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3일 저녁 6시 30분, 전쟁기념관 내 뮤지엄 웨딩홀에서
어떤 중고등학교 재경 총동창회 이사회가 개최되었다.
회장의 업무 중의 하나로 나도 나가야 할 자리였다.
예년과 달리 총무진은 초대가 되지 않았는데 50회 이하의 후배기수
에서는 회장의 대리로 참석한 총무들이 꽤 많았다.
개황을 잠시 소개하는 것은 아무래도 동창회의 분위기가 예전같지는
않았다는 점을 일단 알리고 싶어서이다.
과반수 성원을 겨우 넘긴 총회는 총회장 선배의 인사말로 시작하여
간단한 회무, 결산, 감사 보고가 잇달아 있었고 이어서 회장단에서 검토
된 바 있는 금년도 사업 계획이 의제로 제안되었다.
내용은 첫째 재경 동창회 명부 발간, 재경 소식지 복간, 재경 동창회
발전기금 조성에 관한 문제 등, 크게 세가지가 난상에 올랐다.
첫째 의제 토론에서는 IT 시대에 구태의연한 명부가 왠말이냐는
젊은 대표들의 날카로운 반론이 있었으나 중견 기수에서 직장, 직능별
명부도 부록으로 곁들일 경우의 시너지 효과를 들고 나와서
가까스로 추진을 하도록 가결이 되었다.
외주에 따른 부작용을 감안하여 직접 제조하는 문제 등, 민원 발생을
방지하자는 방안도 심도있게 논의 되었다.
두번째 의제인 재경 소식지 복간 문제도 그간 종가에서 발간하는 소식지로
통폐합한 이후의 재경 모임의 결집력 등의 문제가 대두 되면서,
다시 복간을 하자는 쪽으로 가닥이 잡혔다.
역시 인터넷 시대에 무슨 구태냐고 후배기에서 반론이 나왔으나 영원한
벗, 활자를 버리기 어려운 나이든 동창들의 애착이 그대로 받아들여
질 수 밖에 없었다.
나도 물론 동의하였다.
세번째 동창회 기금 모금 문제에 대해서도 후배 기수에서는 보다 활성화
해야할 당위성을 열변하였으나 현재 2억 대의 기금이 조성되어 있는
점을 감안하여 더 이상의 모금은 독지가의 기부 등을 기대하자는
쪽으로 하여, 자발적 모금이 강조되었다.
이어서 기타 의안 난상 토론에서는 59회 부터 들어온, 무시험
전형 세대들의 쌓인 불만이랄까, 건설적 직언들이 쏟아져 나왔는데
세대차이까지 겹쳐서 앞으로 깊은 이해의 수렴과정이 필요할
분위기가 엄존함을 느끼게 하였다.
듣고 보니 처음 무시험으로 들어온 후배 기수들은 동기회 자격도
주지 않았던 서름의 시절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 울분이 한으로 남아서 소위 "뺑뺑이" 첫 3회는 동기회도 결성되지
못하고 있다한다.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이다.
우리 뿐만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후배없는 선배가 어디있는가,
지금은 잘났다는 선배들이 후배들 모으기에 더 급급한 현실이다.
하여간 세상에 영원한 가치가 어디 있으랴,
그런가하면 조직의 유기적 통합 과제란 언제 어디서나 얼마나 어려운가,
여러가지를 생각케하는 모임이었다.
특별히 50기수 동기회와 60기수 동기회에서는 총무단 회의가 막강
하여, "5총" "6총"이라는 자생적 조직이 결성되고 그간 다양한 의견을
자체적으로 결집하여 왔음도 알게되었다.
"그게 무슨 말이오? 처음 듣네---."
총회장 선배가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50기 총무단, 60기 총무단의 모임입니다!"
젊은 후배 대표단의 굵직한 목소리였다.
유기체 속의 유기체, 히포콘드리아의 엄존이 표출되는 순간이었다.
73회 앳띈 후배가 마침 내 옆에 늦게 나타나 앉아서 맛있게 부페를
먹었다.
"이제 겨우 업무를 마치고 왔습니다."
맞다, 지금, 여기---, 이들 젊은이들의 생존양식이다.
"여섯시 반이 뭡니까---", 뒷줄 후배 석에서 볼멘 소리가 나왔다.
어쨌거나 이날 나는 오랜만에 삼각지 로타리를 해 떨어지기 전에
돌아보았다.
추억이 서린 동네가 급속히 해체, 재건 되고 있었다.
디카 속에 담은 광경이 그나마 큰 소득이었다.
선후배 간의 우애가 강조된 이날의 모임이었다.
이날 해떨어지기 전에 건진 추억의 삼각지 로타리---.
젊은 날, 내 양서 수집의 통로였던 이 곳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기적같았다.
8군 영내에 있는 매릴랜드 대학 분교의 학생들이 내다 판 고전 교재를
중심으로 때때로 구내 도서관 재고 정리 세일이 있었고,
GI 들이 들고 나온 플레이 보이, 펜트 하우스 스웜프 등이
우리 젊은 여인들의 손을 다시 거쳐서 이곳으로 흘러들어 왔었다.
컴퓨터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C-Language, 게임 잡지가 자리를 대신
하더니 이제 가서 보니 평범한 고서점으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원조 대구탕 집의 본좌~~~.
돌아가서 뻐길 기념패와 문장을 만드는 윗쪽 가게들, 그리고 아래쪽에는
값싼 초상화에서 키치 풍경화까지 미군들의 기호에 맞춘 집들이 즐비했었다.
박수근도 한때 여기에 그림을 내 놓았다고 한다.
지금도 그림집의 잔영이 남아있다.
삼각지 고가 로타리는 이제 사라졌다.
그러나 삼각지는 상기 아니 사라졌다.
새 용산 시대가 용트림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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