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전에 잠시 연구실에 나왔다가 귀가하여
하루 종일 아파트에서 전신국 사람들을 기다렸으나
결국 허사가 되고 말았다.
지난 주 중반, 시내에 있는 전신국으로 가서
연변 출신의 학생과 전자공학과 교수님, 그리고 나와
집사람이 총 출동하여 전화와 인터넷을 신청하였더니
5일 후인 어제 화요일에는 개통이 되도록 사람이
나갈 것이라고 하더니 결국 무위로 돌아간 것이다.
전신국 내부에서는 매우 효율적으로 사무가 진행되더니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모르겠다.
하긴 그 때도 전자과 교수의 활동이 돋보였지.
어쨌던 어제도 하루 종일 전자과 교수님과 조선족 학생이
노력을 하고 시시각각 내가 갖고 있는 PCS폰
(한 때 우리나라에서 잠시 통용되었던 시내 무선 전화)에
조금만 기다리라고 연락을 주곤하였으나
결국 해는 지고 말았다.
덕분에 여기 조선어문학과(조문과)에 계시는 안병렬
원로 교수님이 쓰신 저서 가운데 두권을 통독하였는데
그 중에서 "중국 연변의 안동마을"이라는 책의 내용을
잠시 여기에 소개해 본다.
안교수님은 내가 이 곳으로 오기전 서을에서
내 나름데로 인적 인프라를 구축할 때에 이미
내 명단에 들어있던 고명하신 분이었다.
일찌기 안동 대학에서 학장을 하시다가 연변대학에
안식년을 오게 되었는데 와보니 이 곳이 정녕 마음에
들어서 정년을 3년이나 남기고 명예퇴직을 하여
병환 중인 사모님을 모시고 여기 연변 과기대로
오신 분으로,
저술과 강의에 모두 일가를 이룬 분이었다.
이분이 한 5년반전에 여기 정착을 하면서
"안동 마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
이미 "무주마을"과 "청주마을"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어서 고향인 안동마을이 있다는 이야기는
큰 감동과 호기심과 연민의 정을 끊임없이
던져주었다고 한다.
사실 안교수의 고향은 경주이고 안동은 20여년간
교직으로 있었던 곳이자 처가의 본향(처향)이고
당신은 20년 내내 양반 콧대가 유난한 안동 땅에서
타향의 설움 비슷한 것을 느껴서,
이국 타향 연변에서의 안동마을에 대한 정서는
더욱 남다른 것이 있기도 하였던 모양이다.
5년전만 하여도 연변에서 그 곳 안동마을까지
가는길은 멀고도 험하고도 힘든 노정이었으나
천신만고 끝에 이 양반은 그 곳에 도달한다.
일제의 만주 개척 정책에 밀려서 강제로
안동 사람들이 이주해온 그 곳은 두세대가 흐르는
동안,
부지런한 조선 사람들의 노력으로 산간 벽촌에서도
정말 살기좋은 부농을 이루어서 천당이 따로없는
마을을 이룬 것 같았다.
물론 문화 시설 같은 것은 낙후하여 형편없었으나
먹거리는 풍족하여서 윤기가 흐르는 마을이었고
마을 인구도 풍성하였다.
그저 희망이나 원이 있다면 늙은이들이 죽기전에
말로만 듣던, 혹은 어린 시절 떠나온 기억만 아스라한
고향 안동을 한번 밟아보고 싶은 소박한 염원이
있을 따름이었다.
아, 심장병을 앓는 어느가정의 고부, 두 사람이
연길 시내에서 진찰이나 받아보았으면---,
하는 꿈 한자락도 있었고---.
돌아오는 길에 안교수는 적게 요청하면 돈을 받지
않을까봐서 필요없이 많은 쌀을 사겠다고 하엿더니
고향 사람간에 그럴 수 없다고 그 보다 더 많은 쌀과
농산물을 선물로 받아오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다음해가 되자 마음의 빚도 있고 그 아름다운 마을에
대한 향수와 자랑이 복바쳐서 연변 과기대와
이웃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였더니
이 곳에 봉사 활동차 와 있던 서울과 미국과 카나다
출신의 의사 간호사 학자들이 모두 조금씩 성금을
갹출하여 의료 및 농촌 봉사 활동을 펴기로 쉽게
마음이 뭉치게 되었다.
이틀간의 행사 기간은 참으로 축제의 분위기였다.
이번 모임의 주제에는 마을 교회의 건립에 대한
보다 지혜로운 후원과 심장병 환자의 연변에서의
수술 지원등이 덧붙여지면서,
역시 노인들의 안동 고향 방문 계획을 계속 추진하는
내용들이었다.
해가 다시 흘러 이제는 3년째 안동마을 방문의 날이
왔단다.
그 해에는 보다 알찬 계획이 추진되었고 봉사에
참여할 사람들도 더욱 늘었다고 한다.
그러나 찾아간 마을은 기대와는 달리 냉기가 흐르고
있었다.
그 짧은 기간에 마을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모두 대도시와 특히 한국으로 빠져나가고 마을에는
병들고 힘없는 노인네들만 남아있었으며
그나마 그들도 그 사이에 안동 시장의 성의없는
초청 계획과 실언으로 마음이 모두 상해있었다.
안 교수는 혼신의 노력으로 이 망실되고 있는
안동 마을의 되살리기에 나서서 영농 지도와
자활의 프로그램을 추진하지만 동네에는 이미
활력이 떨어져 버리고 없었다.
그들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하여, 또한 애초의
염원을 달성코자하는 집념으로
이제는 불신의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안동 방문
계획도 다시 새롭게 재편하여,
관 주도나 지원을 포기하고 민간의 지원과 성금으로
다시 시작하지만 불신의 골과 가난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그런 희망이나 의욕조차도 사치였다.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안 교수였지만
마침내 안동 방문 계획은 성사시키고 만다.
처음 20명도 넘던 희망자들이 10명으로 줄어든
가운데 가까스로 치루어진 행사였지만
그 결과는 모든이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씨앗과
싹이 되어서 연변의 벽촌 안동마을에 다시 심어졌고
이제 안교수는 이 마을에 얼마남지 않은 어린이들을
연변으로 데려와서 숙사를 마련하여 학교에
보내자는 운동을 힘겹게 펼치고 있다.
수삼년 사이에 그 안동마을에는 빛나던 조선인
소학교도 문을 닫았고
애비나 에미가 남한으로 돈벌러 나가서 병든 편부나
못난 편모 아래에서 커나가는 아이들이 70%에 달하고
그나마 아이들 울음 소리조차 갑자기 뚝 끊겨버렸다는
것이다.
어쩌면 안교수가 연변에 발을 디딘 그해와 그 다음해가
연변 조선인 사회의 마지막 조종이 울리는 최후의
분수령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지금 책을 정리해 보는 내 생각이기도 하다.
오늘 따라 여기 인터넷 사정이 더욱 좋지않고
나도 곧 강의 시간에 대어야겠기에 몇자 급히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