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보고다닌 투어

가학, 피학성의 드라큘라 성

원평재 2012. 8. 26. 15:56

 

 

루마니아의 트랜실바니아 지방에 있는 브란 성은 드라큘라 백작 성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성은 얼마 전만 해도 양도와 상속에 따른 소유주도 유동적이었고 관리 유지도 벅차 매물로

나오기까지 했으나 지금은 관광 명소로 새로 자리잡으면서 인파가 북적거린다.

 

 

아마도 새로 들어온 미국인 전문 경영진들이 펀드를 모집하여 성을 개축하고 세계적으로

판촉 광고도 하여서 특히 아시아의 일본, 홍콩, 한국인 관광객들의 잠자는 혼(?)을 흔들어

깨웠는지도 모르겠다.

조만간 중국 대륙으로부터도 쏟아져 들어올 것 같은 조짐이 벌써 보인다.

흡혈의 갑과 을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드라큘라에 대한 개인적 감상은 중학생 때부터이던가,

헐리우드 키드는 아니었으나 재개봉관에서 가슴 두근거리며 몰래 본 영화로 기억에 남는다.

크리스토퍼 리 가 주연한 음습하고 무서웠던 영화에 대한 회고조의 기분은 이제

드라큘라 전설이 갖고 있는 가학적, 피학적 상징성을 캐보는 현학 취미로까지 성장하여

발칸반도의 이곳까지 진출하였으니 조금 실소도 나온다.

5층에 달하는 성채안에 자리한 가구와 비치물들은 물론 모두 새로 들여놓은 것들이라고 한다.

그래도 성채 자체는 값싼 세트가 아니고 실물이어서 반갑다.

 

부실부실 내리는 비도 물론 소방 호스에서 나오는 가짜가 아니어서 위안이 된다.

 

브란(Bran)성은 1212년 독일 기사단의 요새로 만들어졌는데,

15~16세기에 이곳 트란실바니아의 교역의 안전을 위하여 지방 상인들이 중수하였다.

세월이 흘러 이들은 1920년 루마니아 마리여왕(1875-1938) 에게 성을 바쳤고 여왕 사후

그의 딸 일리아나공주(1909-1991)에게 상속되었다.

 

한때는 공산정부에서 국유화(1956년)하였다가 2006년 5월에 후손

도미니크 폰 합수부르크에게 반환 되었다고 한다.

 

 

 

 

 

 

 

브란성(드라큘라 성)이 유명해진 것은 그냥 스스로 된 것은 아니었다.

콘텐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일랜드 작가 B. 스토우커의 호러 소설 〈흡혈귀 드라큘라 Vampire Dracula〉(1897)가 바로

그 근본이다.

 

트랜실바니아 지방의 한 고성(古城)에 혼자 사는 드라큘라 백작이 있었다.

이 성을 방문한 영국인 하커는 백작이 낮에는 관 속에서 자고 저녁이 되면 일어나서 사람을 덮치는

무서운 흡혈귀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흡혈귀에 피를 빨려 죽은 피해자 역시 흡혈귀가 되어 불사자가 된다.

흡혈귀가 두려워하는 것은 마늘과 십자가, 태양 빛이며 그들의 영혼에는 안식과 평안이 없다.

여담이지만 오늘날의 드라큘라는 이 세가지를 무서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는 만담이 되어서 여기 올리기가 거북하다.

 

이 작품은 1927년 H. 린에 의해 연극으로, 1931년에 T. 브라우닝에 의해 영화로 각색되었고

그후 여러 편의 공포영화가 나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었다.

또 벨라 루고시, 크리스토퍼 리 같은 유명한 드라큘라 배우를 배출했다.

 

?

동유럽 얼굴의 환대에 약간 으시시하다.

 

 

 

고딕 호러 소설의 대명사 브램 스토커의 『드라큘라』는 엄청난 악이 기독교적 질서를 위협한다는

19세기 후반의 수많은 공포 소설 가운데 하나이다.

절대 악의 화신 드라큘라 백작과 그를 영원한 죽음으로 떨어뜨리기 위해 분투하는 빛의 전사들이라는 설정은

표면적으로 선악의 대결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드라큘라는 죽음과 쾌락을 동시에 안겨다 주며, 가학과 피학 음란증의 은유로까지 발전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가 추구하는 만인의 행복론이 또다른 흡혈론은 아닌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드라큘라의 원형이라고 하는 블라드 테페스(Vlad Tepes, 1431 ~ 1476)는 공식으로는 왈라키아공이었다.

루마니아 역사상 오스만제국의 군대를 물리친 용장으로 유명하고 지금도 존경을 받고있다.

그는 1431년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의 슈왈츠부르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블라드 드라쿨은 터키와 영원히 싸우기로 맹세한 용사단의 일원이었다.

13세때 블라드 테페스는 투르크인에게 잡히고 거기서 고문과 사람들을 꼬챙이로 꿰는형벌을 보게 된다.

그가 포로와 정적들을 꼬챙이에 꿰어 죽인 행적은 이때에 배운 것이라고 한다.
그는 독실한 그리스 정교의 신자였다.

투르크 제국의 침입에 맞서 용감히 싸운 그가 벌인 공포정치는 루마니아 정서로는 수용 가능한 것이었다.

 

 

 

 

 

중정에 보이는 저울 모양은 정의의 상징이자 고문과 학대와 살해를 위한

보조역할이었다.

우물은 항상 미로와 통한다.

 

 

 

 

 

 

 

 

두레박과 줄은 사라졌지만 도르레에도 십자가는 남아있다.

 

 

나가는 문쪽은 아무래도 소홀하다.

 

완전히 성 밖으로 나간다.

 

 

저 모연은 고기 굽는 냄새와 함께한다.

 

 

 

 

 

담배를 한대 문 가게 주인이 검정 개를 내려다 보고 있다.

 

 

 

 

드라큘라 성을 나와서 조금 달리다보면 집시 마을이 있다.

발칸 전쟁 와중에는 서유럽으로 많이 빠져나갔다가 EU가 불황에 빠지고

이곳 루마니아에는 다시 평화가 오자 많이 돌아왔다고 한다.

루마니아는 집시들에게 관대한 역사가 있다.

 

 

 

집시 아가씨가 물건을 판다.

 

 

가까이에 드라큘라 성과 비슷한 성채가 있고 매물로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승산은 없을 것이다.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평지에는 드라큘라 성의 인기에 힘입어 주택 단지가 들어서고 있었다.

 

 

불가리아로 넘어가기 전, 루마니아에서 마신 와인과 맥주와 광천수

와인과 맥주는 루마니아 원산이고 광천수는 키릴 문자로 보아서 인근 수입산인듯~~~.

 

 

 

 

 

 

 

Stamitz / Flute Concerto G-dur Op.29 3악장

Pan flute - Simion Stanciu Sryinx

 

 

클래식 팬플룻 대가 Simion stanciu syrinx

루마니아 수도 부카레스트에서 태어나 첼리스트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시미온은 바이올린을 다루게 되었지만,

12살 때 시미온은 아버지 몰래 팬플룻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루마니아 전국 콩쿠르에서 1등을 하며 연주활동을 하게

되었으나 허가 받아야 연주활동이 가능한 독재정권을 피해 스위스로 망명하게 되었다.

악기하나 들고 찾아간 지휘자들과 매니저들에게 문전 박대를 당하기도 하지만 스위스 라디오 오케스트라

지휘자였던 아르맹 조르당의 눈에 띄게 된다. 방송국 한 구석에서 시미온의 유일한 스승 이었던

장 피에르 랑팔의 레코드를 틀어놇고 모짜르트 플룻 협주곡 첫 악장 연습을 끝내는 시미온을 본 조르당은

나머지 악장도 부탁했고 그로부터 두달 뒤 조르당의 지휘로 시미온의 데뷔 음반인 모짜르트 협주곡 음반이 출반된다.

"저는 다른 사름들처럼 고급 교육이나 수준 높은 삶을 살아온 사람이 아닙니다. 몸으로 부딪쳐서 배운 것들이지요.
그래서 음악을 말로만 하고 이론으로만 따지는 연주는 저와는 맞지 않아요. 바흐나 모짜르트 음악해석을

책에서 배우는 것은 제 스타일이 아닙니다.
제 음악신조는 가슴에서, 몸으로 느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서 제가 먼저

기뻐해야 한다는 주의입니다. 꾸며진 기쁨은 감동을 줄 수 없지요."

협주곡을 비롯해 다양한 클래식 음반뿐만아니라 클래식이나 루마니아 음악을 기초로 한
다양한 음악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