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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사 대학에서의 단상

원평재 2009. 12. 8. 05:12

아침에 인천 국제 공항을 떠난 비행기는 점심 한그릇을 비운 사이 간사이 국제 공항에 도착하였다.

여장을 풀 일도 없이 교도로 달려가니 동지사 대학에는 한국학 관계 교수와 연구원들,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정지용 세미나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정지용의 고향분들이 지용에 관한 주제를 일차적으로 부각하는 행사로 마련하였으나

바로 곁에 서있는 윤동주의 시비를 외면할 이유나 제한은 없었다.

두 시인 모두 일제 강점기의 식민지 문인으로서의 아픔을 견디다가 한분은 그 시대의 마지막

마루타 인체 실험의 대상으로 스러져 갔고,

또 한분은 광복을 맞았으나 민족 상잔 속에 북으로 끌려갔다가 평양 교도소에서 미군의 폭격에

폭사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한동안 윤동주는 창시개명 때문에, 지용은 자진 월북이라는 오해 속에서 민족의 외면이나 폄하와

금서의 목록에도 들어갔었으나 아이러니컬 하게도 일본 땅과 멀리 간도 지방에서는 활발한

연구가 지속되었다.

교도로 들어가는 길목의 육교 난간에서 침통한 표정으로 휴대폰을 부여잡고 난간에 기댄

어느 일본인 젊은이의 모습이 이날 내 가슴의 기호학이었다.

 

 

  

 

  

 

 

 

   

 기내식 점심 한그릇 먹으면 도달할 정도로 가찹게 상거한 이 곳 일본, 동지사 대학의 교정에는

우리가 지난달 말쯤 쓸어낸 은행나무 단풍이 아직도 정

말 제 그림자만큼 둘레에 그 노란잎을 떨구고는 우리를 맞고 있었다.

화가날 정도로 내 심성은 피폐해갔으나 핑그르르 눈물 짓는 것으로 통과의례를 마치고

대인의 풍모를 되찾았다.

 

 

 

 

이번 주제는 한국 지식인의 일본체험과 그 반응이라는 큰 명제 아래 몇가지 담론이 이어졌다.

동지사 대학 Imadegawa Campus의 지성관 3번 교실에서였다.

제1부로는 시비 헌화제 및 환영사가 있었고

제2부 작품 낭송 순서로는 김중위 전 장관, 김월준, 이혜선, 박부경 시인등이 나섰으며

제3부 세미나 순서에서는 식민지 한국 문인의 일본 체험(水野直樹) 토론 강정화 시인

         정지용 동지사 출신 문인(양왕용 부산대 교수) 토론 조헌호 시인

          Diaspora의 혼, 윤동주 (오양호 인천대 명예교수) 토론 정남순 시인

등이 깊이있는 논문을 발표하고 열띈 토론이 오고갔다.

 

친일 부분에서는 다른 자리에서 내가 몇마디 거들었다.

소명되었다시피 윤동주의 창씨 개명은 일본 유학을 위한 여권 준비상

부득이하였고 그 자신도 이 부분에 대하여 잎새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고

평소의 애국하는 태도가 일경의 미움을 사서 마침내 예비검속 끝에

순국하게 되었다.

정지용의 경우는 일본어로 쓰여진 많은 작품들이 있었고

어떤 단편에서는 일본에 와서 일용잡급직으로 일하는 동포들을

부끄럽게 보는 듯한 구절도 보인다.

하지만 조셉 콘래드가 우크라이나로 유배된 폴랜드 독립 투사의 아들로 태어나서

고난참담의 선원 노릇끝에 마침내 영국의 작가가 되고 영어로 글을 쓰고

영국 출신의 아름다운 부인을 맞아서 성씨도 영국식으로 바꾸고

행복한 만년을 살았다고 폴랜드 사람들이 시비를 건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없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다.

 

 

 

 

젊은이들의 모습은 어디나 같은가.

신종 플루의 현상도 비슷한가보다.

  

 

책을 낀 저 교수와 제자들이 행복하게 걸어가는 작은 공간에 지용의 시비가 빠꼼히 보인다. 

 

 

 

 

  

 인문학과 학생들이 지나가고도 지용과 윤동주의 시비는 시시비비하지 않고 그냥 서 있었다.

보는 눈시울이 젖어왔고 가슴이 먹먹하였다.

 

  

 

 

국제 세미나장을 잠시 버리고 '호올로' 강의실을 기웃거려 보았다.

 

 

 

 

 

여기가 어디인가,

위의 사진은 동지사 대 앞을 흐르는 압천이다.

정지용이 김말봉과 이곳을 거닐었던 흔적도 보인다.

이들은 끝내 결합하지 못하였다.

아래는 윤동주가 붙들려가서 마침내 마루타 실험의 제물이 된 카모가와 경찰서이다.

지금도 건재하여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고 있다. 

 

 

 

 

 

 이건 또 무언가

홈리스들의 잠자리라고 한다.

사회보장 제도가 있는 일본에서의 홈리스들은 돈 문제 때문이 아니라

간섭받기가 싫어서 이렇게 노숙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머문 호텔 인근에는 해양 박물관 건물이 아름답게 서 있었다. 

 

 

 

 

 

 돌아오는 날은 오사카  성을 보러갔다.

기어코 비가 내렸다.

거리에 내리는 비는 내 마음에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울적함이

비가 되어 내리는듯 하였다.

나중에 들으니 일본도 영국처럼 비가 이렇게 많이 질금거린다고 하였다.

그래서 금수강산을 탐하였나---.

 

  

 

 

 

 

 

연말에 참석할 곳이 많아서 몇자 끄적거려 가려고 새벽같이 일어났다가

또 여기 붙들렸다.

큰 일이 났다.

 

(오늘 리포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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