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날밤이 새고 그냥 있기 뭣해서 팩션이란 이름으로 한편 올립니다.
2회 연재이고 별로 재미없는 순 허구입니다.
"단편 이명의 감상 리포트를 현장 취재와 연결하여 제출하라니 고되기는
해도 참 섹시한 발상이셔---."
"정말이야. 정 교수님의 항상 번득이는 발상법이라니---. 그러니 이명같은
사회 고발적 작품을 벌써 오래전에 쓰셨지."
경부선 KTX 객실의 마주보는 중간 네자리를 채운 대학생 차림의 남녀 젊은이가
줄곧 떠드는게 좀 못마땅하였으나 박영빈 교장은 그냥 참기로 했다.
아마도 국문학과나 신문방송, 혹은 광고계통, 아니 문예창작과 학생들이
무슨 작품에 대한 분석을 현장성 있게 해오라는 교수의 과제를 받은듯
하였다. 선거전이 막바지이니 어디 그런쪽으로 가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전에는 KTX라면 객차 내에서의 휴대폰 통화도 눈치가 보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실내 분위기가 좀 풀어져있었다.
그저 빨리 달린다는 장점 말고는 매력이 많이 떨어진 셈이었다.
마주보는 중간자리 바로 뒤 순방향 좌석에 앉아있다보니 떠드는 소리가
고스란히 귓전으로 몰려드는 것 같아서 새벽에 빈 속으로 나와서 기력이
빠진 박 교장에게는 소음이 이래저래 고역이었다.
두시간만 참자.
박 교장은 함께 가는 옆자리의 강태승 사장을 바라보았다.
유통업계의 백전노장이어서 그런가 그는 눈을 감고 벌써 반쯤 잠이든
모습이었다.
"이명의 나이에---, 새벽 일찍 나오기도 이젠 부담이 되네."
박 교장이 강 사장을 흔들어 깨우듯이 말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이명의 나이가 뭐야. 이순이지---."
선 잠이 깨어서 그런가, 강 사장이 좀 짜증스런 반응을 보였다.
"아이구 참, 요즈음은 하던 말도 머리가 헷갈려서 중간에 삼천포로 빠진단
말씀이야. 앞의 청년들이 이명이 어쩌구 하니 나도 금방 이순이 이명이 되어
나오네, 허 참!"
"그건 나도 자주 그래. 이순의 나이가 되니 정말 몸과 마음이 다 말을 듣지
않는단 말씀이야."
강사장도 동병상련을 표명하여서 박 교장은 다소 위안이 되었다.
"요즈음은 아닌게 아니라 이명이 실제로 자주 울리기도 해. 그게 모두 기가
약해져서 그러겠지?"
박 교장의 말이었다.
"너무 허약한 소리 마시게. 우리 나이에 국회의원 입후보한 동기를 생각해보게.
노는 날 이렇게 쉬지도 못하고 찾아가게 만든 우리의 호프 말일쎄, 하하하."
강 사장이 잠은 다 달아났다는 듯이 몸을 세우며 말했다.
"하긴 우리 보다 훨씬 더 나이 많은 사람도 내 나이가 어때서 입후보를
사퇴하느냐고 버티더구만. 대단한 사람들이야.
그러면서도 우리 그 동기는 3선 현역인데도 나이가 많다고 떨어뜨리면서---."
백발을 쓸어넘기며 박 교장이 말을 받았다.
"하여간 이번 행차에는 교장 선생님이 나같은 장똘뱅이와 동반해 주어서
고마워.
내가 동기회 회장 맡고 보니 이래저래 허드렛 일이 많더라구.
총무가 알아서 처리해 주는 경우도 많지만 회장이 직접 나서야 나중에
욕이 되지 않을 경우도 많고---.
그런가하면 이번 입후보자 지원 같은 경우에는 동기회장으로 움직이며 지원을
하다가는 큰일 나겠더라구.
그래서 총무를 대동하고 움직일 수도 없고, 혼자 내려가자니 썰렁하고,
그런데 마침 임원도 아닌 박 교장이 동행을 해주니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다만 총선 규정이 매우 까다롭고 민감하니까, 우리는 어디까지나 개인자격
이라는 것 잊지 마시게.
더구나 박 교장은 교육 공무원이니까 더 조심하시고---."
"그러게 말이야. 입후보한 그 동기가 불알 친구만 아니라도 내가 이명의
나이에 새벽같이 이렇게 일산 신도시에서 나왔겠어?"
"이순의 나이라니까."
"내가 기가 허한지 요즈음 부쩍 이명이 심해요."
"하하하."
두사람은 옆을 개의치 않고 한참 웃었다.
"내려간 김에 하루 머물다 올라오세. 내 술 한잔 살께."
강 사장이 한참만에 은근히 박 교장과의 하루밤 외박을 부추겼다.
"아, 안돼. 오늘 오후에 올라와야해."
"이런, 이순의 나이에도 부인 눈치보시나?"
"아니야. 내가 소설로 문단에 늦깎기 등단을 했잖아. 내친김에 이번 정년을
앞두고 단편 소설집을 한권 내기로 했어. 한국 문인협회 출판부에서---.
편집국장이랑 출판부 사람들과 오늘 저녁 약속이 되어있어."
"하필 오늘인가? 하긴 우리야말로 내려가는 일정을 갑자기 잡았지---."
"그러게. 하지만 사실은 입후보한 그 의원 동기도 우리가 미리 연락하고
오는 것 보다는 불쑥 오기를 바랐지.
자기도 유세 일정이 있는데 동기들이 띄엄띄엄 따로 따로 오니까 여러가지로
번거로운 바가 많겠지. 그렇다고 동기회장이 친구들을 모아서 가다가는
큰일 날 일이고."
"아 그럼 물론이지, 그래서 지금도 우리가 연락없이 불쑥 찾아 가는게 아닌가
말일세."
과연 KTX였다.
앞의 청년들이 대전에서 내리고 금방인듯 싶었는데, 두 사람이 �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기차는 쏜살 같아서 동대구 역을 들어서고 있었다.
역에는 내려가면서 연락이 닿은 고향의 동기회장이 차를 갖고 나와서 소위
'재경회장'과 박 교장, 두사람을 맞이하였다.
그동안 큰 문제없이 수준 높은 정치가의 길을 걷던 국회의원 친구가 느닷없는
기준과 잣대에 얽메어 하루아침에 정당 추천에서 떨어진 현상을 그들은
개탄하며 어쨌든 선거 사무소로 달려갔다.
마침 연락이 없어도 의원 동기 부부는 사무실에 나와있었다.
모두 안색이 좋지 않았다.
"아니, 일간지에 보니 십퍼센트 이상 앞서가는걸로 나왔던데 왜 안색이 그래?"
강 사장이 소릴 질렀다. 격려차원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그런 여론 통계가
조간 신문에 난 것을 읽고 내려온 것이다.
"말씀 마시게. 지방 신문에는 계속 박빙 열세야."
의원 동기가 웃음끼 없는 얼굴로 말했다.
"아니 어째그래? 조사 과정에서 손을 타나?"
강 사장이었다.
"그런 말도 있고---. 그 외에 지역 정서라는게 원래 여당 프리미엄을
많이 타지. 30퍼센트는 그냥 따고 들어가지. 노인정 같은데 가보면
확연해."
현역 의원이면서도 당의 공천에 떨어져서 무소속 연대로 나온 입후보자가
우울한 말로 답을 했다.
"여보, 이 고마운 분들께 차라도 대접하시게. 나는 내일 TV 대담 준비를 좀
해야겠어. 보좌관 좀 들어오라 하고."
의원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두 사람과는 익히 서울에서 낯이 익었던 보좌관이 들어오며 반색을 했다.
"이거 다시 설명해 보게. 숫자도 크게 여기에 써넣고. 내가 이거 담배를
못끊어서 그런지 기억력이 갔어. 나이를 핑계 삼아 반대파 숙청했다고
내가 욕은 하지만 나이가 참 무섭긴 해."
의원이 좀 계면쩍은 표정을 지었다.
"이 양반아. 이순의 나이라면 남의 말 잘듣고 판단만 잘하면 되는 나이야.
지혜와 경륜의 나이란 말일쎄. 기억력이나 총기 경쟁하는 것도 아니고.
이 전자 수첩 시대에 말이야! 나약한 말씀 마시게."
강 사장이 강한 톤으로 격려를 하였다.
그러자 옆에서 듣고만 있으면 좋았을 박 교장이 한마디 끼어들었다.
"어, 의원님 말씀도 일리가 있어요. 하지만 너무 신경쓰지 마시라구.
우리 나이가 다 그래. 나도 이명이 자주 오고, 우리 학교 선생님 이름도
가끔 안떠오른단 말이야."
얼떨결에 나온 위로사가 분위기를 좀 어색하게 만든 셈이었다.
의원의 부인이 조금 난감한 시선을 던지더니 유세 준비를 한다고 나가고
도우미 아가씨가 녹차를 들고 들어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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