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

어떤 게이 날 (첫회)

원평재 2009. 1. 13. 21:34

 

 

 

이태원 입구에 있는 해밀튼 호텔 예식장에서 친구의 딸이 시집을 가던날,

나는 지각 도착이 되어 식장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마침 문깐에 서성이던

친구들에게 이끌려 2층으로 올라갔다.

식을 보지 못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내 항변에 그들은 웃으며 나를 그간 희귀동물이

다 되었다고 놀리며 피로연회장의 모니터를 보라고 하였다.

과연, 무릅을 치며 나는 선명한 결혼식 진행을 거기에서 구경하였다.

"어이, 미국 촌사람. 뭘 그리 열심히 보나. 술이나 들게. 여긴 다 이렇게

사는거야."

식의 진행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듯 친구들은 맥주에 소주를 타서 찔끔

찔끔 마시며 농담과 잡담을 나누기 시작하였다.

 

나도 20여년 전, 미국 이민을 떠나기 조금 앞서 서울의 어떤 예식장에서 순

우리나라 식으로 결혼식을 올렸고 그 당시 친구들의 혼인 예식에도 꽤나

드나들었지만 이번에 와서 보니 모든게 생소하였다.

내 아이들은 아직 결혼을 할 나이나 처지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어쨌든 친구의

자녀가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이 대견하고도 궁금하여서 나는 벽결이 모니터에

거의 넋을 놓고 있었던 모양같았다.

더우기 오늘 딸을 시집 보내는 내 친구는 동기 동창생일 뿐만 아니라 오래

한동네에 살았던 죽마고우였다.

피로연회장은 술마시는 사람들로 벌써 시끄러워졌으나 워낙 화질과 음향이

좋은 벽면의 모니터는 어쩌면 아래층 예식장 보다 더 잘 현장을 전달해주고

있는듯 싶었다.

신랑은 씩씩하였고 신부는 아름다웠으며 주례는 엄숙하였다.

 

혼주 석에 앉아 있는 내 친구는 그 동안 머리칼이 많이 빠져서 중간 대머리쯤

되었으나 내 기억 속의 인물과 크게 벗어나 있지는 않았다.

다만 그의 부인은 그 사이에 나이가 너무 많이 들어보여서 처음에는 생소한

얼굴이었으나 그래도 자꾸 시선을 멈추어 보고있자니 아주 낯이 설지는 않았다.

 

 

관록이 묻어나는 주례는 매우 빠르고 익숙하게 식을 진행하여서 이제는 어떤

키 크고 마른 여자 가수가 카랑카랑하게 축가를 부르는 순서까지 와 있었다.

곡명이 생각나지 않는 그 노래 위로 나는 갑자기 푸치니의 오페라

<마담 버터플라이>에 나오는 아리아, "어떤 개인날"이 생각났다.

남의, 아니 죽마고우의 경사스러운 자리에서 나비부인의 슬픈 오페라 아리아가

떠오르다니---,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지만 왠일인지 하여간 그랬다.

 

 

곡명이 잘 생각나지 않는 축가를 부르는 가수의 음정이 너무 높아서 푸치니의

그 오페라가 문득 생각났는가, 어쨌든 속으로 민망한 감정이 정당한 이유와

핑계를 찾아서 분주하다가 '아차, 여기가 이태원이구나' 하는 생각에 머물렀다.

미국 생활 이십여년에 노스탈자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태원 생각은 별로

나지 않았었는데, 오랜만의 고국 방문에서 갑자기 "이태원"과 "어떤 개인날"의

추억이 이렇게 뒤섞여 엉키다니---.

무의식인지 의식계인지 하여간 내 마음 나도 모르는 중에 그 상관관계는 불쑥

나를 사로잡고야 말았다.

 

이십여년 만에 내가 일시 귀국을 한 것은 장 조카의 결혼식을 앞두고 형님이

간곡한 초청을 하여서 나도 큰 마음을 먹은 결과였다.

형님이 특별히 나를 오라고 한것은 혼사 때문 만은 아니었고 문중 땅에 최근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생긴 토지 보상금 문제 때문이었다.

형제간에 그 동안 별로 우애도 없이 지내다가 땅 보상 문제가 문중에서 생기니

아무래도 친동기간에 힘을 합쳐야 할 일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돈이 무섭다.

전화 조차 오고가지 않았던 형제 관계에서 형님은 비행기표 까지 끊어 보내는

열성을 보이는 바람에 나는 허둥지둥 들어 올 수 밖에 없었다.

토지 보상은 형님의 주장에 내가 동의를 하는 표시로 도장을 찍으면서

이제 일가친척 모두를 주적으로 간주하는 변호사들의 싸움으로 넘어갔고 나는

모처럼 귀국한 김에 친구들을 찾아나섰다.

다툼에서 이기더라도 돈은 나와 별로 관계없이 형님의 수중으로 넘어가게

되어있어서 내 마음은 차라리 홀가분했다.

 

 

 

 

서울에서 동기들을 찾기란 걱정했던 만큼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강남 서초동에 이들은 동기회 사무실을 하나 열어 놓고서 바둑, 장기, 고스톱

판을 벌이며 노년의 초입에서 삶을 즐기고 있었다.

세상에!

그 공간을 지키고 관리하며 하루 종일 근무 하는 예쁜 아가씨 까지 있지 않은가.

 

맨해튼에서 "코인 샵"이라고, 자동 세탁소를 친절 위주로 오래 운영하다보니

이제는 한인들과 히스패닉들을 단골로 잡았고, 늦게 얻은 자식들도 공부를 

그럭저럭 빠지지 않게 잘하여서 동부 명문 대학에 보내놓은 나는 이제 세상에

별로 부러울 일이 없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담배를 뻑뻑 피워대며 냉장고에 그득한 소주와 맥주를

무시로 꺼내 마시고 고스톱과 내기 바둑을 즐기는 동기들의 모습을 잠시나마

보니 어쩌면 내가 세상을 크게 잘못 살아 온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내 가슴을

뒤흔들기도 했다.

 

물론 어깨를 팍팍 부디치면서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걷는 종로 거리의

투쟁적 삶의 모습이라든지, 스피커로는 내내 노약자들에게 버스가 완전히 정거한

다음에 천천히 내리라고 권유하면서도 우당탕 저돌적으로 달리고 멈추는 버스의

관행, 모처럼 반갑다고 해놓고는 강제로 술을 먹이는 우정, 이런 여러가지 사소한

불편함이 내 의식을 금방 서울에서 맨해튼으로 쫓아내고야 말았지만---.

그래, 어느 쪽이든 세상에 완전한 삶이 있으랴.

 

귀국하여 신바람나게 돌아다닌 또다른 한 마당은 동기회 사무실에서 알아낸

친구 자녀들의 결혼식장이었다.

축하금을 조금 내고 잔치 마당에 나가면 그간 못보았던 얼굴들을 거의 모두 대면

하게 되고 맛있는 음식에 그리웠던 소주잔까지 겯들이니 이 또한 작은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랴---.

애경사의 스케줄은 당연지사로 동기회 사무실 게시판에 정리되어 붙어있었다.

 

(계속)

 

Un bel di Ved remo(어떤 개인 날)
in Madame Butterfly-Puccini



Bell Telephone Hour Orchestra
Conductor/ Donald Voorhees(1903-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