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 문예지 <문학마을>, <문학과 의식>, <서울 문학>, 등 3개 문예지 겨울호에 각각 졸작 단편을
실은 바 있습니다.
이제 겨울도 다 지나가고 하여서 그 겨울호에 실었던 작품을 이곳에 올려봅니다.
먼저 <문학과 의식>에는 "빈포 마을 사람들"을 연작 형태로 연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상의 마을 빈포 출신들이 서울과 고향에서 벌이는 이 시대의 인간 드라머를 다양한 서술시점
(point of view)으로 전개해 나가봅니다.
1. 회계머니-헤게머니
서부 경남 지역의 해안 마을, "허포(虛浦)"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사실은 “허포”에 사는 사람들도 잘 모른다.
지금은 행정 동명이 "빈포(彬浦)"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비어있는 포구라는 뜻의 빈포를 빛날 빈(彬)자로
좋게 바꾼 것이다.
이름의 내력으로는 원래 임진왜란 때에 이순신 장군께서 이 곳 주민들을 내륙으로 소개 시켜서 허포가
되었다는 설도 있고, 비어있는 포구라는 헛소문을 퍼뜨린 다음 매복 전술로 크게 이겼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하여간 지금은 허포라는 이름이 너무 허랑하다는 주민들의 요구가 받아들여져서 빈 포구라는 뜻의 "빈포"로
일단 바뀐 다음 한자로는 뜻이 괜찮은 "빈포(彬浦)"가 된 것이다.
"빈포 초등학교"를 나온 사람들은 서울에 와서 모두 출세를 하였다.
서부 경남 사람들이 워낙 성취동기가 높은 기질적 특징도 있겠지만 사실은 그 옆, "고성(固城)" 사람들이
예로부터 과거 제도를 통하여서도 조정에 많이 나아갔고 근래에는 이 마을을 고향으로 한 군인 출신들이
군사정부 시절부터 출세를 또 많이 하여서 빈포 사람들이 그 이웃 덕을 보았다는 말도 있다.
그런 주장은 고성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빈포 사람들은 자기들 힘이지 고성 사람 덕이라니 천부당, 만부당,
결코 아니라고 극구 부인한다.
삼각지에서 이발사 초보, 흔히 그 바닥에서는 "시다(下)"라고 하는 맨바닥에서 출발하여 지금은 어엿한
이발관 사장이 되어 "건강 휴식 이용원"이라는 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내 입장에서 보면 고성 사람들의
주장은 단연코 억지 같기만 하다.
물론 내 주장은 빈포 사람들이 무조건 잘났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워낙 먹을 게 없는
고장이라 모두들 일찌기 외지로 나가서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발버둥을 친 결과이지 고성 사람 덕은
아니라는 것이다.
"고성"만해도 포구와 어장이 넓은 것은 물론이고, 농토도 넓어서 "시설 재배 농가"라고, 대형 유리 온실로
성공한 사람도 많고 요즈음은 "공룡 해양 박물관"도 만드는 등, 돈 먹을 구석이 많다.
또 인근의 삼천포나 남해 만해도 어장이나 농토가 넓고 많아서 빈포와는 사정이 다른 부자 동네인데,
빈포 만은 정말 보잘 것 없이 빈약한 포구이다.
빈포 초등학교를 나와서 무작정 상경한 나는 마침 숙식도 제공되고 이용과 면도와 안마 기술도 배울 수
있는 삼각지의 어떤 이용 업소에 고용이 되어서 인생 타락이나 큰 고생을 겪지 않으면서도 밥을 먹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참으로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제 머지않아 오십을 바라보는 우리 동기들 중에서 출세한 녀석들을 살펴보면 돈이 많기로는 부페 식당을
하는 사장도 있고 동대문에서 포목 장사를 하는 여자 동기도 있다.
돈놀이를 하는 여자 동기도 둘 정도 있었는데, 하나는 돈이 많아서 돈을 늘리는 방편으로 여유있게 운영을
하였고 다른 하나는 어렵사리 일수 장사를 하는 동기였다.
권력기관으로는 고시에 합격한 검사든가 판사든가 하여간 그런 친구도 있고 잘 나타나지 않는 행정직으로
좀 높은 공무원들도 몇 있다..
고시에 합격하여 판검사 중의 하나가 된 녀석은 대학교 학벌이 별로라서 그런가, 이웃 고성 사람들 빽을
끌어다 써보아도 항상 지방으로만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있었고 이래저래 동기회에도 나오지 않다보니
동기들을 우습게 여기는 꼴이 되어서 평이 좋지 않다.
그 외에도 돈을 만지는 동기들로는 부동산 소개업을 하는 친구 서넛이 잘나가고, 북창동과 송파에서
회칼로 주방장하는 친구가 둘, 젊은 여자 아이들 홀딱 쇼가 전문이라는 대형 술집에서 지배인을 하는,
그 쪽으로는 지위가 높은 녀석도 하나 있다.
그는 원래 술집 밖에서 삐끼로 출발하여 술집 안으로 들어가더니 화장실에서 향수 뿌려주는 직책도 거치고
"멤바 씨"할 때 능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지배인이라는 높은 지위를 확보한 모양이었다.
동기회가 열리면 노는 순서의 마지막으로 그의 업소에 가서 양주도 대접받고 춤을 추는데 남대문 시장에서
일수 찍는 춘희가 그렇게 스텝을 잘 밟는 줄을 동기들이 처음 알게 한 공로도 그가 세웠다.
춘희하고 춤을 추면 모두 오금이 저려온다고 하는데, 춤을 잘 못 추는 내게 그녀와 스텝을 밟을 기회는
별로 찾아오지 않았고 한 두 번 그런 기회가 있었어도 나는 오금을 저리지 않았다.
내가 그런 면에 쑥맥인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그녀가 이발관하는 나를 깔보면서 무드를 잡아주지 않는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똑 같이 칼을 잡고 먹고사는 동기들인데, 회 칼 쓰는 동기 둘은 춘희와 뺑뺑이를 돌며 오금이 저려 와서
혼이 났다고 자랑이 대단했다.
하지만 면도칼을 잡은 나는 그런 근처에도 못가 봤으니 확실히 "칼"이 문제가 아니라 "칼집"이 칼을 차별
대우한 탓이 아니었겠나 싶다.
이발 가위와 면도칼로 서울 생활 30년을 먹고 산 내 통밥으로 계산 해봐도 그건 칼집의 칼 차별, 아니
사람 차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실 남자는 모두 칼을 하나씩 차고 있지만, 나와 주방장하는 동기는
칼을 두 개나 갖춘 사람인데 나에 대한 칼집, 춘희의 대접은 종내 섭섭하다.
아, 칼 차고 칼집으로부터 차별 대우 받는 동기가 또 하나 있다. 어쩌다 우리 깡촌에서도 대학 교수가
하나 나왔는데 국문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게 우리말을 가르치는 일인지 그 이상으로 무얼 하는지는 내가 잘 모른다. 초등학교 때 보면 이 친구는
공부 시간에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으나 몸이 어째 좀 부실한 편이었다.
그러니 체육시간, 씨름으로 맨 날 시간을 채운 체육 시간이 되면 이 친구는 모두의 밥이었다.
이 버썩 마르고 키만 큰 녀석은 키가 작고 몸이 왜소한 친구들도 감당해내지 못하고 씨름이 붙으면
댓바람에 벌러덩 나자빠지는 것이었다.
다른 재주가 없으니 공부만 하다가 어째 대학에서 선생을 한다니 학식도 많고 인격도 높은 것은 사실인
모양인데 사는 곳도 시원치 않았고 노는 꼴은 더 시원치 않았다. 담배는 줄담배이고 술도 잘 마시는데
춤은 잼병이고 말도 더듬는다.
때로 남녀 동기들이 폭탄주를 마시고 "야자 타임"을 만들어서 말도 막놓고 장난이지만 진한 장면을
만들기도 하는데 이 친구만 몸을 빼고 도망을 가니 여자 동기들이 재미가 있어서 죽어라고 쫓아가지만
부실한 녀석이 그럴 때 만은 행동이 잽싸서 거의 붙들리지를 않는다.
그래도 판사인지 검사인지 하는 녀석처럼 시 건방을 떨거나 몸을 사리지는 않고 동기회 때에도 가끔
빠지기는 해도 열심히 나오는 게 신기하고 고마웠다. 돈도 별로 없는 녀석이 말이다.
하여간 이 친구 역시 춘희와 춤을 억지로 춰보았지만 아무런 느낌을 주지 않더라고 시답잖게 이야기한
적이 있다. 아무래도 춘희가 몸을 붙여주지 않았거나 이 녀석이 하체인지, 하초인지가 부실하여 뒤로
엉덩이를 뺐는지도 모를 일이다.
남녀 동기들은 오래 전부터 친목계를 하였다. 처음에는 문자 그대로 좁쌀처럼 적은 액수의 계금이 모여서
돈 쓸 동기에게 은행보다는 조금 비싸지만 무슨 담보 같은 것 없이 쉽게 빌려주었고 그러다 보니 쉽게
돈이 불어났다.
금융실명제가 시작되던 해에는 예금주 문제로 한동안 옥신각신했으나 그것도 단체를 예금 주체로 하는
규정이 생기면서 잘 해결이 되었다.
돈을 굴리는 책임은 당연히 남대문에서 일수를 찍는 춘희가 맡았고 처음에는 동기들에게만 빌려주던 돈이,
나중에는 보다 높은 이자로 얼굴도 모르는 시장 상인들에게 대출이 되기 시작하였다.
나도 처음에는 그 돈을 좀 썼다.
내가 밥을 얻어먹으며 기술을 배우고 잔뼈가 굵은 이용원 사장님이 갑자기 돌아 가셨을 때, 나는 참으로
내 몸둥아리라도 팔고 싶은 절박한 심정으로돈을 모아서 그 가게를 샀다.
그때 동기회 기금은 은행의 신용을 대기 힘든 내게 참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초등학교 동기회 기금이야 대수롭지 않았지만, 우리보다 나이 많은 선배들과 결혼하여 자리를 잡은
여자 동기들이 자기들끼리 만든 곗돈은 꽤 어지간했다.
초등학교 우리 선배들이란 모두 군사정부 시절에 한 자리를 차지한 사람들이었다.
그 선배들이나 옆 쪽 고성 사람들의 마누라가 된 여자동기들이라 씀씀이도 컸고 돈의 단위도 우리하고는
사뭇 달랐다.
내가 남들은 "퇴폐 이발관"이라고 부르는 "건강 휴식 이용원"을 삼각지에 차리며 점차 영업을 확장할
때에도 여자 동기들의 곗돈 기금은 크게 요긴하였다.
요즈음 이라면 나도 집과 가게를 담보로 하여 은행 융자를 받을 수 있으나 그때만 해도 은행 문턱은 높고
내 재산은 신용이 되지 않았다.
맨 날 외제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남한 천지의 도로는 모르는 데가 없고 장안의 이름난 고급 식당의 음식
맛에도 이골이 난 "길순 이"라는 별명의 여자 동기는 개인적으로도 당시 돈을 많이 꾸어주었다.
위험하지 않겠냐고 길순 이를 위하는 척, 만류하면서 따리를 붙인 동기들이 서넛 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길순 이의 투자 포인트는 간단명료하였다.
"까짓거 퇴폐고 뭐고 썩는 물건 장사도 아니고---. 단속 있을 때만 숨을 죽이면 독버섯처럼 또 솟아나는
장사니까---."
"투자 포인트"니 "간단명료"니 하는 고급 말을 섞어서 길순 이가 나에게 직접 해 준 말이었다.
내가 무식해도 그녀가 해 준 설명의 내용이 내게 좀 섭섭하다는 것은 알아차렸지만 어쩔 수가 없었고,
그런 막가는 말을 터놓고 하는 것이 나를 믿는다는 사실과 돈 떼먹을 궁리는 하지 말라고 침을 놓는
방침처럼 들렸다.
학교 다닐 때의 기억으로는 별 볼일이 없이 코만 훌쩍거리더니 돈을 많이 번 선배에게 시집을 가더니
기집애가 교양이 많이 붙었다.
하여간 나는 그런 돈으로 이발관 뒤편의 헌집까지 사 넣어서 휴식 별관, 남들 말로하면 퇴폐 밀실을
차려서 재미를 많이 보았다.
길순 이가 차량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에도, 나는 차용증서 하나 없이 빌렸던 돈을 반이나
갚아주었다.
반이나 갚은 돈의 액수를 새삼 따져보니 이자는 치지 않은 원금 기준이긴 하였지만 어쨌든 나 같은
사람도 서울 장안에는 없을 것이다. 나는 의리를 생명처럼, 아니 생명까지는 몰라도 하여간 참으로
중히 여기는 사람이다.
보라, 서울에서의 세상살이가 순 날 도적 짓거리 같은 것을---.
내가 삼각지에서 "건강 휴식 이용원"을 열고 피로한 우리 이웃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업소의 뒷골목
주위에는 유명한 "대구탕" 집들이 즐비한데, 이삼십년씩 해 온 전문 음식점들이 그저 "원 집"이니
"원 대구탕" 정도로 이름을 붙이고 지내왔는데, 어느 날 이 바닥에서는 생판 얼굴도 보지 못했던 어떤
인간이 들어와서 간판을 "진짜 순 원조 생 대구탕 집"이라고 붙여놓고 식당을 여는 것이 아닌가.
이게 순 생 어거 지 상술이었지만 그 이후에 "골목 원조 대구탕 집"이 생기더니 "한국 원조"도 생겼고
"대한 원조", 마침내 "조선 원조 대구탕" 집까지 생겨나는 판이었다.
길순 이의 사고는 빈포 초등학교 동기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모두들 서울 와서 죽자 살자 앞만 보고
달리며 만나기만 하면 모두 성공담이고 돈 번 이야기, 또 돈 벌 궁리와 계획들로 가득하였던 분위기에
일단 찬물을 끼얹는 계기가 되었고 아무리 잘 나가는 사람이나 사업도 "달이 차면 기우는" 이치가 있다는
것을 잠시나마 생각케 해주었다.
그러나 빈포 사람들이 누군가---. 잘나서가 아니라 못 먹어서 상경한 악바리들이 아니던가.
교수 친구 말마따나 인생사, 세상사를 "철학적으로 사유한" 시간도 잠시 잠깐이었고 억척스런 생활력과
성공을 향한 행진은 금방 제 자리를 다시 차지하였다.
사람이란 길순 이 처럼 반죽음 상태로 숨을 붙여가야 할 수도 있고 모두에게 언젠가는 반드시 죽음이
온다는 거룩한 생각 같은 것은 잘 사는 동네를 고향으로 가진 사람들의 배부르고 허튼 수작 같기만
하였다.
우리 고향, 바닷가 빈포 사람들의 깡다구 기질이 모두 그랬다.
국문학 교수하는 내 친구는 한 달이면 두어 차례 이 곳 삼각지를 찾아왔다.
내가 운영하는 이용원에서 건강 마사지를 받으러 오는 것은 아니고 그때만 해도 교보 같은 데에서 양서를
쉽고 싸게 구하기 어려운 처지에 여러 가지 화보와 영상자료라는 것을 구하러 온 것이었다.
삼각지에는 8군내의 매릴랜드 대학이나 군인, 군속을 위한 도서관에서 나오는 철지난 양서를 구해다 파는
책방들이 그때만 해도 간판을 걸지 않고 두어 집 있었다.
때로 미군과 사는 여인들이 펜트하우스나 스웜프나 플레이보이 지를 내다 팔기도 했었다.
“국문학에 무슨 서양 것들 벌거벗은 화보가 필요하냐?"
내가 비아냥거렸더니 그는 무슨 "영상 콘텐츠 개론"인가 하는 책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지은이는 내 친구, 국문학 교수의 이름이었는데 영화와 영상 광고, 비디오 아트, 영상 콘텐츠 등등 무슨
소리인지도 모르는 내용을 잔뜩 늘어놓고 자기 이름을 붙여놓은 책이었다. 여기 고본 점에서 거저
줏다시피 한 그림이나 사진을 잔뜩 늘어놓고 거기에 무슨 알기도 힘든 글들을 주절주절 달아놓은 책을
거룩한 이름으로 내놓았으니 대학 교수가 책 쓴다는 것도 알고 보니 조금 우습기는 하였다.
교수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이 녀석이 써 놓은 글은 특별히 알지도 못하는 새로운 말들이 많았고
그 뜻은 더욱 이해가 어려웠다.
거기에다가 말까지도 조금 더듬는 품새라서 처음 대하면 대체로 사람이 무식하고 모자라 보이기조차
하였다.
그렇지만 사람 됨됨이, 그러니까 뭣이냐 하면 인격적으로는 점잖고 높은 데가 있었다.
놈들이 이리로 오면 모두 내가 권하는 데로 건강 마사지를 꼭 즐기고 가는데 그만은 결코 그러지 않았다.
"너 고자냐?"
언젠가 내가 놀렸더니 "이 친구야, 내가 자식이 둘이나 되는데---." 이러고는 허허 웃는 것이었다.
내가 이 영업으로 밥을 먹고 돈을 벌지만 이런데 오는 놈들은 경멸하며 살고 있다.
그는 국문학 교수치고는 영어를 참 잘하였다. 우리 이용업소에는 여자 면도사들이 항상 들락날락한다.
미군 GI들 중에는 우리 업소 단골들이 꽤 있었는데 엄밀히 따지면 믈론 복무 규정 위반에 속하였다.
지금은 그런 일이 절대 관용되지 않았으나 그래도 전에는 이럭저럭 넘어갔고 그 때 인연 맺은
면도사들이 미국으로 국제결혼이나 위장 결혼으로 많이 넘어갔다.
그 수속을 대행해주는 업소가 삼각지에 많았지만 그는 무료로 그런 서류를 대필해 주기도 하였다.
책 사는 일과 대필 봉사 등으로 그는 내 업소에 자주 드나들었다.
그런 어느 날 내 이용원에서 그는 춘희를 만났다. 전에도 정기 모임이나 신년회, 망년회 등의 특별
모임에서 두 사람이 만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교수하는 이 친구는 빠지는 경우도 많았는데, 아무튼
이렇게 세 사람이 만난 건 처음 일이었다.
내가 건강 이용원을 더 확장하기 위하여 그녀로 부터 또 돈을 빌리던 참이었다.
그녀는 길순 이와는 달리 돈 계산이 명확하였다.
항상 빌려간 사람의 인감도장을 받아두었다.
그리고 전체 대출 규모를 꼼꼼하게 정리하여 적어놓은 장부책이 또 하나 따로 있었다.
"이게 복식 부기로 치면 원장이고, 또 이건 분개장이야."
그녀가 언젠가 장부를 흔들며 설명했으나 내겐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예전에 주산-부기 학원을 다닌 그녀의 경리 실력은 보통이 아니라고들 하였다.
그녀는 그렇게 꼼꼼했으나 담보를 잡는 기색은 없었다.
담보 설정 비용이 많이 들어서 영세한 사람들에게는 배보다 배꼽이 크기도하고 사실 담보 잡을 물건이
마땅하게 있는 사람들이 자기에게서 돈을 빌리겠냐고 하였다.
"일수쟁이는 매일 매일 돈 빌려간 사람의 면상에서 인상만 쓰고 있으면 되는기라. 내가 매일 억지로
만드는 우거지 상판을 보고 돈 빌려간 장사치들이 일수를 안 찍을 수 있어?"
그런 악바리가 춘희였다.
남편과는 이혼이라고도 하고 사별이라고도 하는데 하여간 혼자 사는 것만은 확실하였다.
그건 어쨌건 일수 찍는 전문가이다 보니 춘희는 동기회 기금도 관리하고 있었다.
직함은 총무던가 무슨 재무이사던가 그런 거창한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학교 다닐 때 반장이니 급장이니 하는 것도 종내 아무 짝에도 쓸 데가 없는 것 같다.
학교 다닐 때의 춘희는 정말 코나 찔찔 흘려서 별명이 ‘코찔찔’이었다.
아무튼 이날은 우리 이용원에서 셋이 모처럼 만나다 보니 분위기가 좋았다.
마침 시간도 어중간 하여서 손님도 없었다.
"야, 네가 우리 동기회의 헤게머니를 잡고 있구나."
국문학 교수가 웃으면서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인데?"
그녀가 진정 궁금한 기색으로 물어보았다.
"패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소리야."
"패권은 또 무슨 소리고?"
나도 궁금증이 생겨서 물어보았다.
"춘희가 동기회 재무이사라면서---. 돈을 만지는 사람이 제일 힘이 세다는 뜻이야."
그가 궁리 끝에 쉽게 설명을 해 주었다. 그렇게 설명을 하니 나도 간단하게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춘희도 금방 감이 오는 모양이었다.
"오라, 내가 회계를 맡으니까 힘이 세다--- 그런 말이구나. 회계 머니에서 나온 말이구나. 영어도 알고
보면 우리말과 비슷한 게 많아. 깡통은 캔이잖니.
그건 그렇고 나는 회계머니를 꽉 잡고 있는데, 교수님께서는 하체가 그렇게 부실해서 어디다 써먹니.
나는 그 방면에도 회계머니를 꽉 잡고 있단다, 호호호."
춘희는 가만히 보니 사실은 머리가 좋아서 서울말도 잘 썼고 필요할 때에는 정말 애교도 만점이었다.
다만 사람 차별이 좀 심해서 탈이지, 제 마음에 들어서 괜찮다 싶거나 필요가 있다 싶으면 그녀가 몸까지도
헤프게 쓴다는 소리를 나는 우리 이용원의 면도사로 부터 듣고 있었다.
우리 면도 사들도 여럿 그녀로부터 돈을 빌려서 일수를 찍고 있었다.
모두 미국으로 진출하려는 꿈을 가진 아가씨들이었다. 우리 이용원의 면도 사 아가씨 중의 한 사람이
"대한 면도사 모임"의 회계를 맡고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으니 그녀도 회계머니를 쥐고 있단 말인지
모르겠다.
그녀들은 면도사 모임을 "면모"라고 하였다. 예전에는 면도를 면모(面貌)라고 했다면서 사실은 유서 깊은
이름이라고도 하였다.
"교수님, 면도를 면모라고도 했다면서요?"
복장이 야한 우리 면도사가 애교를 떨며 국문힉 교수에게 물어보았다.
"아, 맞습니다. 그게 일제 강점기부터, 그러니까 해방 전에 쓰던 일본어가 아닌가 싶지만 하여간
사실입니다."
그의 말은 진지하였고 두 사람간의 간격은 이 때 아주 좁았다.
"에잇!"
두 사람이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바로 그때 춘희가 무슨 마음이 들었는지 그 사이를 비집고 들더니
국문학 교수의 급소를 손으로 콱 잡았다. 아니 무슨 마음이 아니라, '그 마음이 그 마음임'을 나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코찔찔이 때부터 춘희는 그에게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걸 표현하지 못하다가 면도사와 속삭이는
그에게
그런 식으로 덤벼 든 것임을 나는 금방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나중에라도 문제가 되면 우리 빈포 초등
학교의 평소 분위기라는 핑계가 해결사 노릇을 해 줄 것이었다.
춘희는 그 계산도 있었을 것이다.
"물건이 시원치않구만, 이게 뭐야?!"
그녀가 비아냥거리며 급소를 계속 잡고 있는데 국문학 교수가 엉겁결에 그녀를 확 밀쳤다.그건 또 그가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그녀는 건너편 이발대 위에 머리를 찧으며 벌러덩 나자빠졌다.
그러나 큰일은 없었다.
머리에는 상처 하나 피 한 방울도 나지 않았다.
교수는 사과를 했고 회계머니, 춘희는 한동안 정신을 못 차리더니 자기가 먼저 한 짓거리가 있어서
낄낄거리며 너그러이 용서하였다.
우리는 "원 대구탕" 집에 가서 미나라를 많이 넣은 탕을 먹고 낮술도 한잔씩 했다.
그녀는 우리 둘에게 앞으로는 좀 더 잘 해 보자고 말하며 보드라운 손으로 연신 교수의 허벅지를
쓰다듬었고 그도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있었다.
실로 반평생 만에 이루어지는 춘희의 꿈이었다.
"됐다 됐어, 그만 만져라, 반 분은 풀렸겠다."
보드라운 손과 마른 허벅지 사이에 내가 개입하고 참견하였다.
"사실 난 콤플렉스가 많아."
춘희가 말하였다.
"그게 무슨 말인데?"
내가 물었다.
"그건, 그건---."
춘희가 더듬거렸다.
"속으로 시 셈이 많다는 거야."
교수가 간단명료하게 설명해 주었으나 나도 눈치와 교양이 있지, 아무래도 직접적 설명이라기보다는
춘희의 얼굴을 살려주는 말 같았다.
"그래, 그래. 우리 교수님께는 옛날부터 내가 공부 때문에 셈이 많이 나서 항상 거칠게 나갔고, 그리고
주인 너 말이야. 넌 천하에 공부도 못하던 녀석이 돈만 잘 벌고 면도 사 아가씨들을 바꿔가며 꿰차더니
마침내 예쁜 마누라도 잘 얻어서 내가 또 너한테도 셈이 난거야, 호호호. 앞으로는 우리 정말 잘해보자."
그러면서 그녀는 소주를 한 병이나 다 비우고 휘청거리며 먼저 나갔다.
한 달 후에 그녀는 전화를 걸어서 이자를 온라인으로 넣으라고 계좌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녀가 발품을 직접 팔지 않고 그런 식으로 결재를 하라고 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동기회원 자격으로 동기회 돈을 썼으므로 일수를 찍지 않고 월별 계산이었다.
"직접 오지 않고---, 어디 아프냐?"
내 말에 그녀는 "우리 나이의 여자가 다 그렇지 뭐-."하였으나 음성이 좋지는 않게 들렸다.
"지난번 탓은 아니겠지?"
내가 다시 근심하였다.
"아니야, 내가 평소 혈압이 좀 있어. 그런 말 아무에게도 하지 마, 영업에 지장이 있으니까.
그리고 특히 교수에게는 절대로 말하지 마. 그 어리버리한 녀석이 큰 걱정할거야. 아무 일 없어. 돈이나
제대로 넣어라."
그리고 나서 한 달이 채 못 되어서 회계머니, 춘희는 갑자기 숨을 거두었다.
심장마비라고 하였다.
삼각지에서 남대문 시장에 이르는 뒷골목 상가에는 때아닌 연쇄 소동이 벌어졌다.
그녀가 닳고 닳도록 애지중지한 장부책인가 치부책인가 하는 걸로는 회계를 종잡을 수가 없어서,
춘희가 이끌어간 돈 세계에는 갑자기 일대 파란이 오고 말았다.
누구는 "공황"이라고도 했고 누구는 IMF라고도 했다. 빌린 돈이 많은 나까지도 춘희의 죽음은 충격과
슬픔이었고 정말 조금도 기쁘거나 다행스런 마음이 나지를 않았다.
길순 이가 식물인간이 되었을 때만해도 솔직히 돈 계산이 앞섰던 내가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프고
답답하고 절망감이 생겼는지 모를 일이었다.
길순 이는 아직 명줄이 붙어있어서 내 가슴이 덜 아프단 말인가.
춘희는 살아 온 모양이 길순 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아서 이토록 가슴이 아프고 그렇단 말인가---.
사실 그녀가 쓰러지자마자 어렵게 꾸려나간 그녀의 집안 살림은 완전히 거덜 난 시점이 되었고,
동기회의 살림도 동시에 박살이 났다.
남녀 동기가 조금씩 힘을 합쳐서 동기회 기금으로 모은 돈은 별게 아니었으나 여자 동기들이 따로
만든 기금과 개인적으로 돈놀이로 맡긴 액수는 대단했는데 그 돈은 춘희의 수중이나 그 집 안에 있는 게
아니라 모두 대출이 되어 한 푼도 남아있지 않았다고 한다. 빌려준 사람들은 난리를 쳤고 빌려간 사람들은
나를 포함하여 종적이 없었다.
돈 관계 처리가 깔끔한 춘희가 빌려 간 사람들의 인감도장까지 받아놓은 대출 확인증 파일이 있었으나
모두 실제로는 돈을 이미 갚았다고 오리발을 내밀었고 채권자들이 죽은 사람의 장부를 빌미로 채무자들로
부터 돈을 받아낼 법적 장치도 없었다.
그렇다고 동기들이 나설 계제도 아니었다.
춘희와 그렇게 밀착하여 춤을 추었다는 녀석들도 아는 게 하나도 없었다.
그저 피붙이라고는 딸 아이 하나가 있다는 이야기가 동기들에게 전해진 유일한 정보였다.
병원의 장례식장에는 동기들이 많이 문상을 와서 날밤도 세웠으나 남대문 시장의 상인들이라고 하는
낯모르는 사람들이 몇 십 배 더 많았고 오고가는 말은 모두 일수 돈에 얽힌 이야기뿐이었다.
시장 사람들 사이에 때로 고성이 오가기도 했으나 가장도 없이 춘희의 가족이라고 나와 있는 초라한
여고생 하나를 보고는 모두 말문을 닫고 말았다.
국문학 교수하는 내 친구는 끝내 문상을 오지 않더니 발인하는 날에야 새벽같이 나타나서 나와 동기생
몇 사람과 함께 벽제 화장장에는 같이 갔다. 그의 얼굴은 초췌하였고 입에서는 술 냄새가 펑펑 났다.
"자네 어디 갔다 이제 왔어? 술을 밤새 마신 것 같네?"
내가 나무랐더니 그가 중얼거렸다.
"그 때 머리에 상처가 나고 피라도 흘렸어야 뒤탈이 없는 건데---. 멀쩡했던 게 화근이었나 봐. 엉엉엉."
"쉬잇!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아, 두 달도 더 전 일이야!"
내가 낮은 목소리로 얼른 야단을 쳤다.
"딴 소리 말고 대학에 있으니 저기 상주인 여학생이나 앞으로 잘 건사할 방도를 연구 해봐라!"
돈이 없는 상가라서 상주인 여고생도 따로 차를 마련치 못하고 장의차 앞 쪽에 함께 타고 있었으나
선 문답 같은 어른 둘의 이야기에 다행인지 뭔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춘희는 마침내 한 줄기 연기와 한 줌의 재로 사라지고 우리는 재 항아리와 위패를 모시는 흥국사까지
따라갔다.
그래도 남대문 상가의 상조회 사람들이 장례 일을 성의껏 추려나가고 있었다.
교외에 있는 절에 도착해보니 천도제를 지내기 전에 고인의 유품을 태우는 의식이 있었다.
여고생이 몇 가지 의류와 신발을 불길에 집어넣더니 마지막으로 채권자들에게서 뺏다시피 찾아온
핸드백과 그 속의 낡은 장부책을 울면서 던져 넣고 있었다.
그때 분개장이라고 했던가, 빌려간 사람들의 인감이 찍힌 확인서는 경찰에서 갖고 가고, 원장이라고
불렀던가 하는 핸드백 속에 남아있던 장부책은 깡촌에서 올라온 춘희가 천만이 넘게 사는 이 거대
도시에서 평생을 버티고 살아온 족보이며 이력이었다.
“잠깐만 보자!"
내 친구인 교수가 여고생의 손에 있는 그 장부책을 잠시 붙들었다. 그는 설렁설렁 페이지를 넘겨보더니
또다시 왈칵 눈물을 흘리며 여고생 상주와 함께 힘껏 불속으로 그 장부책을 집어던졌다.
나도 그 광경을 바로 옆에서 보며 눈물이 왈칵 솟았다.
"저 친구도 돈을 빌려주었나?"
누가 뒤에서 궁시렁 거렸으나 결코 그런 사정이 아니었다.
우리의 시선이 합일 된 곳은 장부책의 표지였다.
"원장"이라는 두 글자가 빛바래 흐릿한 바로 그 위에는 최근에 다시 쓴 듯 비뚤거리는 필체로 네 글자가
선명하게 있었다.
"회계머니",
바로 그 네 글자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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