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재경 동기회 이사회에서 O교수를 만났다.
O교수는 지난해에 정년 퇴임을 했으나 봉직하던 대학의 편년사 편찬 위원장에
위촉되어서 넓은 공간과 인재들을 거느리고 활약하면서 아직 퇴임을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본인은 그런 내색도 않지만 내가 우연히 알게된 즐거운 사연이다.
대학내에서의 그간의 공덕과 실력과 내공을 읽을 수 있는 부분이다.
반가운 일이다.
전부터 퇴임에 임하여 무슨 출간이 없느냐는 나의 채근에 그는,
"뭐, 대단치 않은걸---." 하며 뒤로 빼는 몸짓이다가 정년 기념 문집을
한권 증정하겠다고 했는데 그간 일에 파묻힌 그의 일상 때문에
받을 기회가 없었다.
어제 저녁에는 마침 내가 회장으로 있는 재경 동기회의 이사회 모임이 있어서 이제까지는
잘 나오지 않던 그가 책도 전할 겸 얼굴을 보이겠다고 하더니
참석하여서 줄곧 조용한 미소만 짓다가 아담한 책 한권을 주고 갔다.
지난번 K 교수의 정년 퇴임 때도 그러했지만 요즈음은 무슨 논문집
같은 것은 잘 만들지 않는다.
남들은 물론이고 본인도 읽지않는 이상한 책을 만들기 보다는 모두 즐겨
읽을 수 있는 문집을 만들어서 기리는 쪽으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가닥을
잡고 있다.
두 사람 모두 그런 지혜를 발휘하여서 나 같은 사람에게도 고마운 모범이
되었다.
동곡은 O교수의 아호인 모양이다.
아호 또한 내색을 않아서 이제야 알게 된 일이다.
동곡은 사실 우리나라 문단 평론계의 거목이며 또 한국 문학의 세계화,
조선족 문학과 일본에서의 교포 문학 연구 등으로도 일찌기 눈을 돌려서
이 나라 좁은 문단의 지평을 넓힌 선각의 선비이다.
내가 연변 문학 쪽을 외람되게 한번 건드려 볼까하고 연변 과기대에 갔을 때에
자료를 찾아보니 동곡은 이미 20년 전에 그 일에 착수하여서 혁혁한 업적을
남겨놓고 있지 않은가.
일본 교포 문학 연구에도 일가견이 있는 동곡은,
미주 문학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였고 나에게도 연구를 권유 한 적이 있었으나
재주가 없고 게으른 나는 손도 못대고 말았다.
그간 동곡을 그리워하는 친구들은 많았으나 자주 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그러나 알고 보면 그의 사정이 이해가 된다.
한국 문인협회의 평론 분과 위원장을 맡고 있는 그는 월간 문예지에 매달
문학 평론을 쓰고 때로는 일간지의 청탁에도 응하면서 학회의 주요 임원과
회장, 그리고 왕성한 연구 발표, 또 조금 수줍은듯한 고결한 성품 등이
다방면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동기회에는 발걸음을 다소 뜸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누구라 용훼할 것인가.
고결한 그의 성품은 어제 받은 문집에 그가 쓴 글, 그리고 주위의 학자,
제자 들이 그를 기리는 한마당에 모두 나타나있다.
부럽고 영양가있는 옥고들이었다.
그에 비하면 시장통에 나와있는 나는 항상 부끄러울 따름이다.
230명이 포진하고 있는 재경 동기회 일만 해도 그렇다.
전임 회장 소연(少然)과 덕망의 K 변호사가 나에게 이제는 한번 봉사할 차례가 아닌가
하며 끌고 미는 덕분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나선 일이 동곡의 얼굴을 보는 순간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모든 선택을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모든 생각과 일을 다시한번 반추해 볼 수는
있으니까 하는 말이다---.
그래도 다음 날, "직업이 무섭더라, 노련했어"라는 덕담을 전해주는 친구들이
있어서 봉사의 정신을 다시 한번 다져본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
(끝)
'기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앉아서 보는 남자, 서서 보는 여자 (0) | 2008.03.20 |
---|---|
새 희망의 입학 시즌 (0) | 2008.03.15 |
스칸디나비안 클럽의 옆 (0) | 2008.03.10 |
장강의 앞 물결을 뒤 물결이 밀며 (0) | 2008.02.24 |
귀국 산행 (0) | 2008.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