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신간도 견문록

원평재 2008. 3. 8. 13:11

영남일보 사진부 박진관 차장은 이름 난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연배는 20여년 아래이고 중등학교와 대학교의 후배이기도 하지만

연변 과기대에서는 뜻이 통하는 지기이자 지사처럼 약 반년간을 같이 지냈다.

나는 연변과기대의 한 학기 객원 교수였고, 박 기자는 1년간 한국 기자협회

추천으로 과기대 사회 교육원에서 수학하고 동 대학 동아시아 경제연구원

객원연구원으로도 근무하였다.

 

 

 

 

 

지금은 영남일보로 돌아와서 사진부 차장을 맡고 있는 중견 저널리스트이다.

연변 땅, 그러니까 만주 땅이자 우리의 고토에서 함께 지낸 반년간의 체험은 나도

졸문으로 이런 저런 기회마다 잊지못할 감회를 토로하고 있지만,

영상을 다루는 그의 솜씨는 내 모든 노력이 헛수고에 불과하다는 자탄을 끌어내기에

충분하였다.

 

이렇게 말하면 그가 사진이나 잘 찍는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한학에 근본을 두고 중국어를 부지런히 익혀서 중국어문과 고대사에도 전문가

뺨칠 경지를 개척하였고, 우리 글 쓰기에도 작가 정신을 항상 동반하여 깊은 맛으로

사람을 끌어들인다.

 

 

 

 

 

매일 매일 나오는 신문 지상에 그의 영상은 수시 등장하여 독자의 "필"을 꽂게

만들고, 최근에만 벌써 세번씩이나 개최한 사진전, 그리고 이번에 나온 역작,

"신간도 견문록"은 이 사진 작가가 예사 사람이 아님을 짐작케한다.

 

내가 또 지난 겨울 밖으로 나돌아 다니다가 그의 신간, "신간도 견문록"을 늦게야

받아서 그의 글과 행간을 읽고, 또한 그의 발과 머리와 영감으로 찍은 사진을

감상하니 내 행복 지수의 높이가 다시 한번 상승하였다.

과장법이나 수사가 아니다.

 

 강건너 북한의 가난한 모습---.

 

조선인은 고구려인이 아니다---. 이런 간판이 왜 서있어야

하는가---.

 

내가 갔을 때는 간도(사이섬)의 석물 흔적은 아래와 같이 다 깨어져

있었다. 

 

 

백두산 천지---, 박 기자는 북파, 서파, 동절기 등등을 모두

다녔다.

 

북한의 가난한 광산 촌, 무산---. 

 

 맨 위는 연변 과기대 캠퍼스 내의 화장터 교회(외국인 전용),

두번째는 용정 교회의 성가대, 맨 아래는 연길 교회(중국인 전용).

 

 

접시 안테나를 나는 한번 빼았겼다. 박 기자는 화를 면했다고 한다. 

 

개장국, 개고기 보신탕을 나도 세번 먹어보았다. 

 

"일송정", 인사이드 스토리가 있는데 박기자가 잘 요약해 두었다.

 

(그리운 뀀 요리, 북대시장 노천에서 쪼그리고 앉아서도 먹었다.

뉴욕 플러싱에도 조선족들이 이걸 팔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며 보니 간도 땅에서 발빠른 그를 따라다닌 내 족적도 상당부분

나타나 있어서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게 해주고 또 내 가슴 속의 그리움을

불댕겨주니 나는 참으로 감격하였다.

 

꼼꼼히 다지고 빻고 체로 치고 그리고는 종내 대범한듯 확 뿌려놓은 그의 영상, 글,

기개를,

나는 무슨 인상파 화가나 된듯이 여기 두서없이 소개랍시고 극히 일부나마

흩어 놓아본다.

그러면서 나와 관련된 글과 그림을 다시한번 고맙게 여긴다.

 

그는 나와 만난 2005년 이전에도 이미 동북 3성의 조선족 마을과 고구려, 발해의

유적을 마치 배낭여행하듯 취재 기자로 누비고 다녔으며 나와 함께 한 반년 동안에도

게으른 나를 쉬임없이 격려하여 다시 돌아다니기 힘든 산간 오지를 "데리고" 다녔다.

 

그의 중국어, 그리고 이미 심어놓은 인간 관계의 "�시",

박진관(朴眞觀)이라는 이름대로의 진관 직감,

등등으로 나는 말할 수 없이 삶과 인식의 범주를 넓혔다.

내가 그곳에서 반년을 버티고나서 자식들이 있는 뉴욕으로 줄행랑을 친 후에도

그는 남아서 취재와 학술 연마에 진력하고 돌아 온 후,

지금도 내 고향 땅에서 매일 바쁘게 지내고 있다.

자랑스러운 후배를 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