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출판 <하서>에서 명작 시리즈를 내면서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최근 출간하였습니다.
출판 기획 중에 해설을 부탁하여서 몇 자 보탰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라는 뜻에서 일부를 여기에 그림과 함께 올립니다.
저자의 전반적 문학세계와 일대기도 첨부되어 있습니다.
책이요?
번역도 좋고 참 잘 만들었군요---^^.
퓰리처상 수상작품이며 헤밍웨이가 노벨상을 받는 데에 가장 큰 역할을 한 현대의 고전, <노인과 바다>를
읽으며 처음부터 재미를 느낀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특히 인터넷 시대에 난무하는 판타지 소설이나 게임 콘텐츠의 박진감 넘치는 줄거리에 도취한 젊은이들이라면
이 작품의 가치에 회의가 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이 드라마틱한 쇼크로 가득하지 않고 삶의 가치는 대체로 오리무중이듯이, 진정한 문학 작품은
순전히 재미 위주로 사람을 몰아가지는 않는다.
아니 오히려 애매한 상태로 존재하는 삶의 가치체계를 함께 진득이 근심한다는 듯이 위대한 문학은 느리게,
그러나 차분하게 우리를 사유의 큰 바다로 이끌고 나아간다.
헤밍웨이가 쓴 <노인과 바다>가 바로 그러하다.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실은 “깊이 생각하고 느끼는 만큼” 세상은 우리에게 그 참 모습을 드러낸다.
<노인과 바다>가 위대한 고전 작가들의 대 로망에 비하여 조금 짧은 중편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있을 수 있다.
작가가 만년에 완성코자 했던 “해양 3부작”의 일부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는 미완의 원고로 남았다고 보는
평론가들의 추측은 개연성이 있다.
그러나 그런 사연 때문에 바다라고 하는 거대한 자연 속에서 분투한 주인공 어부의 모습이 훼손 될 이유는 없다.
‘파괴될지언정 패배할 수는 없다’는 노인의 불패 정신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겪는 수많은 좌절과 실패를 초극할 수
있는 용기를 주며 인간 승리의 철학을 이끌어 내기 때문이다.
때로 삶이란 인간에게 허무의 모습으로 나타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서 인간은 초라하게 살아갈 이유나 권리가 없다.
오로지 행동하는 자세로 인간조건을 초극해야 한다고 헤밍웨이는 메시지를 보낸다.
왜냐하면 인간은 존엄하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헤밍웨이도 생애를 통하여서 상승과 하강, 승리와 좌절의 곡선을 그으며 살았다.
특히 만년에 저작한 <강을 건너 숲으로>는 독자와 비평가들로부터 매우 냉담한 반응을 받았다.
그러나 단지 2년 후인 1952년에 <노인과 바다>가 나오자 큰 반향을 받으면서 창작의 활력을 되찾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는 이 작품으로 그해의 퓰리처상을 받고 그다음 해에 노벨상을 받는 바탕이 되었다.
중편 소설 분량의 이 작품은 플롯도 쿠바의 늙은 어부 산차고(Santiago)의 삶 속에서 생긴 복잡하지 않은 하나의
사건에 토대를 두었을 따름이다.
등장인물도 이 늙은 어부와 그를 따르는 소년 마놀로(Manolo)만 집중적으로 묘사 될 따름이다.
산차고 노인은 84일간이나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다.
그러나 이제 마침내 행운이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안고 그는 이른 새벽에 쪽배를 저어 하바나 항을 떠난다.
이제껏 그나 다른 어부들이 감히 나가지 못했던 먼 바다로 그는 나갈 작정을 한다.
큰 물고기를 낚아서 돈도 많이 벌고 그동안 구겨진 인간적 체면도 회복하기를 꿈꾸며 그는 배를 저어 나아간다.
마침내 노인은 거대한 마알린을 낚게 되지만 이 물고기는 작은 쪽배를 끌고 먼 바다로 마구 도망쳐 달린다.
물고기는 좀체 바다위로 올라오지 않지만 노인은 쪽배를 끌고 가는 속도와 힘으로 보아 이 녀석이 예사롭지 않은
존재임을 파악한다.
이틀이 지난 후 마알린은 마침내 자신을 잡고 있는 낚시를 잡아챌 심산으로 바다 위에 높이 솟아오른다.
노인은 평생 닦아 온 힘과 기술과 꾀를 다하여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는데 자신과 대적하는 이 물고기가 밉지않고
오히려 선의의 경쟁자처럼 정이 느껴진다.
사흘째 되던 날 마알린은 힘이 빠져서 쪽배 주변을 빙빙 돌고 산차고 노인은 물고기를 배 가까이로 끌어당길 수
있게 된다.
드디어 물고기가 배 옆으로 오자 노인은 작살로 찔러서 죽이며 미안해한다.
그는 쪽배 보다 거대한 물고기를 마침내 뱃전에 묶어서 돌아가는 데, 상어 떼가 들이 닥쳐서 노인의 필사적
저항에도 불구하고 마알린의 살점을 모두 뜯어 먹는다.
쪽배가 해안에 당도했을 때는 오직 마알린의 뼈만 남아있을 따름이다.
노인은 돛을 어깨에 짊어지고 언덕을 비틀거리며 올라가서 자기의 오두막집으로 들어가 잠이 든다.
이 작품에 나오는 노인의 이야기는 작가의 성숙한 비극적 인생관을 표출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삶에 대한 비극적 비전 못지않게 긍정적인 가치와 견해를 피력하고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헤밍웨이는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사악과 변덕을 충분히 인식하면서도 우주의 원초적 생명력에 경의를 표하고
인간과 자연 사이에 존재하는 근본적인 공동체 의식을 통감한다.
비록 산차고 노인은 물고기를 죽이고자 하지만 물고기에 대한 존경심을 느끼며 훌륭한 적수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과 존경의 연대감을 느낀다.
인간과 물고기 사이의 투쟁은 경이감과 동정심을 자아내는 정정당당한 시합이다.
상어가 공격하는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이 고개를 드는 것이며 이러한 상황에서 노인은 물고기에게
사과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러나 노인과 마알린이 악에 의해 모든 것을 잃어버린 패배자만은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해냈기에 함께 승자이기도 한 것이다.
<노인과 바다>는 도덕이나 종교적 원칙을 함축하고 있는 우화의 일종이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성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도덕적 설교를 우화의 형식으로 표현하였다.
이럴 때는 자질구레한 설명적 요소는 절제된다.
그러므로 문체상으로 보아서도 이 작품은 성서의 우화와 매우 비슷하다.
평소 헤밍웨이가 쓰던 흔히 ‘하드보일드’ 기법이라고 하는 매우 간결한 표현기법과 구문의 특징이
이 작품에도 아낌없이 투영되어서 성서 속 우화와의 유사성이 더욱 돋보인다.
인물 묘사도 스케치처럼 절제되어있고 사람의 이름도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바다에서 거대한 물고기와 사투를 벌이는 노인은 외로운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육지에 있는 인간과 끈끈히 연결되어 있다.
우선 마놀로라는 이름의 소년이 있다.
이 소년은 그의 부모로부터 노인과 함께 배를 타는 것이 금지되어있다.
왜냐하면 이제 운이 다한 노인과 함께하면 소년의 운도 다 할 것이라는 부모의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끝에 가서 소년은 자기의 스승인 이 노인과 재결합한다.
소년의 생각에 이 스승은 너무나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이기 때문이다.
소년은 노인에게 먹을 것과 약을 갖다 주면서 어부이자 영웅인 노인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심지어 존경까지 받는 인물들이다.
다른 작품에서는 사랑을 표하는 사람들이 여성이라면 이 작품에서는 그 인물이 소년이다.
이제 인간관계에서의 사랑이 남녀간의 관계가 아니라 세대를 잇는 승화된 유대감이며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력의 끈으로 대치된 것이다.
노인은 결혼생활도 원만했었으나 이제 부인은 죽고 없다.
그가 사는 언덕의 오두막집에는 예수의 상과 성모 마리아의 상이 걸려있다.
이것들은 모두 부인의 유물이다.
한때는 벽에 부인의 빛바랜 사진도 있었으나 이제는 떼내어서 붙어있지 않다.
그림을 볼 때마다 노인은 너무나 부인 생각이 나서 외로움을 느끼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사진은 노인의 깨끗한 셔츠 밑에 보관되어 있다.
산차고 노인은 과거와도 깊은 유대감을 갖고 있다. 젊었을 때 그는 힘이 장사였다.
이제는 전설이 된 팔씨름에서 그는 경이적인 힘을 가진 도전자를 꺾은적도 있다.
이제 그는 오래전에 뱃전에서 보았던 아프리카 해안의 사자를 꿈속에서 본다.
노인이 꿈속에서 본 사자 이야기를 하면 소년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듣는다.
사자의 꿈은 수많은 상징의 뜻을 갖고 있다. 모험과 정열과 긍지의 의미가 있는가 하면 존재에 대한 사랑과
생명력을 나타내기도 한다.
시련이 끝난 노인은 침대에 눕는데 그 모습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것처럼 보인다.
그는 담요를 끌어당겨서 어깨에 두르고 등과 다리도 덮는다.
그러고 나서 손바닥을 위로하여 팔을 쭉 뻗은 다음 신무지 위에 얼굴을 묻고 잠이 든다.
이러한 모습을 기도교적 심상으로 보는 데에는 무리가 따를지도 모르겠으나 인성으로서 고난을 받는 예수의
모습을 이 장면에서 떠올려 보는 것은 작품의 주제를 이해하는 데에 상당한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인성으로 고통 받는 그리스도의 심상은 헤밍웨이의 비극적 인생관과 여러모로 합일되는 점이 있기 때문이다.
산차고 노인은 마알린과 사투를 벌이면서 몇 차례 하나님을 찾지만 자신이 신앙인은 아니라고 말한다.
이렇게 고통 받고 고뇌하고 또 회의하는 모습은 바로 헤밍웨이의 모습에 다름 아니라고 하겠다.
<노인과 바다>가 헤밍웨이의 최고 걸작은 아닐는지 모르나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상황과 조건에 대하여
성숙하고 균형 잡힌 통찰력이 가장 원숙하게 투영된 작품이라는 점에서는 이론이 없다.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가 생전에 출판한 마지막 주요 소설작품이었다.
이후 죽는 날 까지의 9년이란 기간 동안 그는 병마와 노쇠와 사라져가는 창작력이라는 인간의 한계성과
철저하게 투쟁을 하며 살아갔다.
1953년에 그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원래 이 상은 ‘이상적 경향의 문학작품’에 수여되도록 정관에 명시되어 있는데 헤밍웨이의 작품은 어쨌든
이 기준에 맞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어 왔었다.
그런데 <노인과 바다>는 이런 견해를 바꾸어 놓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노벨상의 수여문에는 ‘폭력과 죽음으로 가득한 현실 세계에서 의로운 투쟁을 전개한 모든 사람에게 의당한
존경심’을 표현한 헤밍웨이의 공적이 명기되어 있다.
하지만 그가 쓴 이전의 작품들은 ‘거칠고 냉소적이며 냉담한’ 면이 있었다는 점도 특별히 덧붙여져 있다.
헤밍웨이의 작품에 대한 일반적 오해가 다 풀리지는 않았다는 표시이기도 하다.
헤밍웨이가 자살로 인생을 마감한 의미에 대해서는 많은 해설이 이어져오고 있다.
어떤 시각으로 보면 작가가 초기 작품에서 보인 허무주의를 마침내 초극 해내고 새로운 성취를 이룬 문학과
인생 여정에 비추어 자살이란 너무나 책임 없는 돌발적 행위하고 개탄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또 어떤 시각으로 보면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은 작가가 인생의 황혼기에 이러한 인생관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자 이에 저항하여 용기 있는 최후의 도전을 했다고도 생각할 수 있겠다.
물론 죽음의 이유를 밝히는 유서 같은 것은 애초에 남아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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