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오랜만에 메디칼 센터를 찾았다.
소설가이자 중등학교 동기인 이태원 작가의 "먼저 그리고 마지막" 떠나 가는길,
장례식장은 메디칼 센터의 뒷켠에 있었다.
시내에서 부터 을지로 따라 길게 난 지하 상가를 하릴없는 걸음걸이로 터덜터덜 걸어서
내려오니 "국립의료원" 가는 길이라고 표지가 나와있다.
휴일, 한가로운 지하 상가의 긴 길이 춥고 적막했는데 밖으로 나오니 그래도
봄날이라고 햇살이 몸을 녹여주었다.
을지로 길은 강북의 여늬 지역과 비슷하게 그 동안 많이 퇴락의 길을 걸었다.
갑자기 우뚝 선 건물이 마지막 단장을 하고 있어서 쳐다 보니 말썽 많았던
'굿 모닝 시티'였다.
선입견으로 음험한 건물이라는 느낌이 들자 이래저래 문상을 가는 내 발걸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메디칼 센터'로 더 익숙한 '국립의료원'은 즐거운 추억도 많은 곳이다.
특히 한때 의료원장을 연임했던 사람은 내 친한 친구이고,
또 주위의 친구들과 그 가족들이 이 곳에서 병을 치료하여 나간 일도 많았다.
그 보다도 훨씬 더 전에는 미국으로 이민을 간 친구가 이 곳 간호사와
데이트를 하러 다닐 때에 심심하면 나를 끼워주었고, 나는 또 하릴없는
한일거사(閒日居士)로 싱겁게 따라다닌 적도 있었다.
그때 장안의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이곳 5가에 와서 "다방"에 진을 치고
여기 총명하고 아름다운 RN(미국 간호사 자격) 소유자들과 데이트를 하던
시절이었다.
이 땅의 많은 젊은이들이 Nurse Dependants가 되어 도미의 꿈을 완성하려던
야망의 계절이었다.
스칸디나비안 클럽은 그때 장안의 명물이었다.
양식당이 드물던 시절, 이 곳은 잠시 외국에 들어온 듯한 착각을 주기에
충분한 환상의 장소였다.
북유럽에서 온 의사와 경영진들을 위하여 생긴 이 공간이,
한다하는 내국인들의 자랑스런 출입처가 되었으니 참 옛날 이야기이다.
나도 가족들과의 의미있는 날에 뒷말을 만들지 않으려면, 비록 사는 곳에서
거리가 멀어도 이 곳을 예약했던 기억이 난다.
스칸디나비안 클럽의 어제와 오늘은 그러하고, 장례식장을 찾아서 터덜터덜
걸어들어가니 쌍갈래로 갈라진 곳에 왼쪽은 장례식장 행,
오른 쪽은 스칸디나비안 클럽 행이라는 화살표가 똑 같은 크기로 크게 그려져있다.
얼핏 음택과 양택으로 갈라지는 노상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지금 서 있는 곳은 '현재 시제', 왼쪽 화살표는 '미래 시제',
그리고 오른쪽 스칸디나비안 클럽 쪽은 겨우 '과거 시제' 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
소설가 이태원은 한 때 쟁쟁한 장편과 다큐멘터리 작가로 세상의 시선을
집중시켰던 작가였다.
1970년 동아일보 창간 5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에 "객사"가 뽑혔고
같은 신문에 "개국"이 연재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 하였다.
주요작품으로는 객사, 개국, 0의 행진, 초야, 낙동강, 꿈꾸는 버러지들 외 다수가
있다.
하지만 동서고금의 유명 작가들이 거의 그러하듯이 절정의 시간이 지난 후에
오래, 계속 세상의 이목을 붙잡고 있기에는 긴장과 중압감이 작가의 신경을
그냥 두지 않는다.
이태원도 그러하였는지 동기회에도 별반 얼굴을 내비치지 않았고 그리하여
가까운 친구들도 별반 없는듯 싶었다.
하지만 메말랐다 싶은 곳에 오아시스가 있듯이 그와 교유해 온 동기들이
생각보다 적지 않았고 그의 주변에 모인 친구들은 대략 지사형에 속하여서
이날도 문상을 들고나는 동기들의 면면들이 모두 장엄하였다.
좋은 일에는 차라리 발길이 뜸하던, 별로 내색않고 살던 동기들이 여럿
다녀갔고 또 찾아오고 있었다.
그중의 두 친구는 가족들도 힘든 임종을 극적으로 하였다는 것이 아닌가.
잘 생긴 그의 아들과 손자가 조문을 받고 있었다.
친구임을 밝히니 "오래 지켜드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렇게 인사성도
밝고 선한 얼굴이 지혜롭게 보였다.
임종을 본 친구는 이종록, 백정호였고 상주에 있는 조성홍은 당일치기로
올라왔다고 한다. 그간 기르던 염소를 다 정리하고 지금은 서도에 심취해
있다고 한다.
그가 염소 이야기를 꺼내서 그런가, 염소 이영소 동기가 진지한 얼굴로 나타났다.
그의 신중, 성실함에 나는 항상 존경을 감출 수 없다.
재경 총 동문회 주최 바둑 대회가 끝나가는 시간이어서 나는 함께 대작하지
못하고 일찍 일어나서 교대 역으로 가는 지하철을 탔다.
휴일 지하철 역은 붐볐고 39회에서 59회까지 18개 팀, 90명의 기사들이
기량을 겨루는 "금연 기원"은 오늘만은 포연, 자연(紫煙)이 가득하여서
차라리 생명력이 넘쳐흘렀다.
42회 우리 동기 팀은 마침내 3위, 동상에 머문 것인지 움켜쥔 것인지 하여간
전투가 끝나고 그 아래 순두부 집에서 소주 몇잔을 기우리며 싸움터의 먼지,
전진(戰塵)을 털어내었다.
길거리에서는 뮤지컬 광고가 허탄한 가슴을 달래주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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