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포토 에세이, 포엠 플러스

어떤 인터뷰

원평재 2010. 4. 9. 22:46

 

계간 문예지, <문학 마을> 봄호는 이미 3월초에 발간된 바 있다.

책이 서점가에 배포된지 한달 여가 지났기에 여기에 소개한다.

이번 호는 시 특집으로 기획된 일종의 <시집>과 같은 성격이었다.

2010년도에 높은 평가를 받은 좋은 시 105편이 수록되어있다.

 

이번 호가 시 특집이긴 하지만 매번 소개하는 "게릴라 인터뷰" 기사는 빠지지 않았다.

이번에는 멀리 LA에서 약업을 크게하며 그 동안 지역의 교포 문화 창달을 위하여 애써온

배기호 원장과의 대담 기사를 실었다.

 

아울러 배 원장의 학창 시절의 배경이 되는 서울의 대학로도 함께 찾아보았다.

40년 세월 동안 엄청나게 변형된 오늘날의 대학로 문화 속에서

과거를 회상하며 깊은 상념에 빠진 주인공의 모습을 담아보았다.

 

배기호 원장은 벌써 오래전(2007년 5월)에 가족사 팩션에 해당하는

<약방집 예배당>을 홍성사에서 발간 하였는데

그간 영문 번역판을 다시 냈고

지금은 중국어 판이 거의 완성단계에 있다고한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자신의 유학, 이민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족사를 소설의 형태로 거의 완성 단계에 있다고 한다.

 

우선 <문학과 의식> 봄호에 나온 대담 기사를 여기에 실어본다.

아울러 대학로의 이른 봄 풍정도 함께하였다.

 

 

 

 

 

 

 

 

자신의 초기 이민 생활의 어려움을 상기하여 혜화동 필리핀 장을 꼭 보고싶어 하였다.

 

  

 

 

 

  

 

동반자인 나도 그 거리에 서보았다.

 

 

 

 

 

 

  

 

 

  

 

 

 

 

  

 

  

 

  

  

 

 

  

배 원장 인터뷰 기사

 

일시; 2010년 2월 7일

 

장소; 경복궁 앞 서머셋 호텔

대담자; 김 유 조 (문학과 의식 운영위원장)

 

LA 인근 오렌지카운티에서 대형약국을 경영하는 배기호 원장은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한

코리안 아메리칸 중의 한 사람이다.

한국에서 약대를 나온 그는 병역을 마치고 40여 년 전 도미 유학을 하여 인디애너 대학원에서 약학을

전공한 다음, 디즈니랜드 바로 옆 애너하임에 정착하여 약국을 개원하였다.

 

미국 대형 병원의 의약 분업 시스템과 의료 보험제도, 연방 정부의 메디 케어, 메디 케이드 등의

제도에 일찍부터 적극 참여하여 그는 큰돈도 벌고 미국 주류사회 및 교민 사회에도 크게 기여하여

왔다.

대외적인 성공뿐만 아니라 가족적으로도 많은 성취를 이루어서 큰 아들네는 의사부부, 둘째 아들네는

약사부부로 미국 사회의 중추역할을 담당하도록 성장 시켰다.

 

이제 개인적인 성취가 끝날 때 쯤, 그는 선친 조상들이 한국 기독교 전래사에서 차지한 큰 역할과

특히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도 옥사, 순국으로 나라를 위하여 희생을 한 역사적 자료를 찾아

헤매었다.

국내 방방곡곡과 중국의 여러 곳을 찾아다니기 시작하자 후손의 노력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분들의

숭고한 족적, 뼈아픈 희생의 기록들이 영웅 담론처럼 이곳저곳에서 떠올랐다.

이런 자료를 근거로 선조들을 국립 현충원에 안장한 배기호는 고생 끝에 발굴해낸 선대의 자료들이

개인사적인 수준에 머물기 보다는 하나의 역사적 거대담론과 문학적 Saga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열망을 갖게 되었다.

 

자연과학도가 인문학적 영역을 탐하는 놀라운 착상이자 도전이었다. 인류가 20세기를 뒤로하고

이제 막 21세기로 진출하던 2000년 초였다.

그가 찾아낸 오랜 동안의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숭고한 역사를 문학적으로 엮어낼 집필자로는

먼저 세분의 후보자를 물색한 끝에 한국에서 등단하여 LA로 이주한 박경숙 작가가 최종 섭외

되었다.

지금은 벌써 이민 생활에도 이력이 난 셈이 되었지만, 당시 박 작가는 미주 문단에서 막 자리를

잡기 시작한, 신예 문학도였으나 이미 발표한 장단편의 선 굵은 문장이 배기호의 의지를 충족시켜

주고도 남을 듯싶었다.

 

물론 작품이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면서 작가와 주인공 사이에는 관점의 차이가 엄존하였다.

역사적 사실 구명(究明)과 나열 쪽에 배기호의 관심이 더 컸다면 문학적 서사 구조와 미학에

역점을 두는 작가의 고집은 대략 7년여 동안 정반합의 윈리 처럼 진행되었고 그 과정에서 훌륭한

이야기와 철학이 숙성되어 나왔다.

 

2007년도에 홍성사에서 <약방집 예배당>이라는 이름으로 출간된 이 가족사는 문단과 교계와

사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출판은 한 달 사이에 재판을 찍을 만큼 판매부수로도 성공적이었으며 그해 5월 19일 백범기념관에서

열린 출판 기념회도 성황이었다.

이야기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주역인 배기호는 이 역사적 가족 이야기를 영어와 중국어로도 번역

하여서 세상에 내 놓을 작정을 하고 있다.

영어판은 사실 벌써 출간이 되었다. 그러나 단순한 번역 수준이 아니라 불후의 명작으로서의 문학적

수준을 갈망하는 그로서는 일차 번역본이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런 평가를 내릴 수 있었던 데에는 미국에서 태어나고 미국에서 성장하여 의사와 약사가 된 두

아들의 조언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 결과 일차 시안으로 번역된 책은 미국에서 일단 발간은 되었으나 곧 수정판이 나올 예정이다.

중국어판은 지금 번역이 되고 있으나 영역판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보다 신중하게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러던 중에 약업과 관련된 비즈니스로 서울에 들린 그를 잠시 만났다.

 

--배기호 장로님 반갑습니다. 한때 국내외적으로 화제가 되었던 가족사 이야기, <약방집 예배당>이

나오고 백범 기념관에서 출판 기념회를 한지도 몇 해가 흘렀군요. 그때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번에는 영역 본, <Saga of the Pai Family>가 미국에서 얼마 전에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드리면서 근대사에서 6대에 걸친 배씨 가족사의 존재 의미, ‘래종 데트르’에 대한 집념에 다시한번

놀랄 따름입니다.

 

--감사하며 송구합니다. 제가 우리 배씨 가족사에 대한 집념을 갖는 것은 씨족이나 문중을 들고

나와서 무슨 세속적인 자랑이나 자기발현 욕구의 실현을 하자는 데에서 나온 것은 진정 아닙니다.

그저 공교롭게도 제 선대들께서 우리나라의 근대사, 특히 기독교와 새로운 문물의 전래 과정에서

선각을 하셔서 나름의 역할을 하셨고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 투쟁에 몸을 던져 헌신하신 기록이

연면하게 이어져오기에 후손으로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객관화 된

우리나라의 근대사로 보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겸손한 말씀입니다. 선대 분들의 살신성인하신 역사도 돋보이지만 그런 위업이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지 않고 만인의 귀감이 되도록 자료를 발굴하고 또한 객관적 고증을 받도록 한 후손의 노력과

집념이 놀라울 따름입니다.

또한 선대들의 활약상을 단지 무슨 공적조서를 나열하듯이 기록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작가의

필력으로 문학적 승화를 하게끔 착안한 점도 놀랍습니다.

 

--부끄러운 말씀입니다만 저는 항상 자연과학도임을 강조하면서도 어릴 때부터 문학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문학도임도 감추지 않습니다.

다만 세상을 살아오면서, 특히 신세계에서 아무의 도움도 없이 일가를 이루어 내느라고 문학의

꿈은 오래 접어두고 있었습니다만 가족사에 대한 집념과 자료 모으기는 30여년을 계속하였습니다.

때로 주위에서는 쓸데없는 데에 시간과 정열을 쏟는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만 그 노력의 결과,

선조들을 독립운동가로 대전 현충원에 안장하였고 훈장도 추서 받았으며, 마침내 이렇게 값진

책으로 구체적 형상화가 되었으니 하늘나라에 가서도 부끄러움이 없으리라 자부합니다.

 

--그럼 이제 이 대담 기사를 읽는 독자 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서 파란만장했던 배씨 일가의

가족사를 잠시 이곳에 펼쳐보겠습니다.

 

배씨 일가의 후손 배기호 선생의 선조 배수우는 1801년 당시 충주 관찰사였다. 그는 천주학 박해를

피해 아들과 도피하던 중 그만 목숨을 잃게 되고, 살아남은 아들 배광국은 의술을 익혀 김해 고을에서

한의사로 일했다.

아버지의 의술을 이어받은 배성두는 선교사 알렌을 통해 예수를 영접한 후, 김해교회와 합성학교를

세웠다.

그의 후손들 역시 믿음의 자손답게 의로운 삶을 살았는데, 특히 배성두의 맏아들 배동석은 기미만세

운동에 앞장섰다가 투옥되어, 갖은 고초 끝에 건강을 잃고 장렬한 죽음을 맞았다.

그런 배동석은 1980년 8월 15일에 독립운동의 노고가 인정되어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2004년에

독립유공자로 추대받아 그 유해가 고향 선산에서 대전국립묘지로 이장되었다.

배동석 열사의 죽음 후 홀로 남은 아내 김복남 여사는 온갖 고생을 하며 대위, 유위 두 아들을 키워냈다.

차남 배유위 씨의 장남인 배기호 선생은 1971년 미국으로 이민을 가, 약국을 경영하며 한인 지역사회의

시민권협회 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현재 한인교회 장로로 있는 그는 두 아들 성민, 성진 형제를 낳아 신장내과 의사와 약사로 키웠다.

한의사였던 배성두 장로와 세브란스 의전을 다녔던 배동석 열사의 자손인 이들이 모두 의학과 약학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 결코 우연은 아닌 듯하다.

 

--아이구, 이렇게 책의 줄거리를 정리까지 해 오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신유박해를 피해 가족과

도피하는 조선시대 충주 관찰사 배수우의 험난하고 질곡 많았던 삶의 풍파로 이야기는 시작이

되었지요.

그 후 역병에 걸린 환자를 치료하다 목숨을 잃은 배광국, 한국교회 초기 시절에 신앙의 박해를 헤치고

합성학교와 지금의 김해교회를 세운 배성두, 그리고 일제에 저항하며 3.1 운동의 주동자로 투쟁하다

투옥돼 목숨을 잃은 배동석 선대에 이르기까지 사실 7대에 이르는 배씨 일가의 일대기가 실명으로

소개됩니다만 문학적 측면에서도 높이 평가받은 것도 더한 자랑으로 여깁니다.

 

--아, 그러고 보니 출판 기념회 때에 오신 여러 평론가들이 이 책의 작품성에 대해서도 극찬한

기억들이 나는군요.

이호철 소설가께서는 여기 분위기가 너무 성스러워서 부담스러우니 휴머니즘 그윽한 한편의 문학

작품 발표장으로 여기고 마음을 부드럽게 풀고 출판기념회를 축하하자는 취지의 격려사를 했던

일도 떠오릅니다. 평론가 김종회 교수도 좋은 말씀을 주셨지요?

 

--아, 네, 특히 김 교수님은 당일 날 사회도 보아주셨지만 이 작품이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크게

알려지지 않은 신앙소설의 장르에 속한다고 정의하면서 이 방면의 대표적 출판사인 홍성사와

연결을 해 주신 노고에도 감사드리며 또 그 과정에서 긴 스토리를 반 정도로 축소 정리하여

줄거리가 명쾌하고도 빛나도록 권유해주신 점도 잊지 못할 은혜입니다.

 

--이번 배 장로께서 일시 귀국한 목적에도 비즈니스 외에 이 작품 출판이 관련되어

    있다면서요---?

 

--네, 작년에 미주에서 영역본이 발간되었는데 지금 세세한 부분들에 대한 수정 작업이 진행되고

있고, 지금 현재 중국어로의 번역이 또한 반쯤 이루어졌는데 그 윤문 작업과 출판에 대해서도

이곳에서 연구를 하고자 합니다.

예컨대 이전부터 알고 지내는 연변 과기대의 이승률 대외부총장의 소개로 <연변 문학>의 김삼

총편에게도 자문을 구하고자 하는 일입니다.

 

마침 이때에 미리 약속된대로 이 부총장이 대담 자리에 합석을 하여서 연변에 있는 김삼 총편과

전화로 깊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으나 이 부분은 인터뷰 기사에서 지면상 생략한다.

중국어판에 대한 조언을 나눈 후, 이 부총장이 자리를 뜬 다음 대담은 다시 이어졌다.

 

--중국판의 출판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고 있나요?

 

--네, 중국의 실정법상 외국에서의 출판물은 반입 시에 매우 까다로운 절차가 있어서 차라리

북경이나 연변, 그리고 상해 등 두어 군데에서 출판을 할 작정입니다.

김삼 총편과는 중국어판의 윤문을 잘 보아줄 사람을 소개받고 출판 관계도 의논하고 있습니다.

 

--이제 좀 부드러운 이야기를 나눌까요? 배 장로님 개인의 가족사 말입니다.

특히 부인이신 배정숙 여사 소개부터 하시지요. 하하하.

 

--아이구, 집사람 자랑부터 하라구요? (웃음) 집 사람과는 제가 미국으로 오기 직전에 지인의

소개로 짧은 교제 기간을 갖고 결혼에 골인한 사이입니다.

지금도 그렇겠지만 사람이 자기 살던 자리를 떠나서 유학이나 이민을 떠나자면 많은 심적,

현실적 어려움을 겪어야하고 결단해야 할 순간들이 많겠지요.

이런 고독하고 힘든 과정에서 집사람은 많은 용기와 힘을 제게 주었고 이민을 와서도 고비

고비마다 정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제게 많은 도움을 주었지요.

열심히 제 가업을 도와 온 것은 물론이려니와 가정적으로도 아이들 교육을 맡아서 의사와

약사로 키워낸 집사람의 덕분으로 저는 그저 바깥일만 하고 살아왔지요.

하긴 바깥일에도 집사람의 노고가 컸습니다. 비즈니스도 전문 분야를 제외하면 나보다 낫고

영어도 더 잘하고 골프 실력도 저보다 훨씬 낫지요, 하하하.

 

--그렇군요. 성공적인 삶을 이룬 경우에도 그 뒤안길을 들여다보면 어렵고 신산했던 시절이

누구나 있기 마련인데 이민 초기에 대학원까지 다니면서 분투노력할 때에 곁에서 뒷바라지를

해주신 부인의 노고가 크셨겠습니다.

아울러 그 내조를 잊지 않고 자주 언급하는 배 장로님의 보은하는 마음도 훌륭하십니다.

자녀들 이야기도 좀 해주시지요.

 

--마누라 자랑에 자식 자랑까지 하라는데 이거 정말 팔불출 만드시는 것 아닙니까---? (웃음).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자면 큰 아들은 호놀룰루에서 출생하여, 지금은 신장내과 및 일반

내과의사이고, 며느리는 한국에서 온 미국 치과의사입니다.

그 사이에 4살 난 딸 배 주리 ( Naomi Pai )와 두 살 난 아들, 배 주석 ( Noah Pai )이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롱비치 에서 출생했으며, 내외는 대학원에서 만난 약사부부로써, 각각 약업회사의

직장을 다니고 있으며 나의 가업도 파트타임으로 돕고 있습니다. 제가 약국을 두 군데나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 사이에는 백일이 지난 딸 배 주희 ( Kaitlyn Pai ) 가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제가 사는 동네 가까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배 장로님과 부인께서는 교회 활동도 열심히 하시지요?

 

--뭐 항상 부족감이 앞서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금 오렌지카운티 한인교회에서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만 특별히 1년에 2~3 번씩 의료선교를 나가면서, 내가 어려웠을 시기를 생각하지요.

잘 아시다시피 지금도 세계에는 어려운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데 이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기도하고 또한 섬기고 있습니다.

파라과이, 과테말라, 중국, 볼리비아 등. 여러 곳을 다녀왔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다닐 예정입니다.

 

--연변도 다녀오셨겠군요? 연변 과기대에서는 저도 객원 교수로 조금 봉사했습니다만---.

 

--네, 그 대학 내에 있는 저 유명한 화장터 교회에서 예배도 보았고 나름의 봉사를 하였지요.

그때 김진경 총장님과의 인간관계도 맺어졌고 아까 왔다 가신 이승률 부총장도 만났습니다.

그런 인연이 이제 중국판 출판에 밑거름이 되고 앞으로는 그 책이 사역의 밑거름으로 또 쓰여지고

하는 인과관계와 섭리에 놀라운 마음을 갖습니다.

 

--교민 사회에서도 여러 가지 직함으로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 에피소드가 있으면 한가지 만

   소개해 주시지요.

 

--이런 저런 안타깝거나 혹은 재미있는 일화가 많습니다만 한 가지만 들면 제가 교민 단체의 장을

맡고 있을 때에 독도 문제가 첨예한 이슈인 조국의 현실을 생각해서 미국 신문에

“Tokyo Belongs to Japan, Tokdo Belongs to Korea"라는 광고를 냈는데 결국 앞 구절은 주위에서

말려서 뒤 구절만 올린 안타까운 일도 있었습니다.

참 멋진 구호였는데 말이지요. 하하하.

 

--하하하, 정말 재미있으면서도 안타까운 에피소드였군요. 끝으로 특별한 여가 생활이 있으시면

   한번 소개하시지요.

 

--네, 별것은 아니지만 지난 40년 동안의 미국생활을 비디오로 열심히 찍어온 자료가 있는데 지금은

DVD로 옮기는 작업을 직접하고 있습니다.

각각의 비디오가 2시간 분량으로, 그게 한 50개 정도가 되어서 시간이 많이 걸리는군요.

재미도 있습니다만~~~. 그리고 사진도 대략 3만장 정도를 간직하고 있는데 손안에 넣어둘 수 있는

장치 속에 입력해 두고서 자주 꺼내보기도 합니다.

기억을 돕는 자료도 되고 재미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모두 헛된 시간을 소비한 것 같기도 합니다. 하하하.

 

--구약 전도서의 ‘헛되고도 헛되도다’ 라는 구절을 상기하시는군요. 사람의 하는 일이 모두 유한성의

숙명을 갖겠습니다만 배 장로께서는 끊임없이 무한성을 추구하는 자세로 살아오셨고 또 살아갈

의지가 보이는군요. 장시간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담은 경복궁 앞, 그가 사흘간 머물렀던 서머셋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점심을 나누면서 오래 계속

되었다.

우리는 대담을 마치고 걸어서 시립 미술관 쪽으로 갔다. 마침 <앤디 워홀 특별전>이 열리고 있어서

그리로 방향을 잡았던 것인데 <천경자 미슬전>도 바로 이웃하여 열리고 있어서 “동서의 만남”같은

고양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배기호 장로의 오늘의 모습과도 일맥상통하는 상징성도 문득 가슴에 와 닿았다.

가까이 길가에는 옛 전차가 전시되어있어서 반가운 마음으로 들어가 보았다.

배기호 장로가 쓴 “난 아직도 전차의 꿈을 꾼다.”라는 진솔하고 소박한 수필이 생각났다.

 

(대담 기사 끝)

 

주요 경력

 

경력

1983년-2000년 Y's men club 임원

1982년-1999년 미 민주당 아세아 태평양 Caucus 총무

1985년-2005년 O.C 한인교회 시무장로

1993년 현재 California 미국 약사회 이사.

1993년-1998년 CBMC (기독실업인회) 회장.

1994년-2000년 남가주 남전도회 이사

1994년-2000년 Samra 한의과 대학 강사

1997년 현재 세계 에스페란토 협회 Anaheim 지부장.

1998년 현재 O.C 기독실업인 회장.

1994년-2000년 O.C 한인회 부회장.

2004년-2008년 미 시민권자 협회 ( LAKA-League of KoreanAmerican Citizen )

회장 그리고 이사장

2005년-2008년 한인 약사회 이사장

 

 

 

<에세이> 배기호

 

난 아직도 전차의 꿈을 꾼다.

 

나는 오랜 세월동안 가끔 그것도 자주 종로4가에서 명륜동과 혜화동을 지나는 전차의 꿈을

꾸어왔다.

4월의 그 길은 창경원 앞에 벚꽃이 만개해서 그 앞을 지나면 아주 유쾌한 봄 향기가 나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만든다.

 

내가 어릴 때 자란 대구는 전차가 없었다.

부산으로 내려가면 전차를 볼 수 있었지만 좀 흉물스러웠다.

서울로 올라가면 '땡땡'거리는 전차가 항상 나를 반기는 듯 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도 같은 방향임에도 불구하고 전차의 정취를 느끼고 싶어 수차례

갈아타기도 했다.

 

전차는 옛날부터 우리에게 내려오는 끈적한 정서를 느낄 수 있었고 구한말1899년부터 내려와서

서민들의 애환을 그려내기도 했다.

배추 단을 인 아낙네들이 타기도 했고 닭장수가 닭을 여러 마리 잡아서 자루에 넣어서 싣고

다니는 구경도 했다.

 

내가 중학교에 다닐 때 외갓집 먼 친척인 전차 운전수 아저씨가 우리 집에 내려왔을 적에는

호기심이 많아 이것저것 물어본 적이 많았다.

 

고등학교 때 서울에 왔을 때는 전차앞쪽에 큰 운전대 같은 것이 있어서 그것을 돌려

브레이크를 잡거나 움직였고 나중에 신형전차가 나와서 앞에 운전수가 손을 움직여 급정거하는

전차가 있는 것도 보았다.

 

참 신기한 것은 화신 앞 네거리에서 서대문 쪽으로 가는 노선과 남대문 쪽으로 가는 노선

두개가 있었는데 어떻게 그 노선이 바뀌어 가는지 참 궁금했었다.

한번은 그곳에 내려서 유심히 봤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또 재미있는 것은 뒤쪽에 전차 조수가 앉아서 전차 도르래를 맞추느라 정신없이 힘들게 줄을

맞추어 지나가는 것을 보았고 밤에는 전차와 전기선이 마주치는 곳에서 불꽃이 튀기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외국에 나가서 시간이 있을 때는 지금도 꼭 전차를 타고 지난 시절 서울에서의

향취를 느껴 보기도 한다.

헬싱키에서도, 세인트 피터스부르그, 프라하, 바르셀로나, 샌프란시스코.....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로 유명한 뉴올리언스에서도 전차를 탔었다.

 

에스페란토어의 선구자이신 시인 정사섭씨가 이용했을 파리의 전차는 그저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철거된 지가 오래 되었다.

 

뮌헨에서는 전차를 타면서 작가 전혜린 씨를 생각하면서 새벽전차를 타기도 했었다.

 

왜 내가 전차를 이렇게 좋아하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선로와 선로의 그 조그만 틈바구니와 전차바퀴가 부딪혀 나는 그 쇳소리가 듣기 좋았다.

지금은 서울의 어느 곳에서도 이 아련한 꿈에 젖어있는 전차를 볼 수가 없는 것이 섭섭하다...

 

하지만 우리들의 마음 한 켠 그곳에는 왠지 아련한 꿈으로 남아있다.

추억으로 좀 남겨 놓았으면 좋았을 것을...

 

나는 지금도 창경원 앞을 달리는 전차의 꿈을 꾸고 있다.....

 

  <수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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