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에 도착하자 곧 써둔 일지(日誌)를 이제야 올립니다. 어제는 눈이 쏟아져서 또 다른 정취를 나그네에게 적셔주었으나 찍어둔 사진을 끝내 올릴 형편이 못되었음을 애타합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주도인 연길의 비행장에 내린 시간은 인천 공항을 출발하여 2시간 20분이 지난 11시 20분이었다. 한국 시간은 12시 20분이었지만 이 곳 표준시는 북경에 맞추어서 우리보다 한 시간이 늦었다.
한 시간이 늦다는 사실은 이 곳이 타국이라는 엄연한 현장감과 이질감을 주기도 했으나 쫓기는 시간 의식 속에서 살아온 서울 사람에게는 축복이었다.
서울에서 7시에 잠이 깨면 그 때부터 출근 전쟁이 시작되지만 여기는 아직 새벽 6시가 아닌가.
내가 짐을 푼 곳은 연길에서도 최고급에 속하는 C호텔이었는데 이 곳에서 학교까지는 택시로 20분 가량이었고 비용은 10원 (우리 돈으로 1300원 가량)이었으니 이 또한 느긋한 단위가 아닐 수 없다.
느긋한 단위는 도처에 산재하였다. 우선 내가 잠시 묵기로한 일급 호텔의 하루 숙박료는 200원에 불과하였고, 음식료도 10원이면 괜찮은 수준에 양은 너무나 푸짐하여서 도저히 다 먹을 수가 없다.
외양으로 보이는 연길의 수준은 우리나라의 개발년대 초기를 연상케 하지만 행복지수는 그렇게 눈으로 따질 수 만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중국도 산업화의 수준이 높게 달성된 북경과 상해는 우리와 물가지수에서 별반 다를바가 없으니 이 변방의 느긋함과 풍요로움도 언젠가는 흘러간 옛 추억이 될 것이다.
하여간 이 절묘한 시점에 이 곳 연길의 칼바람을 마주하고 있는 나그네의 마음은 스산하기는 커녕 넉넉함으로 넘쳐흐르고 있다.
일차대전이 끝나고도 미국의 참전 제대 용사들이 유럽을 떠나지 않고 파리에 웅크리고 있었던 현상의 상당 부분이 환율과 소득 수준에 따른 여유로움이었듯이, "지금 여기(here, now)" 연길에서도 그런 현상이 당분간은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만만한 시절이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인천 공항에서 우리는 파란 빛갈의 패스포트를 쥐고서 연변 동포들의 빨간 패스포트를 느긋하게 바라보았으나 언젠가는 중국 공민들이 쥐고 있는 이 빨간 빛갈의 증명서를 부러워할 때가 오지 않으리라는 법도 없으리라. 우리가 지금 미국의 그린 카드를 자랑하거나 부러워하는 일말의 정서를 지니고 있듯이.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3월 1일에 신학기 첫 교수 회의가 열렸다. 이 곳에서는 삼일절 행사 같은 것은 없다. 따라서 공휴일도 아니다. 오히려 개강 첫날이어서 부산한 긴장감이 캠퍼스에 멤돌 따름이다.
강당에 모인 교수들은 식순에 따라 오성홍기 앞에서 주목하였고 이어 중화인민 공화국가를 제창하였다. 운동 경기 같은 때에 들었던 귀에 익은 이 국가는 역시 전주가 특징있게 길었고 본 절이 나올 때에는 미리 녹음된 우렁찬 가수의 음성이 강당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새로 부임하는 신임 교수와 강사들의 임명장 수여 순서에서 나는 "객원 교수" 임명장을 받았다. 원래 미국을 비롯한 외국의 대학에 연구년을 받아서 갔다오면 흔히 "교환 교수"라고 경력을 쓰지만 사실은 visiting scholar, 구태어 정확히 번역하자면 "방문 학자" 내지 "방문 연구 교수"의 status가 정확한 표현인데, 객원 교수(guest professor)의 직함과 함께 전공 과목 강의까지 맡게 된 이번 일은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원래의 목적인 교포 문학 연구는 좀 소홀히 될 수 밖에 없겠지만 학교 선생의 할 일이 우선 강의와 교육이 아니던가.
오늘의 연변 일지는 여기에서 바삐 마칩니다. 며칠 전에 써둔 것을 이제야 올립니다. |
|
'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변의 안동마을 (0) | 2005.03.16 |
---|---|
차이나, 차이나? (0) | 2005.03.12 |
신인상 수상 소감 (연길에서 올립니다) (0) | 2005.03.07 |
국민 작가-등단 작가 (연변에서 전하는 등단 소식) (0) | 2005.03.04 |
연변에 도착하여--- (0) | 2005.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