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포토 팩션) 까치 설날 일지

원평재 2008. 2. 7. 00:10

 

여러분 설 잘 쇠시고 새해에도 강녕하시기 바랍니다.

 

아호를 미수(未修)라고 지은 강석근 선생에게 미국에 있는 손자, "에디"가 찾아왔다.

강 선생의 아호는 일흔 나이에 미수(米壽)의 의지를 품어서 자작한 듯 싶은데 본인은 굳이

공부가 부족한 탄식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애매하게 강변한다.

그의 건강으로 보면 백수(白壽), 즉 99세도 탐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사람들은 아호가 언제

또 변하는지 내기를 걸었다는 이야기도 았다.

 

하여간 그건 그렇고 손자인 "에디"는 미국으로 이민을 간 미수 선생의 외동 아들이 둔

남매 중의 첫째로 벌써 대학 졸업반이었다.

학부 전공을 동아시아 문화로 하고 있는 그는 졸업을 하면 "로 스쿨"로 진학하겠다고 지금

조상의 나라 한국에 와서 진학을 위한 포트 폴리오를 만들어 가겠다는 녀석이었다.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 직책을 끝으로 정년을 한 미수 선생은 손자 녁석의 한국 가이드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서, 음력 설을 하루 앞둔 오늘 드디어 서울 광화문 쪽으로 부터

활동을 개시하였다.

일제에 의해 "헐려 짓는 광화문"이었던 경복궁의 정문이 또다시 헐려 지어지는 현장을

보면서 에디는 아무래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왜 자꾸 부시고 지어요? "

 "임마, 우리에게는 민족 정서라는게 있어. 일본 놈들이 헐고 지은 광화문을 군사 정권

시절에 시멘트로 다시 엉성하게 복원했던 것이 있었어.

그래서 민간 정부에서 그걸 부시고 민족 정기 살려 새로 짓는거야.

그래서 또 헐려짓는 광화문이 되는 것이지---."

 

미수 선생은 영어와 우리말을 섞어서 열변을 토했지만 정작 본인도 꼭 자신이 있는 말은

아니었다.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이 혼교한 역사의 땅, 터키의 이스탄불을 석달 씩이나 갔다온

손자, 에디는 그저 빙글 빙글 웃기만 할 따름이었다.

뉴욕의 헌츠 포인트에서 생선 장수를 하면서 돈을 번 아들이 그 생활 전선의 와중에도

자기 자식에게 한국말을 잊지 않게 가르친 것은 참 대견한 일이었다고 미수 선생은 내심

감동 가운데 있었다.

 

물론 매우 거칠고 서툴렀지만 에디는 어지간한 우리말은 다 잘 알아듣고 이해를 하였다.

앞으로 "로 스쿨" 들어가는 데에도 이중 언어는 많은 도움이 될 것이고 국제 변호사가 되면

더더욱 힘이 붙을 것이었다. 

무슨 조국애, 민족 정서 그런 것 하고는 애초에 거리가 먼 손자의 사고방식이었지만

그래도 우리말을 알아듣고 읽고 하는 것이 미수 선생에게는 여간 감동적이지 않았다.

 

경복궁으로, 비원으로, 인사동으로, 첫날 나들이는 수박 겉핥기 식으로 우선 끝을 내고

두 사람은 미수 선생이 사는 분당으로 조금 일찍 귀가 버스를 탔다.

직행 버스가 남산 터널을 빠져나오는데 보통 때 같으면 고속 도로로 들어 설 때까지

남산 거기서부터 많이 밀리고 지체가 되었는데 이날은 마침 "까치 설날"이라서 그런가,

도심의 교통은 뻥 뚫렸고, 미수 선생은 손자에게 가슴을 쓰윽 내밀 수 있었다.

 

"이놈아, 한국의 고속 도로가 좋지? 뉴욕 교통이 엉망인건 내가 잘 안다."

"그랜 파, 저는 보스톤에서 학교 다니고 있잖아요."

"보스톤은 뉴욕 보다 더 복잡한것도 다 안다."

"에이, 그랜 파, 여기 고속 도로가 저 아래 천안부터는 막 밀린다고 지금 방송 나오고

있잖아요."

 

정말 서울 도심에서 분당까지는 까치 설날 오후라서 교통이 뚫렸지만 그 아래

지역부터는 보통 문제가 아니라는 속보가 버스 속에 크게 틀어놓은 교통 방송에서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래, 하지만 그것도 우리나라가 많이 발전했다는 표상이야, 너 표상이란 말 알어?"

"그럼요. 심벌---."

미수 선생은 미소만 지을 수 밖에 없었다.

 

"아, 비행기, 날아라, 비행기 날아라 비행기 우리 비행기---, 이거 그랜 마, 할머니가 가르쳐

주신건데, 저기 비행기 보셔요."

버스가 벌써 서울 공항 근처를 달리고 있었고 몸통 큰 군용기 같은게 가까이에서 날아오르고

있었다.

  

 

  

 

"그랜 마가 그리워요."

할머니는 몇년전에 부인 계통의 병으로 이 세상을 하직하였다.

"에디야, 저기 까치집을 봐라. 미국에는 까치집이 없더구나. 까치도 보기 힘들고---."

"네, 그랜 파. 미국에서는 까치와 까마귀를 같은 종류로 보잖아요. 그리고 저런 새집을

보기도 힘들죠---."

"그럼, 그렇지. 얼마나 보기가 좋으냐, 또 정겹기도 하고."

미수 선생은 한국적 정서와 혼을 불어 넣기에 딱 좋은 예가 나왔다는 듯이 목에 힘을 주고

까치 집에 대해서 나름의 해석을 불어넣었다.

"우리는 이렇게 새와 사람이 한 덩어리, 하나의 커뮤니티를 이루어 살고 있단다.

자연과 인간이 혼연일체랄까---,

너 내 말 알아듣고 있어?"

 

 

 

  

"네,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그런데 신도시를 짓는 다고 저렇게 마구잡이로 산을

파헤친다거나 가로수를 트리밍 한다고 저렇게 마구 나무가지를 잘라버리는건 너무

심한것 같아요.

미국에서는 그러지 않잖아요.

그래서 나무가 무시무시하게 거대하게 되어버리기도 하지만 그냥 두잖아요.

썩어서 쓸어질 때까지---."

 

 

 

 

  

 

 "앗, 그랜 파, 저기 보셔요. 나무를 완전히 쉐이빙해서 새집만 남았네요. 너무 심해요."

 "아이구, 에디야. 그건 그렇구나. 네 말이 아니면 내가 평소 눈여겨 보지도 않았겠구나---."

미수 선생도 혀를 찰 수 밖에 없었다.

"우리 여기에서 내리자. 여기가 중앙공원, 맨해튼으로 치면 센트럴 파크 같은데야.

네 말대로 한번 주변 점검도 해보고 걸으면서 좀 생각해 보자."

 

 

  

 

 

 

그들은 중앙 공원 앞에서 버스를 내리고 공원으로 들어갔다.

여기 저기 가로수의 까치 집들이 정말 휑덩그렇게 노출 되어 있는 모양이 을씨년스러웠다.

"그랜 파, 상심 마세요. 미국에서는 카나디언 구스, 청둥 오리 같은게 골프장에 너무 많이

설치고 다닌다고 총으로 쏴서 잡기도 한다니까요.

얼마나 많이 죽였으면 수십 포대가 된 적도 있다니까요.

거기 비하면 여기는 이렇게 알뜰하게 가지를 치면서도 새집은 남겨 놓잖아요.

참 힘이 들텐데도---."

  

 

 "까치는 참 영리하여서 저렇게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꼭 밖에서 망을 보고나서

들어간대요."

"그래, 네가 연구를 많이 했구나.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먹고 사는 궁리가 바빠서 그런

연구를 할 겨를이 없단다.

군대에도 갔다와야하고, 돈도 벌어야하고---. 불쌍하단다."

"미국 젊은이들도 다 불쌍해요. 그랜 파."

"그래, 에디야---. 우리는 전란 때에 방천에서 까치집 같은 걸 지어놓고 산 적도 있단다.

우리가 모두 까치 신세구나, 이렇게 다 발가벗겨져서---."

"네, 미국의 대도시에 홈리스들이 얼마나 많아요. 또 스튜디오 하나 얻어서 독신으로 지내는

사람들이 모두 까치 신세지요, 뭐 하하하."
"하하하, 그렇구나."

 조손(祖孫)간에 한동안 공감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들은 공원 내의 오솔길에 나 있는 표지를 따라서 고인돌 유적지 쪽으로

별 목적도 없이 올라갔다.

"지석묘, 그러니까 고인돌을 알고 있니?"

"오, 그랜 파, 그게 제 전공 중의 하나인데요---. 돌멘, 스토운 헨지, 그런 태양 거석기 문명은

우리의 상상력을 극대화 시키는 멋진 구조물들이지요.

특별히 한반도에 산재한 고인돌 유적은 북방계, 남방계로 구분은 되지만 세계에서 가장 많고

밀집된 유적이라고 하지요.

이 곳 사람들이 예로부터 제천 사상도 치열하였고 또 단결이랄까, 연대의식이 매우 강했다고

하겠지요."

"그래도 우리는 근세사에서 뭉치지 못했고 지금도 부끄러운 역사를 살고 있는 셈이란다---."

미수 선생은 고인돌이 모여있는 곳의 어느 한쪽으로 계속 등을 대며 손자에게 어정쩡한

목소리로 말을 둘러대다가 얼른 유적지에서 손자를 데리고 빠져나왔다.

 

  

 

  

 

 

  

  

 

 

  

그들이 고인돌 유적지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 오니까 전각이 하나 있었다.

그들은 내부를 둘러보았는데 비석에는 아무런 글도 남아있지 않았다. 무슨 설명문 같은

것도 비각에 따로 세워져 있지 않았다.

기록무상이랄까, 무언가를 남긴다는 것의 한계 같은게 보이는듯하여 미수 선생은 감회가

솟았다.

두 사람은 이제 그 아래에 있는 팔각정 같은 데로 조금 더 내려와서 잠시 자리를 잡았다.

 

  

 

  

 

"그랜 파, 제가 질문을 몇가지 해도 될까요?"

"슈어, 얼마든지---."

"먼저 오늘을 까치 설날이라고 하는데, 지금 이 시절이 까치가 많아서 그런 이름이

붙었나요? 정말로 까치 소리가 우리를 따라다니듯 요란하거든요---."

손자의 질문에 미수 선생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좋은 질문이구나. 내가 그럴줄 알고 열심히 공부를 해 두었단다."

미수 선생은 문화 대사전을 인용한다는 전제를 하면서 까치 설날의 유래를 아래와 같이

요약해 주었다.

 

한국문화상징사전에 수록된 까치설날에 대한 유래는 다음과 같다.

 

까치설이라는 말은 예전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라는 '설날' 노래 이후 쓰이기 시작했다.

옛날에는 작은설(설 전날)을 가리켜 '아치설', '아찬설'이라고 했다.

 '아치'는 '작은(小)'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아치설의 '아치'의 뜻을 상실하면서

 '아치'와 음이 비슷한 '까치'로 엉뚱하게 바뀌었다고 한다.

이것의 근거로는 음력으로 22일 조금을

남서 다도해 지방에서는 '아치조금'이라 하는데,

경기만 지방에서는 '까치조금'이라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아치조금이 까치조금으로 바뀌었듯 아치설이 까치설이 바뀌었다고 한다.

설날 노래의 작곡자인 윤극영 선생님이 이북 출신으로

경기만 지방의 방언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또 무슨 질문이 있니, 에디야."

"네, 아까 약수터에서 부적합이라는 표지를 보았는데 그건 마시지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마시는 국자가 걸려 있었어요. 그걸 치우지 않은건 잘못 된 것이겠지요?"

"그래, 우리는 그렇게 서로 잘 통한다 싶으면 형식에 구애되지는 않는단다."

"네, 그건 그렇다치구요. 

그랜파가 등으로 가리고 있었던 푯말, 간첩이 무슨 무인 포스트를 만든 곳이라고

설명해 놓은 것이 고인돌 옆에 있었는데, 그건 북쪽과 남쪽 사이의 갈등 구조를

말하는건가요?"

"에디야, 부끄럽구나. 그런건 그냥 지나쳤으면 좋았을텐데 읽어보고야 말았네.

그래, 냉전 시대에 북한 간첩이 내려와서 고정 간첩이 되면서 연락 장소를 여기에다

차렸다는구나.

과거 동서독 간에도 그랬고 지금 미국이 테러와의 전쟁을 하면서도 그런 것들을 찾고 또

설치하고 그러지 않겠니---."

"이해는 되지만 조금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페이서스---."

"네가 보지 않기를 바랬단다---."

"그랜 파, 정말 우스운 질문할께요. 거기서 조금 내려와서 공원 이용 규칙이라는

푯말이 있었지요?"

"그래, 그게 또 뭐 잘못되었니? 미국 공원에도 경고문이 많잖아, Warning 투성이 아니냐."

"아, 네. 그런데 거기 각종 성행위를 삼가하라고 되어있던데 공원에서 각종 성행위를

하나요? 하긴 세트럴 파크도 그런 혐의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지만---."

"각종 성행위? 에이 그런게 어디있어. 잘 못 본게지."

"노우, 그랜 파."

그들은 다시 그곳을 찾아서 올라가 보았다.

"각종 상행위를 삼가하라"는 내용이 거기에 쓰여있었다.

조손간에 다시 큰 웃음이 터졌다.

미수 선생은 손자의 마지막 질문이 그 위의 민족적 비극이라는 명제를 덮으려는

의도적 오독, 오역이 아니었는지 심히 의심스러웠으나 그냥 웃음으로 지나치고자 마음

먹었다.

 

 

 

 

 

 

 

이 좋은 까치 설날에 웃을 일들은 참으로 많았다.

가면으로 얼굴을 덮고 햇살을 거역하는 산책객의 모습이 우선 그러하였다.

또 "바르게 살자"라는 음각이 요란한  돌덩어리도 "차카게 살자"라는 구호 보다는 조금

나았지만 역시 웃음을 선사하는 것이었다. 

  

  

 

입춘대길 앞에서 윷놀이하는 사람들의 분방함은 이날의 화려한 휘날레였다~~~. (끝) 

 

 

 

 

 

 

 

 

 

  

 

 

 

 

 

  

 

 

 

  

  

 

 거꾸로 매달린 매의 형상에 이은 아래 그림들은 다시 이날의 사족이었다.

(다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