게 그 규모가 놀라워서 내 기억속의

작은 정거장을 동화의 세계로 만들었다.

내가 이 동네를 떠난 후에도 그 사이 몇 차례 승용차로 내려온 적은 있었으나 이렇게 기차역에

발을 디뎌 본 적은 없었던 것이다.

고향에 대한 내 불찰이었다.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초등학교 동기들로 고향을 떠난 사람들은 다 박봉의 월급쟁이 신세가

되었고 남아서 버틴 친구들은 모두 공단으로 수용된 땅의 보상금을 받아서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는 일찍 떠났으니 유감도 없지만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돈을 만질 수

있었던 "재경 구미 초등학교 동기생"들은 억울하기도 하겠다.

 

20세기 초, 미국의 소설가 토마스 울프는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You Can't Go

Home Again)이라는 장편 소설에서 15년 만에 돌아 온 고향의 세태를 그리고 있다.

작고한 이모의 장례식에 온 주인공 “웨버”는 그 사이에 대도시로 변모한 고향, 그래서 땅 투기의

광풍에 휘말린 고향을 바라보며 고향 상실자의 한없는 비애와 절망을 느낀다.

문상을 온 친척들은 하나같이 땅값 이야기만 하며, 그로 인하여 인생을 망친 스캔들을

숙덕거리는 데에도 탐닉한다.

절망 속에 빠진 웨버에게 그러나 고향 산천의 황혼은 아름답게 불타면서 일말의 위안을

그에게 던져준다.

황혼만은 옛 모습을 잃지 않고 있는 듯하였다.

 

공단 도시, 구미에도 그 동안 여러차례 투기의 광풍이 몰아쳤다고 한다.

누구는 그 돈으로 빌딩을 지어 임대 수입이 짭짤하다고 하며 또 누구는 목욕탕을, 그리고 또

어느 여자 동기는 모텔을 지어서 노후 설계를 마쳤다고 한다.

결혼 예식장을 하는 친구는 약과이고 장의 예식장을 하는 친구도 있다는 소문이 서울까지

들렸다.

그러나 이혼과 자살 바람도 한동안 불어제쳐서 멀리 있는 우리를 놀라고 슬프게 한 적도

있었다.

 

기차가 달리면서 내다보니 과연 구미는 이제 낙동강 철교를 건너 칠곡군까지 그 시계를 넓혀서

아파트를 빼곡히 껴안고 있었다.

깊은 추억의 상념 끝에 나는 구미가 참으로 내 고향임을 통감하였다.

그러나 낙동강 철교를 막 건너며 나도 이제 다시 고향에 돌아가기는 힘들 것 같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다.

오래전에 떠난 고향은 이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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