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시간이 꽤 많이 흘러 신규 수강생들이 자신의 해금에서 몸통과 활의 분리작업을 거의 끝내갈
무렵, 젊은 여성 강사가 들어왔다.
그녀는 자기를 평생 교육원 소속의 강 인영 교수라고 소개하면서 그냥 강 교수라고 부르면 된다고
하였다.
"제가 젊은 노처녀니까 강 교수님이라고 하실 필요는 없어요. 강 교수! 그렇게만 부르세요. 호호호.
여러분 웃읍죠. 한번만 더 웃읍시다. 바나나가 웃으면 뭐라고 하죠? 네에---, 바나나 킥이에요,
호호호.
하나만 더 할까요? 자갈이 삐쳐서 치~하면 뭐가 되죠?"
"자갈 치!"
구파발에서 온 부인이 얼른 정답을 외치더니 혼자 또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고 손으로 자신의
입을 막았다.
"네, 맞습니다. 신규 분 들이라 참신하고 의욕적이어서 저도 항상 즐거워요.
그런데 큰일들을 내셨어요. 활을 본체에서 다 뽑으셨네요. 이를 어째요. 다 망가뜨렸어요. 해금은
바이얼린과 달라서 원래 두 부분이 붙어 있어야 되거든요.
아이구, 저 신규님은 송진까지 갖다 바르셨네요. 송진은 물론 앞으로 열심히 활에다가 발라야 되지요.
하지만 지금은 다시 본체와 활을 연결해야 되니까 송진이 자꾸 손에 묻게 생겼어요. 힘들게 되셨네요,
호호호."
신규 부인들은 다시 악기를 조립하여 하나로 만드느라고 난리를 쳤다.
설마 악기를 부셨으니 변상하라고는 않겠지만 아무튼 모두들 땀을 뻘뻘 흘렸다.
"자, 이제 분위기를 살려서 자기소개를 해요. 그리고 반장도 한 분 뽑아야 하는데---."
강 교수의 시선이 내게 와 박히더니 일단 내 옆의 할머니 같은 분에게로 갔다.
할머니를 시작으로 모두 돌아가면서 자신에 관한 소개를 먼저 하라는 것이었다.
부업으로 나가는 곳을 대며 모두 집안 살림만 하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들을 준비한 듯이 줄줄
읊었지만 나는 그저 집에서 밥이나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반장은 아까 그 내 옆의 할머니가 연장자라서 임명이 되었고 총무를 뽑는 순서에서 교수의 시선이
또 내게로 왔다.
"저요, 저! 제가 하겠어요."
삼송리 아주머니였다. 교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간청을 들어주었다.
"반장 님 부터 이제 여기 해금 교실에 등록하신 동기를 한마디로 소개해 주시죠."
"네, 저는 아까 그 부업도 있고 손자도 키워 주는데 영감부터 저를 너무 무시해서 황혼 이혼을
하려다가 해금을 배우러 왔어요. 해금이 화병을 고쳐준다고 해서요.“
"잘 오셨군요. 국악이 음악 치료 효과에도 안성맞춤이지요. 하지만 힘들면 화병을 더 키우시니까
마음 편하게 슬슬하세요. 그럼 총무님은요?"
"저는 구파발에서 왔지요. 국악에 관심이 많았는데 기회가 없다가---, 가야금은 줄이 많고 이건
두 줄이라서 쉬울 것 같아서 왔어요. 그쵸, 교수님? 그런데 우리 연주회는 언제 하게 되나요?"
"네, 그런 건 나중에 답해 드릴 테고 계속 또 돌아가면서 소개하시죠."
"저는 기자촌에서 왔어요. 그런데 보통 해금 교실이 오후에 있더라구요. 그런 시간에 나갔다가
집에 오면 항상 저녁 시간에 쫓길 테고 밥 기다리는 가족들이 맨 날 해금 진도 나가는 거나 물어
볼 텐 데, 그래서 용기가 안 생기더라구요.
여기는 아침 시간이어서 슬쩍 다녀오면 되겠다 싶어서 힘을 냈어요. 행복해요~."
"아유, 우리도 그래요!"
기자촌 부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가좌동, 북가좌동에서 왔다는 부인 두엇도 얼른 그 말에 동조
하였다.
하여간 소개는 그런 식으로 돌았고 이제 자유질문 시간이 되었다.
구파발에서 온 머리를 높이 올린 여자가 물었다.
"아까 연주회 언제 하느냐는 질문도 나왔었지만, 우리 자격증은 언제 따요?"
"자격증? 아니 해금 연주에 무슨 자격증이라고?"
내가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네, 2년쯤 되어야 딸 수 있어요. 그런데 우선 실기는 우리 해금 교실에서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 제가 수시로 평가를 하구요, 출석과 더불어 그게 모두 합산해서 들어가죠.
필기시험도 쉽지는 않지만 음악은 일단 연주니까요---.
그런데 그건 왜 묻지요? 첫날부터---."
"아이, 첫날이니까 묻지요. 자격증 따면 나도 해금 교실을 동네에서 한번 열어볼까 해서요---."
"꿈도 야무지시네."
이런 소리는 물론 나오지 않았지만 잠시 침묵이 흐르는 동안 모든 이의 입 속에서는 그런 말이
맴돌았을 법 한 분위기였다.
"자, 그럼 우리 한번 해금 악기의 소리부터 내 볼까요?
이렇게 따라하세요."
신규 수강생들은 강 교수를 따라서 해금의 생명줄을 왼손 손가락과 손바닥으로 잡고 거기 붙은 활을
오른 손가락으로 걸친 채 잡아당겨 보았다.
여러 가닥의 말총으로 된 활은 억지로 나오는 신음이나 막 되먹은 비명은커녕 하다못해 짧은 한숨
소리 하나도 만들지 못하고 모두 긴 침묵의 바다에서 하릴없이 노 젓는 시늉만 하고 있었다.
정말 강의실은 쥐죽은 듯 하여서 의자의 삐걱거리는 소리 하나 나오지 않았다.
두 줄 밖에 되지 않아서 찾아왔다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단순하고 간단한 그 현으로 득음을 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줄은 정말 거기 모인 누구도 상상 못한 일이었다.
"아이구, 웃음 참느라고 배꼽이 빠지는 줄 알았어요. 연주회 언제 하느냐고 보챈 사람, 그리고 악기
연주 자격증 따는 걸 묻던 사람들이 글쎄 깽깽이 소리하나 못 내고 강의실은 쥐죽은 듯 했으니,
하하 호호, 아이고 미쳐요. 하하 호호."
그날 저녁 연신내의 우리 연립주택은 모처럼 배꼽을 잡는 소동이 벌어졌다.
해금 교실은 일주일에 한번 화요일 오전 9시부터 세 시간 동안에 걸쳐있었다.
강 교수의 열정은 알고 보니 이 분야에서는 호가 나있었고 아침 시간이라 주부들의 어려움이 해소
되어서인지 선착순 신규반은 열두 명 정원이 금방 다 찼고 수강생들의 열의도 대단하였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아파트 건축 공사장은 연말이 되면서 일거리와 분위기가 모두 좀 시들해졌다.
모래내의 주상 복합 공사가 워낙 커서 매일 일은하지만 잔업을 잡아서 돈을 더 벌 기회는 없었고
뉴 타운 계획도 당분간 분양 시장의 흐름을 보고 계속 되리라는 말이 돌았다.
내가 해금이라도 배우기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집안에는 웃음이 사라질 뻔하였다.
독서실과 학원에서 늦게 들어오는 딸아이 하고는 될수록 말을 아끼고 TV도 작은 것을 놓고 마치
몰래 듣고 보다시피 하는 가정에 잔업도 없이 일찍 들어와 앉아있는 두 사람 사이에 깽깽이를
사이에 한 대화가 없었더라면 정말로 아무런 낙이 없을 뻔하였다.
물론 동짓날 긴긴 밤을 이 좁은 연립주택에서 깽깽이를 연습하며 보냈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러다가는 주민회의에 붙여져서 쫓겨날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가 또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자신만을 위하는 사람들도 결코 아니었고---.
우리는 그저 해금이라는 국악기에 관하여 별로 깊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는 사실 만으로도 마음이
으쓱하였고 행복하였다.
해금 연습의 진도가 좀 나간 어느 날 저녁에도 우리 부부는, 아니 내가 주로 이야기를 꺼냈다.
(계속)
'단편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어떤 게이 날 (첫회) (0) | 2009.01.13 |
---|---|
(단편 연재) 해금 산조 (6회중 끝) (0) | 2008.10.09 |
(단편 연재) 해금 산조 (6회중 3회) (0) | 2008.10.06 |
(단편 연재) 해금 산조 (6회중 2회) (0) | 2008.10.04 |
(단편 연재) 해금 산조 (6회중 1회) (0) | 2008.10.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