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포토 에세이, 포엠 플러스

외계인이 그린 나스카 지상 그림?

원평재 2012. 6. 15. 06:47

 

 

 

계몽적 해석 말고 내내 동화같은 세계에 두고 싶은 대상들이 있다.

나스카의 땅바닥에 그려진 거대한 그림들도 그렇다.

 

아직도 과학적으로 완전한 해석이 내려지지 않은 단계라서

오래전 외계인들이 여러목적으로 그려놓은 것이라는 신비주의에

빠지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완전치 않은 해석이라면 차라리 상상의 나래를 타고싶은 충동이 더 실재적이지 않겠는가.

 

나스카 공항은 작은 시골 경비행장 수준이었으나 관광객들은 많았다.

예약시간보다 두시간이나 더 기다려서 겨우 10인승 세스나 208 프롭기를 탈 수 있었다.

이 거친 오지에 오로지 땅바닥의 그림을 보러 이렇게 사람들이 몰려들다니

불가사의한 것에 대한 집착은 인간 공통의 심정인가 보다.

기다리며 내셔널 지오그라픽의 비디오를 보았다.

 

다른 한쪽에는 일본판 해설 비디오가 있었는데 흐릿하고 내용도 부실하였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조용히 그러나 끊임없이 찾아와서 자기들의 비디오 앞에

꾸중듣는 학생들처럼 말없이 모여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연간 1000명 정도 온다는데 일본인들은 그 열배나 되는 모양이다.

 

비행기에 그려진 신비한 그림들이 어언 낯익다.

 

경 비행기는 좌우로 나누어 앉은 열명의 승객들을 배려하여

그림이 있는 상공에서 한번씩 방향을 바꾸어 몸체를 많이 기우리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냥 둔감하여 나중에 그런 사실들을 들으며 소영웅주의를 잠시 맛보았다.

나스카는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남쪽 해안선을 따라 450km지점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다.
1930년대 리마에서 페루 제2의 도시 아레끼빠 까지의 국내 항공이 취항하며

조종사들에 의하여 거대한 그림들은 그 존재가 알려지게 되었다.

그보다 먼저 16세기 말 루이스 데 몬존이라는 스페인 행정관이 이 지역을 지나다가

지상에 그려진 그림을 발견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어쨌거나 페루 동부해안 사막지대 약 360평방킬로미터에 그려진

의미를 알수없는 수백,수천개의 그림들중

그 형태나 의미를 알수 있는 그림은 불과 수십개에 불과하고
뜻모를 형상이나 점, 선, 부호등을 합치면 그 수가 무려 9.000개 이상이나 된다고 한다.

왼쪽에 조금 보이는 두사람은 같은 세스나기를 탄 일본인 관광객이었는데

기다리며 내게 말을 걸었다.

노트를 들고 다니며 기록을 하는 전형적인 일본인 관광객의 모습이었다.

그룹 투어가 아니고 두 사람이 자유 투어로 같이 다니는데 부부는 아닌듯하고

여성분은 고향이 니꼬(日光)라고 하였다.

"후유노 소나타"와 "장금이"는 물론 열심히 보았고 욘사마의 팬이라고 하는데

경주에 이어 교토 이야기가 나오면서 내가 그만

윤동주 시인의 옥사에 대한 말을 꺼내는 바람에 조금 서먹하게 되었다.

 

비행기가 떠나려다가 주저앉았다.

셀모터를 돌리는 배터리 충전이 부족하다고 급히 장비가 나왔다.

"개스는 제대로 넣었는가?"

대단한 농담을 꺼냈다고 생각했으나 썰렁한 개그가 되고 말았다.

긴장감이 척박한 풍경에 못지 않았다.

 

비행기가 낮게 떠오르며 동네 주변을 일별하였다.

발굴과 관광 사업이라는 미증유의 바람이 불면서

천지개벽이 일어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다채로운 그림들 중 몇십가지는 동물과 새의 그림이다.

그러나 더욱 많은 것은 사다리꼴, 사각형, 삼각형, 직선등의 기하학적 도형이다.

콘도르는 주둥이에서 꼬리까지 122미터나 된다.

펠리컨도 그렇고 도마뱀은 188미터, 원숭이는 길이가 122미터 폭은 91미터나 된다.

언제 그렸을까?
어느 한 순간 집중적으로 그려진게 아니라는
검증은 끝났다고 한다.

"방사성 탄소 연대측정방법"에 따르면 이 그림들이 제작된 시기는
AD 100년에서 800년 까지 약 700여년에 걸쳐서 그려진것으로 추정된다.

 

 

 

 

 

 


"어떻게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그림이 남아있을까?"

 

이곳은 사막이라고 하여도 모래가 아니고 굵은 흙과 돌이 딩구는

석회질의 표층으로 되어있다.

돌이나 나무막대등으로 20~30cm정도의 깊이로 파내보면 이때 파낸 흙이 좌우로 요철을 이루어서

형태가 선명하게 되고 석회질 흙은 비가 오지 않는 이곳에서 그대로 영겨붙어서

오래동안 형태를 유지한다.

최근에는 엘니뇨 현상으로 비가 많이 와서 일부 그림들이 많이 훼손되었다고도 한다.

 

 

 

누가 그렸을까?


나스카 지상 그림중 가장 규모가 큰 삼각형 그림이 있는데 길이가 8km에 달하여서 우주선 활주로로
쓰였다고 상상력을 발동하는데 허무맹랑하다는 것이다.
나스카 문명 이전에 이곳에는 빠라까스 문명이 있었고 그 문명의 토대는 목화 재배와 직물 산업이었다.
B.C 8C~A.D1C 까지 존속했던 문명이다.

지금도 맨해튼의 패션계에서는 페루의 면직물을 최고로 친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서 들었다.

 

이 삼각형 그림은 바로 솜에서 실을 잣고 단사를 2합 이상의
복합사로 만들때 사용하던 팽이 모양의 "실패(보빈;bobbin)"이라는 견해가

최근의 유력한 재해석이다.

그리고 이 직물은 옷감 뿐만 아니라 "줄 자"를 만들어 쓰는 문명의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일종의 줄자가 있으면 도형을 그리는 문제는 그렇게 힘들지 않았으리라는

결론이다.

 

 

왜 그렸을까?

 

이곳은 물이 크게 부족한 곳이다.

중국의 고비 지방처럼 이곳에도 카이정(관정)을 만들어 쓴 흔적이 즐비하고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그렇게 볼때 이 그림은 통치자가 물이 부족할 때마다 피지배자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제천 의식, 제례 의식으로 만든 상징물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보면 나스카에 그려진 많은 그림들중 대 부분은

물과 직,간접으로 연관이 있다.

물을 잘 찾는 원숭이의 그림이나 꽃잎의 꿀이나 이슬을 따먹는 허밍 버드

계곡 깊은 곳에서 물을 갖다준다고 믿었던 콘도르.

고래, 물고기, 펠리컨을 비롯해서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는 나무그림등,

물을 연상할수 있는 그림들이 대부분이며 특히 거미 그림은 그냥 일반적인 거미가 아니라

아마존 밀림에 사는 종류를 그려서

당시에도 이미 먼 아마존 강과 연결이 되어있었으리라는 추측도 있다.

 

또 물을 바라는 마음을 결집하였으되 수많은 직선을 그려 놓은 점은

당시의 비와 물에 대한 열망이 기우제의 형식이기 보다는 만년설의 설산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에 대한 갈망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을 끌어내기도 한다.

 


 

이런 저런 자료를 참고로 몇가지 과학적 가설을 꿰맞추는 데에는

독일 태생의 고고학자 마리아 라이헤(Maria Reiche)의 연구 업적을 빼놓을 수 없다.

 

1946년 처음 연구를 시작해서 1998년 죽을때까지 5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그녀는 오로지 이 척박한 지방에 머물며 나스카 지상 그림 연구에만 일생을 바쳤다.

 

그녀는 외계인 설등, 신비주의를 단호히 배격하고

과학적 인본주의를 줄기차게 이끌어 온 고집장이었으며

일종의 기인으로도 꼽힌다.


그녀는 이 그림들이 농사를 짓는데
필요한 정보가 되는 하늘의 별자리를 그려 놓은 “농사 달력”이며
천체관측을 하기 쉽도록 땅 위에 여러 가지 기준선과 별자리를
그려 놓은 “천문대”일 것이라고 했다.

 

 

 

 

한편 그녀의 고집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단순한 학문적 집착일까?

 

그녀는 젊은시절 록 클라이밍을 하다가 불의의 사고로 손가락이 하나 절단된

불구자였다.

나스카에 그려진 그림들중 손가락이 아홉인 지체가 많이 보이는데

그런 사실을 알게되면서

이 땅과 이 연구를 숙명으로 삼은 것은 아닐까

 

나스카에 대한 그녀의 과학적 추론에 문득 몰입하다보니

어언 계몽적 이성주의를 거부하던 내 마음의 오아시스가 사라지는 느낌이다.

 

 

 

 

 

Concierto para una sola voz, Tania Libert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