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그들이 방문한 곳은 하우스텐보스였다. 화란의 17세기 거리를 재현했다는 그 마을은 일본 글자만
아니라면 서양 땅이 따로 없다는 식이었다.
하급 관리인 그가 유럽 구경을 직접 한 적은 없었지만 그는 미적 취향이 강해서 인터넷에 떠 다니는
유럽의 풍광을 평소 익히 섭렵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근무지가 광화문의 정부 종합청사이다 보니 인근 인사동, 삼청동, 소격동의 갤러리는
물론이고 세종 문화 회관 등지에서 자주 열리는 '밀레'나 '세잔느' 특별전에도 어지간하면 빠지지
않고 둘러보며 낮은 직급의 자신의 처지가 갖는 비애를 아름다움 속에서 적절히 박멸하고 있었다.
어지간한 대학의 경영학과를 나와서 용케 상호 신용금고, 그러니까 지금의 저축은행에 들어가 노처녀가
되기까지 근속하다가 중매로 그와 결혼한 아내는 처음 얼마간은 그와 미술관을 동행하기도 했으나,
그런 미적 순례가 경제적으로 무가치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귀중한 시간을 별로 경제성이 없는 데에 탕진하는 남편을 적당히 능멸하면서 자신의 시간은
대체로 집에서 주식의 '데이 트레이딩'과 펀드의 개발 등에 유익한 투자를 하며 두문불출하는 편이었다.
아들 하나로 만족한 연후에 그 아이 키우기에도 여자가 집 밖을 나돌기에는 벅찬 일이었겠지만,
그 보다는 아는 사람들을 만나서 남편의 지위와 직위를 질문 받는 일에 치가 떨린다고 그녀는 가끔
남편에게 투정처럼, 하소연 처럼 말하였다.
주식 시장, 개미 군단의 일원인 그녀는 그래도 대략 그런 방면에서는 흐름을 타는 눈치여서 그녀가
회사를 퇴직할 때에 마련해 나온 돈을 종자 돈으로해서 자산을 꽤 불린듯 하였으나 그는 관심도
간섭도 하지 않았다.
IMF 때에도 공격적인 투자 전략으로 나간 것이 큰 이득을 보았고 초기 펀드 마켓에 진출해서도
몇배의 대박을 터뜨렸지만 살고있는 신사동의 집 문제 때문에 그녀는 항상 빈곤 의식에
사로잡혔다.
남편이 광화문의 정부 종합청사로 출퇴근을 하기 때문에 강북의 신사동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더니
참여정부가 들어서면서 강남의 신사동 아파트는 그들이 살고 있는 강북의 신사동 집값보다
다섯배도 더 뛰어버린 것이었다.
객장 출입보다는 주로 인터넷에 매달리는 개미군단의 속성 처럼 이제 그녀는 실생활에서도 개미처럼
은둔하는 삶에 더욱 집착하였다.
물론 때때로 불같이 남편에게 화를 내는 것으로 그녀의 존재는 확인하면서
하나 밖에 없는 그 아이가 금년 봄, 서울 대학교의 사회계열에 합격해 준것은 이 위태로운 관계의
부부에게는 얼마남지 않은 행운이자 구원이었다.
일본 여행이 이루어진 것도 근본을 따져보면 그 합격의 여파라고도 할 수 있었다.
아들이 서울 대학교에 들어갔다고 갑자기 동창회나 동네방네를 돌아다니며 피알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는데 마침 남편이 연휴 여행을 제안하여서 못이기는체 사람 접촉을 꿈 꾸어본 것이었다.
하지만 서울 대학교에 아들을 집어넣은 장한 엄마 자랑을 할 기회는 여행 길에서 요원한데
짧은 일정은 이제 반을 넘어서 대단원을 향하여 치달리고 있었다.
엎친데 덮친격인가 하필이면 그 금슬 좋은 커플을 만날게 또 무어람---. 그녀는 분통이 터졌다.
"여기 하우스텐 보스는 10여년 전에 서유럽, 특히 화란의 중세 모습을 정확히 재현해서 만들어 놓은
현대 일본의 역작이었습니다"
리무진으로 움직이는 이동간에는 안면방해를 피하겠다는듯이 침묵을 지키던 가이드가 목적지에
거의 다달으자 신명이 나서 설명을 하였지만 듣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우선 맨 앞의 금슬좋은 커플들은 꼭 껴안고 자신들의 사랑에 탐닉해 있었고 두번째 좌석의
그와 아내는 불만 속에서 각자의 생각에 잠겨있었으며 야간에 부지런한 다른 관광객들도 대부분
졸고 있는 상태였다.
하우스텐보스의 하루 일정은 사실 개개인의 자유시간이었고 들어올 때 받은 티킷은 이 큰 경내에
산재한 시설들의 어느 곳에나 입장이 되는 프리패스와 같았다.
사람들은 각자 흩어져서 흥미를 유발하는 곳으로 빨려들어갔다.
그의 아내는 얼른 쇼핑 몰처럼 보이는 곳으로 가면서 그에게 함께가던지 따로 거닐던지 마음대로
하라며 사라져갔다.
점심은 두시간쯤 후에 하우스텐보스 타워가 있는 건물의 1층 식당가에서 하기로 한, 가이드의 안내가
전제되었다.
그는 안내책자에 나온대로 미술관을 찾기로 하였다.
그의 발걸음이 향하는 근처에 그 금슬 좋은 커플의 행보가 동행을 이루고 있었다.
"반갑습니다만 이거 원앙같은 커플을 따라다니며 방해하는 꼴이나 아닌지 모르겠군요."
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
"아닙니다. 저희들 처럼 미술관 쪽이시군요. 그림을 사랑하시는 딜레탄트와 동행이라 다행스럽습니다."
남자가 선한 눈빛으로 응대하였다. 그 옆의 여인도 밝은 얼굴이었다.
다만 그들의 눈동자는 이 순간 확 풀어져있어서 그는 조금 당황한 느낌을 감출수 없었다.
두사람은 물론 팔짱을 깊이 끼고 있었다.
"참 부럽습니다. 세상에 어찌 이렇게 다정한 부부가 있나요? 우리 부부는 눈치챘는지 모르겠지만
그저 원수지간 같은데---. 허허허."
"원래 부부는 전생에 원수였다잖아요, 선생님."
선한 남자가 부드럽게 그의 대화에 관심과 동감을 표하여 주었다.
그런 말을 할 때에는 눈동자가 다시 촛점을 찾아서 조여드는 모양새를 차렸다.
"어머나, 밀레전인데요---."
여인이 소리쳤다.
하우스텐보스의 큰 미술관에는 마침 밀레전이 열리고 있었다.
미술관의 한쪽 벽면은 아예 생화로 밀레의 '이삭줍는 여인들'을 크게 모자이크 처리하여 보여주고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는 꼭 실제의 그림같기도 하였다.
미술관으로 가는 작은 길 옆에는 역시 밀레전에 관한 포스터가 붙여진 작은 입간판이 서있었다.
바람이라도 불면 쓸어질까 걱정이라는 듯이 입간판 다리쪽에는 감자나 고구마를 넣는 푸대 자루
같은 것이 받침대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었다.
"아, 적절하게도 감자 푸대를 내놓았군요. 일본 사람들의 센스라니---."
그가 무의식 중에 탄성을 발했다. 무언가 마음에 와닿는 것이 있다는 반응이었다.
"어머나, 어떻게 감자 푸대인줄 아세요?"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착한 모습의 여인이 동감이라는 듯이 이제는 타는듯한 눈빛이 되어 그를
쳐다 보며 말했다.
"아, 감자 푸대가 맞지요, 허허허. 거 왜 만종 그림에 있는 소쿠리 같은데에 감자가 담겨있잖아요.
원래는 거기에 영아의 시신이 있었다고도 하지요. 그러다가 말썽을 우려한 지인들의 충고로 그 위에
감자 무더기를 그렸다던가요. 아 이거 쓸데없이 아는체 하여 죄송합니다만---."
"아니, 괜찮습니다. 저희도 그림을 좋아해서요---. 그 만종에 들어있는 에피소드랄까, 그 기이한
이야기를 읽고 들은 적이 있지요---. 선생님, 정말 저희들과 말씀이 통하는 분이네요, 호호호."
여인이 이제는 웃기까지 하였다.
눈동자가 기묘하게 다시 풀어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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