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북 리뷰, 문단 이야기

배기호 심사평

원평재 2011. 2. 18. 04:34

 

아메리칸 드림

수필 문학이 문학사에서 산문 장르로서의 위치를 확보한 것은 대략 산업혁명이

서구에서 성공을 이루어 나가며, 시간과 사고의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중산층이

형성되면서 부터였다.

이때부터 정기간행물, 예컨대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등의 미디어가 급속히

생성 발전되고 이른바 독자를 확보한 수필가의 필진이 그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다.

문학사적으로 보면 근대적 의미의 소설과 수필이라고 하는 새로운 장르가 개척된

시기이다.

 

수필의 초기 모습은 그러나 지금 우리가 향유하는 신변잡기 류의 내용보다는

일종의 '소논문' 형식이 지배적이었다.

말하자면 인류가 한 번도 겪지 못했던 산업화에 따른 사회적 제반 모순, 위기의식에

당면하여 당대의 지식인들은 그 진정한 의미와 해결책에 대한 고도의 지적 고민과

모색을 털어내 놓았던 것이다.

출판과 배포가 지금과 같지 않던 시절에 단순한 신변잡기가 미디어의 총아가

되기에는 아직 준비되어야할 과정이 많이 남아있었다고 할 것이다.

말하자면 중산층의 의식의 변화, 마음의 여유 등을 위한 시간적 준비가 필요했다고

하겠다.

마침내 이러한 제반 여건이 성숙되면서 수필은 소논문의 형식을 띈 원래의 에세이

(프랑스어로 essai, 영어로 essay) 영역과 신변잡기를 다룬 미셀러니(miscellany)의

세계로 양분되면서 근대 수필문학은 장족의 발전을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러한 발전 과정에서 그 완수 단계를 문학사적으로 접했다고

할까, 아무튼 신변잡기 쪽의 수필 문학성향이 처음부터 강한 편이었는데 그것이

무슨 전자보다 하위층위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배기호 수필가가 응모한 몇몇 작품들은 이러한 양분된 성격을 반반씩 공유하고

있는 독특한 작품세계였다.

우선 내러티브 형식 자체도 일반적인 서술형이 있는가하면, 편지의 형태, 또 어떤

글은 선언문이나 격문의 형식을 띄고 있는 등, 다양한 실험을 하는 모습이 보인다.

또한 어떤 글의 내용은 자연과학도의 소논문 같은 정확성에 계조식 문단 전개 등이

이채로운가 하면(이런 부분은 원래 서구에서 추구하던 수필 문학의 원형에 가깝다),

또 어떤 부분은 우리나라 선비들의 상소문 혹은 일제강점기의 격문의 성격을 띈

글도 보인다.

과연 배기호 수필가의 이력을 살피니 미국에서 약학 대학원을 마친 자연과학도이자

그 선대분들은 독립운동을 치열하게 벌이다가 순국을 한 드라마틱하고도 찬란한

가족사가 배경임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가족사를 구태어 들추어 보는 것은 이러한 내력이 앞으로 참으로 가치있는

문필생활을 할 기본 토양이 되리라는 기대와 아울러 책무를 상기코자 함이다.

특별히 미국사회에서 청년시절 이후를 모두 보낸 배경을 감안해 볼때 아직도 펄펄

살아있는 모국어의 맥박을 느끼게하는 기개와 자질이 놀라우면서도 마음 든든하다.

이번에 싣지 못한 다른 작품들은 다음 기회에 게재할 여유를 갖고자 한다.

이제 새롭게 등단한 현자의 만년이 곧장 보람있는 저술활동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는 마음 간곡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