팩션 FACTION

겨울 나이아가라

원평재 2011. 2. 10. 05:44

어제는 일 때문에 청평, 좀더 정확하게는 가평군 설악면을 다녀왔다.
명절 직전이라 차들이 남쪽으로 많이 빠진듯, 소양강에 매단 고속화 도로는 평소와 달리 시원하게 뚫려서

막 내리기 시작한 굵은 눈발에도 돌아오는 길을 염려치 않게 하였다.

청평 호반을 거슬러 조금 달리니 나이아가라 호텔이 눈에 들어왔다.
참 오래 전부터 이 눈부신 이름으로 이 호텔은 많은 사람들의 추억의 매체가 되어 있음을 보고 듣는다.
나도 여름이면 전에 책임을 맡고 있던 어떤 연수원의 남녀 외국인 교강사들을 여름마다 이리로 데려와서

2박 3일간 워크 샵을 한 기억이 난다.
이 곳의 내당에 파놓은 풀장은 새로 개장한 호텔들의 월풀 풀장을 염두에 두어도 아직은 쓸만한 편이었다.
아니 백인 여자들의 빛나는 노랑머리와 빠진 몸매가 이중인화 되어서 그런 이미지가 남아 있는가---.

사실 그토록 가까이에서 나를 구심점으로 하여 함께 물장난하던 백인 남녀는 그 이전, 이후에도 별로 없었던 것

같다.
특히 카나다에서 온 젊지만, 자신 없는 눈초리를 한 백인 여자의 멋진 몸매, 거친 피부, 주근깨 투성이 팔뚝에서

햇볕을 받아 반짝이던 뻣뻣한 털이 생각난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어쩌다 열 번 정도나 가봤다.
처음 갔을 때는 내 평생 여길 다시 올 수 있으랴, 감격과 조바심으로 이틀을 지샜는데 어쩌다 공짜 구경이

시작되더니, 이제는 한번도 못타본 한강 유람선이 오히려 궁금하게 되었다.

처음 갔을 때 묵었던 곳은 저 유명한 "돌아오지 않는 강"을 주연한 마릴린 먼로가 묵었던 "홀리데이 인,

나이아가라 폴스"였다.
함께 간 일행중의 한사람이 로비의 의자 밑을 뒤졌다.
"뭘 하오?" 내가 물었다.
"먼로가 흘린 모발을 찾을까 해서---"
"에끼 이 양반아. 다른 사람들이 다 줏어갔지, 하하"
"퍼블릭 헤어(!)는 퍼블릭해서 혹시라도 아직도 주인없이 날아다닐지---"
퍼블릭 마니, 공적자금 이야기가 나오기 한 세대 전이었으니 선견지명인가.

그 홀리데이 인이 2류로 밀리면서 어느 해이던가 대대적인 리모델링 하는 것도 보았고.
다운타운 셔틀버스를 이용하여 몰(mall)에 가던 것이 이제는 이 곳에도 큰 몰이 들어선 것도 보았다.

그런데 IMF가 터진 해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내 돈을 내고 이곳 관광을 가게 되었다.
그 어려웠던 해의 겨울이 매우 추웠는데 여행사에서 나이아가라가 결빙했다고 은근히 소문을 퍼뜨렸다.
내가 얼어붙은 폭포를 내 돈 내고 구경 다닐 만큼 한가롭지는 못했지만
동부에서 공부하는 아들녀석을 만나보러 가는 길에 패키지 여행 팀에 끼어서 이 결빙의 장관을 한번 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사실 개인의 비행기 값에 조금만 더 보태면 되는 꼴이기도 하고.

결국은 나도 여행사에 속은 셈이긴 했다.
카나다 쪽으로 들어가서 말발굽 폭포를 보는 것이 정석이어서
그 쪽으로 들어갔는데 장관은 장관이었으나
거대한 물줄기는 결빙의 최초 조짐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날씨는 북아메리카의 특징대로 눈보라가 휘날리고
다음날 아침에 눈을 비비니 카나다 쪽 나이아가라 일대는 다리가 푹푹 빠질 만큼 밤새 눈이 쌓였고
아, 이날은 크리스마스 이브가 아닌가.
여기 사람들은 우릴 보고 웃었겠지.
이게 뭐냐고, 오늘은 집에서 헤어진 가족들이 모이는 날인데---.

우리는 온타리오에 있는 세상에서 제일 작다는 교회로 증명사진을 찍으러 갔다.
네 사람이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교회당 안팎에서 모두들 실컷 원을 풀고
다시 한인 식당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한 때 밀려드는 한국 관광객으로 고무되었던 밥집 주인은 은행에서 돈을 빌려 식당을 확장하고, 아예 몇 개

더 늘리고 하다가 망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동창회까지 나이아가라에 와서 하는 꼴을 보고 비웃었더니 벌받았는지요---"
주인이 웃는지 우는지 애매한 표정으로 유머 비슷한 것을 하고는 유리병에서 청록의 알약을 꺼내 보였다.
"비아그라인데 사실분?"
값은 10불 정도였던가---.

"여보, 하나 삽시다"
구매사절단 같은 일행의 행태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던 집사람이 큰 소리로 이걸 사자고 졸랐다.
"아직 그게 필요한 때는 아니잖아"
진실을 갖고서 거절과 해명을 하는 나의 몸짓은 억울하고, 어처구니 없게도 초라하였다.
"오늘 정말 왜 그래?"
"아, 궁금하잖아요"
아내의 어조는 당당하였다.
"이 사람아, 이젠 사고 싶어도 못 사겠네. 엎질러진 물, 아니 쏟아진 약병일세. 챙피하게---"

이 이야기를 나는 얼마 전에, 목에 힘께나 주는 자리에서 털어놓았다.
예상대로 약효가 있었다. 목에서 힘들이 풀어졌다. 보스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거 왜 기금을 많이 내놓는 LA의 아무개 있잖소. 지난번 만났을 때, 나이가 칠십인데 비아그라가 아니면

생의 의미나 의욕을 잃을 뻔했다고 말씀하시데."
참석자들이 모두 흡족한 주제를 너그러운 표정으로 추인하고 있었다.
"사모님께서는 연세가 어떻게 되시죠?"
이렇게 묻는 고지식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사실은 무척 궁금했지만 나도 참았다. 물어서는 안될 일 같았다.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주제는 대체로 "원초적 본능"과 관련 있는 말들이다.
얼마 전에 나는 여러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문경의 "왕건 촬영장"을 찾았다.
수십억을 들여서 이런 대규모의 야외 세트를 설치할 수 있는 국력이 자랑스러웠고
"문경 탄좌"를 오래 경영해오던 에너지 회사가 수백만 평의 산에
나무를 새로 심고 표고버섯을 재배하는 모습이 가슴 흐뭇하였다.

사장이자 친구인 이 총수의 부인이 우리들에게 표고버섯을
생각보다 훨씬 많이 선물하여서 모두들 크게 고마워했는데
분위기는 조금 경직되었다.

이때 곱게 나이든 부인 한 분이 크게 외쳤다.
"여보, 조껍대기 술이 뭐예요? 한 병 사서 마셔봅시다."
그 남편이 때릴 듯 한 모습으로 부인의 입을 막아보려 했지만
부인은 막무가내였다.
"조껍대기 술이 모야? 아니 조껍대기가 모야?"
점심 술이 과했는지 말씨도 조금 요즘 스타일이 되었다.
당연히 조껍대기 술이 대령되었고 모두들 왠 일인지 조금 지나치게 마셨다.
점잖던 분위기가 아연 활기를 띄었는데, 어째든 조껍대기 술 덕분이었다.

청평호로 떨어지던 차창 바깥의 눈발이 조금 줄었다.
돌아갈 때는 조껍대기 술이나 한 병 사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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