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 성공회 서울 대교구 좌성당"에서 친구 댁내의 혼사가 주말
토요일에 있었다.
이름이 좀 길지만 우리가 덕수궁 옆에서 가끔 보는 그 아름다운
서구식 성당 건물 모습이 바로 그곳이다.
평소 나도 도심에 있는 서구 양식의 아름다운 그 건물과 표지판을
스쳐지나기는 했어도, 들어가 보기는 처음인듯 하여서 정오의 혼례
시간에 늦지않게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대한문 앞에서 큰 구경거리가
생겼다.
오전 11시에 시작했다는 수문장 교대식이 피크 타임으로 향하고 있었다.
체험 학습장이 귀하게 보였다.
오후에는 교대식이 두시에 있다는 안내 방송도 들렸다.
모두 우리말 다음에는 영어, 중국어, 일본어가 잇달아서 글로벌 시대를
실감케 하였다.
다국적 언어만 허공을 가르는게 아니라 다양한 인종들이 대한문 앞에서
디지틀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었다.
전 수문장이 다음 수문장에게 옛날 승정원에서 하던 모양 그대로
감찰을 인계하며 크게 구령을 내리는데 거구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나와서 내 마음도 시원하고 기갈찼다.
수문장만 기골이 장대한게 아니라 수문군들도 모두 씩씩한 용모에
체격들이 좋았다.
군악대들의 전례예악이 또한 신명 났으나 안내 책자가 동이 나서
살펴 볼 기회가 없음이 아쉬웠다.
하긴 그럴 겨를도 없었다.
정오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발길을 떼는데 교대식도 그리 오래 끌지
않아서 이윽고 수문군들은 시청 앞 광장 쪽으로 행진을 하여 걸어갔다.
역사 책에서나 봄직한 전통 군인들이 신호등 때문에 걸음을 멈추는 것도
재미 있었지만 광장을 건너 어느 사이엔가 시야에서 사라져버리는 것도
동화처럼 경이적이었다.
그들은 아마도 시간 이동을 하여서 역사 속으로 들어갔다가 오후 두시가
되면 어김없이 다시 나타날 것이었다.
마크 트웨인이 쓴 "아더왕 궁전에 들어간 코네티컷 양키들"이라는 소설
생각이 났다.
이제 내 발길은 가까이에 있는 성공회로 향하였다.
교대식을 마치고 수문군들이 어디론가 돌아가고 있었다.
부처님 오신날이 가까워서 수문군들의 행진과 연등행사 준비물들이 묘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제 가까이에 있는 성공회 입구에 다달았다.
한세기 전에 인도 츨신 영국 작가 '러드야드 키플링'은 동은 동, 서는 서이고
동서는 결코 만날 수 없다고 하였다.
지금 서울 한복판에서 동과 서는 조화롭게 만나고 있다.
과연 동과 서는 조화롭게 만나고 있었다.
덕수궁 돌담길의 저 커플도 동서양의 만남이었다.
영국의 식민지가 된 인도에서 살았던 작가 키플링은 “영국 제국주의는
미개한 원주민에 대한 백인의 사명”이라고 말했다.
소위 Whitemen's Burden 이야기가 등장한다.
지금 음미해 보면 화가 나기보다 그 안목에 동정심이 생긴다.
그는 “(인도) 벵골인의 신체 조직은 여성과 같다고 할 정도로 유약하다.
여러 시대 동안 그들은 용감하고 대담한 남자에게 짓밟혀왔다.
용기, 독립, 정직과 같은 특질은 벵골인의 체격과 상황에는 한결같이
적합하지 않다.”
이렇게 말한 그가 1907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고 보면 당시 유럽인이 동양을
바라보는 시각이 키플링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서구인이 동양에 대해 지니고 있는 잘못된 인식을 ‘오리엔탈리즘
이라고 한다.
‘ORIENTALISM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에 대한 하나의 담론 체계로서 단순히 조잡한 날조에
그치지 않고 학문적인 체계를 이루면서 재생산되는 관념의 틀’이라고
정의했다.
산업화에 성공한 서양에는 ‘서양=남성=이성=문명=중심=지배국’이라는
의미 체인이 생겼고,
당시 농업 사회였던 동양에는 ‘동양=여성=무지=야만=주변=식민지’라는
의미 연쇄가 각각 만들어졌다.
키플링은 “동은 동, 서는 서/그 둘은 결코 만날 수 없으니/신의 위대한
심판의 자리에/하늘과 땅이 필히 서게/될 때까지는”이라고 읊었다.
‘
남자·여자, 이성·광기와 같이 모든 것을 이분법으로 나눈 상태에서
존재, 본체, 남자, 이성이라는 한쪽만 인정하는 실체론적 사유이며
서양 사상사의 주류를 형성한 사고 방식이다.
여성은 철학적 사유에 적합지 못하고 그래서 여성 철학자가 서양 철학사에
드물다는 한심한 사유 전개도 한번 휴식시간의 간식거리로 생각해볼만 하다.
“
발언에 ‘동양인’
‘바이바이 키플링’으로 대답했다.
이 작품은 ‘양립할 수 없는 서양’이라는 동양적 관점과 ‘이해할 수 없는
동양’이라는 서양의 시각을 반박하며 글로벌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를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저녁에 글을 올리려는데 마침 사는 곳에서 연등행사가 보였다.
규모가 크고 잘 알려진 교회의 옆으로 아름다운 행렬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 조화로운 모습에 야경이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문득 전주에서의 광경이 떠올랐다.
오래된 천주교회 앞으로 연등이 천연스럽게 달려있었다~~~.
대한 성공회 서울 대교구 좌성당의 건축사를 참고로 올립니다.
서울대성당은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대표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대성당이다.
대한성공회 전신인 조선종고성교회(朝鮮宗古聖敎會) 초대 주교로 1890년 제물포항에 도착한 C.G. 코프가
지금 자리에 있던 낡은 한옥에 십자가를 세우고 장림교회(將臨敎會)로 이름 짓고 정기미사를 드림으로써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 건물은 1922년 착공, 26년에 완공되었으며 성공회의 토착화 선교정책에 따라 로마네스크 양식에 한국적
건축미를 살린 점이 특징이다.
3·1운동 당시, 그리스도교계학생들의 만세운동의 중심지였고, 70년대에는 사회정의실현과 민주화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특히 87년 6월 민주화항쟁에서는 6·10국민대회 등으로 국민운동의 상징적인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지금의 성당은 1926년 5월2일에 축성되었는데 당시에는 자금관계상 설계도면의 절반밖에 짓지 못하였다.
이에 서울대성당은 교회창립 103주년을 맞이하는 1994년에 이르러 교우들의 의지를 모아 교회의 오랜 숙원인
성당 완성을 위한 증축공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1996년 5월, 증축부분에 지하3층의 교육관을 부속 건물로 하는 총 1,239평에 이르는 현재의 건물이
완성되게 되었다.
이 성당은 원래 하나의 성가대석과 7개의 주간(bay)을 가진 신랑과 2개의 날개부분(trancept)으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준공 당시의 건물에서 신랑은 3개의 주간을 갖추었고, 날개부분도 원 설계의 일부분만 완성시켰다.
이와 같이 이 성당은 건립된 부분이 면적상으로는 전체 계획된 것의 약 50%에 지나지 아니한다.
그러나 설계자는 자신의 설계에 따라 건물 전체가 언제 완성될 수 있을지 예측할 수 없으므로, 제한된 부분만을
건축하여도 그 균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배려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이 성당은 현재로서 그 형태에서 부족감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균형 잡혀 보인다.
일제 침략기에 서양인에 의해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설계된 동양최초의 본격적인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축물이라는 점에서 성공회 성당의 역사적 의의는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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