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 보고다닌 투어

루마니아 여인 (팩션과 사진)

원평재 2012. 8. 24. 22:16

 

 

 

2005년 7월의 글입니다. 사진은 2005년 7월 12일에 찍었군요.

엊그제 같은데 세월이 유수와 같습니다.

 

<팩션> 루마니아 여자

 

 

맨하탄에서 50% 세일이라는 간판에 순간 현혹되어 집채만한 가방을 샀다.

진짜 할 일은 더 남아서 그걸 힘들여 끌고 돌아다니다가 마침내 집으로 가는

뉴저지 포트리 행 버스를 덜렁 탔는데 직감 같은게 영 좋지 않았다.

버스가 승강장을 막 빠져 나가는데 타고있던 어떤 승객이 잘못 탔다고 외치며

갑자기 차를 세우고 내려버리는 난리가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찜찜한 느낌은 더해왔다.

전에 이 번호의 버스가 두 가지 길로 각각 다닌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기억이 순간

떠올랐으나 지금 나는 홀몸이 아니라 큰 가방을 끼고 있으니 엉거주춤 할 수밖에.

아이를 밴 임산부의 처지가 이럴까,

무거운 몸으로 그냥 오늘의 운세에 전부를 맡기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임신을 해야하는 여성들은 참 불쌍하다는 생각이 갑자기 밀려든다.

무생물 가방 하나에도 이렇게 운신의 폭이 좁아드는데 하물며 배 속에 생명체를

잉태한 상황에 이르러서야---.

 

 

하여간 차는 떠났는데 아무래도 창밖의 바깥 풍경이 갈수록 이전과 다르다.

달리는 방향은 틀림없지만 허드슨 강가, 물결 바로 옆으로 난 길이 아니고 이 버스는

그 강변 길과 병렬이 된 높은 지대의 길을 택하고 있었다.

고도가 높아도 '리버 로드'임에는 틀림이 없다고 뻐기는듯이 잘도 달린다.

옳거니, 미국 독립 기념일 밤에 차를 갖고 불꽃놀이 구경을 왔던 바로 그 고지대

쪽이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 이 높은 지대에서 집채만큼 큰 가방을 들고 저 아래 쪽을 향하여 어느 지점,

어느 순간을 택하여 내려 갈 일을 생각하니 정신이 아득할 따름이다.

 

나는 바로 그 어느 결정의 시간 때문에 뒷쪽 편한 좌석에도 앉지 못하고 엉거주춤 버스 앞쪽의

서로 마주보게 되어있는 불편한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고 겨우 정신을 수습하기 시작하였다.

가만히 보니 내 마즌편 쪽에는 아담한 백인 여자가 앉아서 자기 옆의 뚱뚱한 부인이 안고있는

어린 아기를 보고 좋아서 어쩔줄 몰라하며 어르고 있었다.

남의 아기를 보고 넋이 빠진 모습이었다.

조금 있다가 그 뚱뚱한 여인은 아기를 빼앗길가봐 그런다는 듯이 서둘러 내렸다.

물론 이 말은 정서가 불안정해진 내 표현이고 아기 엄마는 자기의 목적지에 내렸을 것이다.

 

 

시선 둘 곳이 사라진 아담 사이즈 백인 여자는 이제 내 커다란 가방을 힐끔 힐끔 쳐다 보다가

가끔 나와 눈길이 마주치면 새침한 표정을 짓는다.

아기를 보던 상냥한 눈길과는 사뭇 기본이 달라졌다.

나는 갑자기 아기나 되었으면 좋겠다 싶은 간절한 소망이 생긴다.

정서가 미성숙한 사람이 갖는 "자궁 회귀 본능"인가.

 

내가 운전 기사에게 이게 도대체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보니 내 목적지 부근을 관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나도 그건 알고 있다.

저 아래로는 허드슨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그 옆 어디쯤엔가 그리운 내 집이 있는

강변 길, 리버 로드가 병렬로 눈 아래 전개되어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길과 강의 건너에는 맨해튼의 눈 익은 스카이 라인이 신기루처럼

위용을 자랑하고 있고---.

 

문제는 위상을 달리하면서 한없이 병렬된 이 두 직선이 그냥 달린다는 것이다.

중간 중간의 버스 정류장 이름도 비슷하게 "위상 기하학"적 난제가 되어서

큰 가방을 든 나를 옥죄면서.

답답하여 내가 시방 이런 처지라는 사정을 운전 기사에게 잠시 상담하였다.

 

하지만 그도 이런 딱한 승객을 위한 묘책이 있을리 없다.

종점 근처에서 내려 아래쪽으로 달리는 같은 번호의 완행 버스를 거꾸러

타라고 한다.

그래봤자 총계 한시간 반에서 두시간이면 끝날 일이라고 태평스레 말한다.

 

바로 그때, 건너편의 아담 사이즈 여성이 내 시야를 가로막았다.

그녀가 벌떡 일어나서 나에게로 온 것이다.

"아하, 당신은 저 아래 강변길, 리버 로드와 병렬된 이 도로로 잘못

올라탔군요. 흔히 있는 일이지요. 당신네는 바로 저 아래 길로 달려야 하는데---."

"맞소, 옳소. 이 내 사정이 그리 되었소. 나도 맨하탄 나올 때마다 그런 위험을

예비했으나 이렇게 당할 줄이야 몰랐소. 모두가 이 가방 탓인가 싶소. 하지만

때늦은 각성이 무슨 소용에 닿겠소. 저기 내려다 보이는 저 길이 내 길이란 말이오.

지금와서 다이빙을 할 수도 없고---. 하하하"

내가 허세로 웃자 그녀의 눈길에 연민의 빛이 역력하였다.

더우기 내가 옆에다 뉘어놓은 그 거대한 가방에 그녀의 눈길이 머물 때는

착한 얼굴에 동명상련의 울음을 참는 모습까지 묻어났다. 아니 무슨 동병상련?

그녀는 가벼운 패션의 살바토레 페라가모 쇼울더 백을 메고있을 따름인데.

아마 웃음을 참는 모습을 내가 잘못 해석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아까 그 아기에게 보내던 아련하고도 살갑고 고즈넉한 시선을 되살려

마치 아기를 보듯이 내 큰 가방을 몇차례 더 훑어보더니 무슨 생각을 가다듬는듯

하였다.

 

"당신 어디서 왔어요?"

"나 코리아에서 왔소이다. 뉴저지에 살지만."

민망한 마음으로는 "아리가도"나 "니 하오마"로 시작하여 조국의 명예를 지키고도

싶었으나 관성이 여유를 집어삼켰다.

"내 짐작이 맞군요. 우리 가게 근처에 한국 가게들이 있어서 척 보면 감이 잡혀요.

아, 좋은 뜻으로 말이지요."

이크, 애국심을 발휘하다가는 큰 일 날뻔했구나. 그런데 좋은 뜻이라니 원.

하여간 그녀가 말을 이엇다.

"저 큰 가방을 들고 중간에 내려서 버스 기다렸다가 다시 바꾸어 타고 돌아가기로 한다면

여간 고생이 아니겠군요. 내가 곧 내리는데 집에 가서 승용차를 갖고나와 태워다 줄까요?

내 차로 가면 십분이면 될 것 같아요. 오케이?"

 

나는 금방 "오케이! 쌩큐!"하지를 못했다.

그렇다고 "노케이"로 굴러온 행운을 발길질할 처지도 아니었지만.

생각해보라, 여기가 어디멘가.

눈 감으면 코베가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에어리어가 아닌가.

이거 백여우가 나타난건 설마 아니겠지.

 

"나는 도와주려는 것이오. 싫으면 말고."

내가 망설이고 있으니 그녀의 시선이 도루 새침해졌다.

절체절명의 순간이 따로 없었다.

"아니, 아니오. 내가 영어가 서툴러서 말이 금방 나오지 않았어요."

내 비루한 변명에 그녀가 웃었다.

내 뱃속을 훤히 꿰뚫는다는 듯이---.

그녀의 웃음 속에 든 독심술에 내가 항변하였다.

"여보시오. 어떤 뉴요커라 할지라도 이 풍진세상에 천사 같은 당신의 말에

금방 대응할 수 있겠오. 당신의 존재와 말은 지금 현실이 아니라오. 꿈결같소.

어쨌거나 착한 사마리아 인, 어 굿 사마르탄이 이 시대에도 살아있다는게 놀랍구려.

캄사, 캄사하오."

지금 생각해보니 "캄사하다"는 말은 필경 우리말로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 전설의 고향같은 순간에 어이 내가 "Thank's a lot."이나 "Much appreciated"

했겠는가, 캄사했겠지.

 

나는 서둘러 그 착한 사마리아 여인을 따라내렸다.

 

 

내려서 보니 그녀가 사는 곳은 내가 사는 곳 보다 오래된, 올드 타운이었다.

"이 곳 풍경이 저리 오래되어 보여도 굿 에어리어, 나쁘지 않아요."

그녀가 조금 불완전한 영어로 설명을 했다.

사실은 그녀의 영어 발음이 온전치 못하여서 아까부터 나는 그녀가 히스패닉인가 아닌가

궁리 중이었다.

어쨌던 자기가 사는 곳에 애착과 자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나쁜 심성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그녀에 대한 나의 신뢰가 무럭무럭 자랐다.

자라지 않으면 도무지 어찌하랴.

그녀는 나에게 기다리라고 하고는 길을 건너 조금 허름하고 낮은 콘도 건물로 달려가더니

윗층에다 대고 소릴 질렀다.

남편인듯한 사람이 창밖을 내다 보자 차 열쇠를 빨리 던지라고 소리친다.

사실 그녀는 내리면서 셀폰으로 집에있는 남편에게 어느나라 말인지 낯선 말투로

무어라고 빨리 전화를 했었다.

남편이 윗층에서 던진 열쇠를 한 손으로 척 받더니 그녀는 공동주택 뒷쪽으로 가서

멋진 "메르세데스 벤츠"를 몰고 달려나왔다.

나는 그 좋은 차에 기분좋게 앉았는데, 조금전 맨해튼에서 산 그 물색없이 커다란 가방도

벤츠의 뒷 트렁크에 주인처럼 몸을 척 뉘었음은 물론이었다.

 

"이제 십분이면 당신 집에 도착한다오."

"아, 고맙소, 조금 전만 해도 지옥에 있는가 했는데 이제는 착한 사마리아인 덕분에 천국에

왔구려."

"아, 그래요? 세상은 참 살만한 곳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어여쁜 당신은 아이가 몇인가요?"

말을 꺼내놓고는 잠깐 후회하였다. 착한 사마리아 인에게 갑자기 아이의 숫자를 묻다니.

아마도 아까 버스에서의 그녀의 행적이 관성작용을 했는지 뒷 트렁크의 내 가방이 그런

질문을 유도했는지---. 에라, 한국 사람 많이 안다니 우리 문화가 좀 그렇다, 이해하겠지---.

우리네는 나이 묻고 월급 묻고 아이 숫자 묻고 그게 윤리고 도리이다.

그녀는 한국 문화를 정말 잘 이해하는지 얼른 답변을 내 놓았다.

"아, 나는 결혼 생활 16년째이고 그동안 아이 갖기가 그렇게 소원이었는데도 아기가 생기지

않는군요. 이제는 거의 포기 상태이지요."

"당신 이름은 무엇인가요?"

"지나, 풀 네임은 지나 블라 블라 블라---."

"라스트 네임이 듣기에 어려운걸 보니 다른나라에서 이민을 온 사람이군요?"

"I'm from Romania."

아, 그녀는 루마니아 출신이었다.

 

 

 

"로매니아라면 수도가 부쿠레슈티이지요? 영어로는 부카레스트---."

"아, 어떻게 그리 잘 아나요?"

그녀가 반갑고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그러나 나는 몰락한 독재자 차우세스쿠 때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루마니아가 동유럽의 진주라지요? 그리고 민족도 슬라빅 계통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알지요. 한때는 그곳도 로마 제국의 강역이었지요, 아마?"

"아, 그럼요. 우리는 슬라빅이 아니고 라틴 계통이라구요."

그녀가 매우 기뻐하며 자신이 라틴 계통임을 강조하였다.

세계사적으로 로마 제국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을 대체로 기분 좋게 여기는

서양 사람들의 속내를 알기에 내가 조금 아첨을 한 셈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 착한 사마리아 인에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에 입각하여 이 정도 인사를

치루는 것이야 오히려 너무 부족한 답례가 아닌지 모르겠다.

 

"지나는 직업이 무엇인가요?"

천사도 우리 시대, 특히 맨해튼에서는 직업이 있어야 하니까 내가 물었다.

"맨해튼의 매디슨 애비뉴에서 부티크를 해요. 내가 퇴근 길이라서 이렇게

캐주얼하게 옷을 입었지만 가게에서는 아주 화려하게 좋은 옷을 입어요.

호호호."

아, 그렇지, 자존 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타인으로부터도 존경을 받지.

지금은 퇴근 길이라 복장 위반 같지만 무시하지 말라는 말이겠군.

그녀의 말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당연하지.

"당신이 미국에 온지 16년이 되었다면 아마도 루마니아에 새로운 공화국이

생기던 바로 그때 쯤이겠군요?"

나는 차우세스쿠가 몰락하던 때라는 말 대신에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언급하였다.

"그렇죠. 바로 그 때 왔어요. 우리 청소년 엘리트 집단이 무너지면서---."

그러다가 그녀가 입을 닫았다.

차우세스쿠가 몰락한 것은 1989년이었다.

그녀가 미국에 온지는 16년이 되었는데 지금 나이 서른 여섯이라고

아까 말했으니 고국을 떠날 때는 갓 열아홉이었다.

차우세스쿠는 독재자들이 흔히 그러하듯 몽상적이었고 턱없는 이상주의자

였다.

인공수정으로 약 이만명 정도의 엘리트 아기를 출산시켜서 국가가 관리하며

키웠는데 이들이 청년기에 접어들 때쯤 그 독재자가 몰락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혹시 그렇다면?

 

나는 내 명함을 건넸다.

그녀도 자기 명함을 주었다.

 

과연 그녀는 매디슨 애비뉴에서 부티크를 하고 있었다.

"오, 당신은 코리언 프러페서? 그럼 후앙 교수를 알겠군요?"

"후앙 교수?"

"몰라요? 그 엠브리오, 스템 셀로 유명한---."

"아, 황우석 교수! 그 분 이름을 어떻게 아나요?"

"관심이 있을 일이 좀 있어요---."

그러는데 차는 내가 미리 위치를 말해 두었던 나의 거처로 빠르게 들어왔다.

어쩔 수 없이 아쉬운 작별을 하려다가 내가 똑딱이로 사진을 찍자고 하였다.

그녀도 기뻐하며 자신의 똑딱이 카메라도 꺼냈다.

우리는 각각 따로 한 컷을 찍고 또 찍어주었다.

 

내가 루마니아를 생각할 때면 독재자 차우세스쿠를 생각하는데 이 여자는

코리아를 무엇으로 인지하고 있을까.

생각해보면 두려운 일이었다.

 

한때 로마 제국에 편입되었을 때가 이 나라 역사에서는 평화의 시절이었다.

로마가 멸망한 후의 이 나라 역사는 전란의 역사였다.

어쩌면 "차우세스쿠"라는 이름에서도 보듯이 로마 식이라면 그의 이름도

다마스쿠스나 검투사 막시무스, 그리고 스파르타쿠스처럼 "차우세스쿠스"가 되어야 하는데

이 나라 사람들의 이름에서는 왜 모두 꽁지가 빠졌는가?

 

그녀가 아기를 못낳는 사실, 그 불임 현상도 꽁지가 빠진 현상으로 비유 한다면 진실로 미안한

생각이겠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여간 그녀의 불임의 이유가 혹시 출생과 관련된건 아닐는지---.

차우세스쿠가 만든 이만명의 엘리트 청소년들은 좋은 유전자를 뽑는다는

데에 집착한 나머지 근친 수정의 논난이 많았다고 하지 않았던가---.

근친교배와 불임.

그녀가 그 이만명에 속한건 아니었을까.

 

매디슨 애비뉴의 42번 스트리트 쪽이라면 화려한 부티크가 정말 많은 곳이다.

그 쪽이라면 별명이 패션 애비뉴인 7번가, 브로드웨이, 6번가, 그리고 저 유명한

피프스 애비뉴 5번가, 또 매디슨 애비뉴, 파크 애비뉴---.

그 언저리로 내가 이 엉뚱한 수수께끼를 풀러 날을 잡아 나가보아야 할는지.

내 마음의 행로는 미로였다.

 

<끝>

 

 

 

 

아래에 얼마전 다녀온 루마니아의 펠리쉬 성 사진을 덧붙여봅니다.

 

 

    Peles 성은 Karl 1세가 여름 별궁으로써 1875~1883 의 기간 중에 건설하였다.
    그 건축 양식은 Renaissance. Baroque 및 Rococo 의 건축 양식들이 골고루 
    도입되어 조화를 이룬 19세기 후반의 독일 Renaissance 건축 양식이라 한다.
    아름다운 여름 궁전에는 갈수록 관광객들이 몰려들어서 그룹을 이루어 현지 해설사가 인도하여야 들어갈 수 있다.
    그 기다리는 시간과 인파가 만만치 않았다.
    일단 입장하면 덧신을 신어야하며 사진을 찍으려면 우리돈으로 15,000원 정도를 따로 지불하고 증명서를
    목에 걸어야하였다.
    그럴 가치는 충분하였다.
     

     

    Karl 1세의 조각상

    카를 1세의 명으로

    1783년에 짓기 시작하여 1883년 완성 되었다.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설계되었다.

    카롤 1세(Carol I, 1839년~1914년)는

    루마니아 왕국의 초대 군주였다.

     

아름다운 성 Peles 성은 해발 800 m 의 높이에 위치하며,
"Carpathia 의 진주" 라고 불리운다. Peles 성은 그 경관의
아름다움과 함께 성 내부에 소장된 수많은 역사적 유물들로
말미암아, "Romania 의 국보 제1호" 로 등재되어 있다.

Peles 성은 Sinaia 의 Peles Creek Valley 의 어느 아름다운
언덕 위에 지어진 성으로서, 사람들은 Peles 성을 가리켜
"Pearl of Carpathia" ( Carpathia 의 진주 ) 라고 부른다.

보이는 장면은 정문 뒤쪽의 중정에 해당한다.

성을 지을 때 경비실, 사냥용 별장, 마구간,

발전소 등 부속건물들까지 같이 건설되었으며,

자체 발전소 를 갖추고 있어 유럽에서 전기로

불을 밝힌 최초의 성이며

최초의 진공청소장치 엘리베이터가 시설된 곳이기도 하다.

 

 

여름의 열기를 표현하여 보았다.

 

 

 

성 안에는 170개의 방이 있는데 모두 사치스러울 만큼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Karl 1세가 착용하였던 방패, 투구, Chain Mail Cloth 및 무기들

금, 은, 보석, 동물의 뼈, 상아 등으로 장식된 18~19세기의 검집들

원산지 : Turkey, Persia, India, Caucasus, 영국, Italy 등

 

 

 

 

 

 

 

 

 

 

 

 

 

왕을 위한 Royal Music Hall

 

Royal Music Hall 에는 piano, harp, violin 등의 악기들이

비치되어 있고, music box, 악보, 지휘봉 등이 놓여 있었다.
벽 옆의 table 위에는 Stradivarius 의 violin,

지휘봉 그리고 Chopin 의 필사본 악보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대 접견실

 

 

 

 

궁정 내의 French Style 의 Mini Theater

 

 

 

 

 

세월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뒷모습

 

 

소년의 탐구심

 

 

 

단체로 온 관광객들이 포즈를 취하였다.

아름다운 궁정을 고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몇 컷을 올려본다.

 

 

 

     

    루마니아 평원의 해바라기

    햇살이 너무 강렬하여 해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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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onau Wellen Walzer

    이바노비치 / 다뉴브강의 잔물결 
    Ivanovich, Iosif, (1845~1902)

    Anniversary Song


    Tom Jones-Anniversary Song





    Giovanni Marradi




    다뉴브강의 잔물결/ Iosif Ivanovici

     
    *      *      *      *      *      *
      Anniversary song..,

     Oh, how we danced on the night we were wed
    We vowed our true love, though a word wasn't said
    The world was in bloom, there were stars in the skies
    Except for the few that were there in your eyes
     
    오, 우리가 결혼하던 날 밤에 우리는 어떻게 춤을 추었던가요
    비록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진실된 사랑을 맹세했죠
    세상이 활짝 피어나고 하늘에는 별들이 있었죠.
    그대 눈안에 있는 몇몇 반짝이는 별들만 제외한 별들이


    Dear, as I held you so close in my arms
    Angels were singing a hymn to your charms
    Two hearts gently beating, murmuring low
    "my darling, I love you so"
     
    그대여. 내가 그대를 내 품안에 가까이 안았을때
    천사들이 그대의 매력에 노래하며 찬미했지요
    우리 두 사람의 심장이 조용히 뛰고, 작게 소근거렸어요
    "내 사랑, 난 그대를 너무나 사랑해요"


    The night seemed to fade into blossoming dawn
    The sun shone anew but the dance lingered on
    Could we but relive that sweet moment sublime
    We'd find that our love is unaltered by time

    그 밤이 지나고 차츰 새벽이 다가오는 듯했어요
    태양이 다시 밝게 비추었지만 춤은 끝나지 않고 계속 되었죠
    우리가 저 달콤한 순간의 고귀함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면
    우리 사랑이 세월에 의해 변하지 않았다는걸 알게 되련만..
     

    왈츠 곡명. 다뉴브강의 잔물결이라고도 한다. 루마니아왕국 초대 군악대 총감독을 지낸 이바노비치가

    1880년 군악대를 위한 곡으로 작곡된 곡입니다. 전주곡과 4개의 소(小)왈츠 및 종결부로 되어 있으며,

    단조와 장조를 조합하여 구성되어 있다. 프랑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애수를 띤 특유의 선율은 동유럽적인

    분위기를 지니고 있죠. 이바노비치는 여러 통속무곡(通俗舞曲)을 남겼으나, 이 작품 하나로 음악사에

    남게 되었고 전세계에서 불려지는 유명한 곡이 되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애니버서리 송》이란 이름으로

    불려지고 있으며, 윤심덕(尹心悳)의 (사(死)의 찬미)도 이 곡을 편곡하여부른 노래로 우리들에게 친근한

    곡입니다.

    이바노비치 [Ivanovich, Iosif, 1845?~1902.9.28]

    동부 유럽의 유서깊은 지방 루마니아의 서부 바나트에서 태어났으나 출생연도는 불분명하다. 카라기알레

    국립극장과 루마니아 오페라·발레 극장을 비롯해 오랜 전통을 지닌 많은 극장들이 있는 부쿠레슈티에서

    주로 활동하다가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루마니아의 유명한 군악대장으로서 팡파르와 행진곡, 왈츠 등을 많이 작곡했다. 또 수많은 통속민요도

    많이 썼으나, 오늘날에는 왈츠곡 〈도나우강의 잔물결:Valurile Dunarii(The Danube Waves)〉(1880)

    〈카르멘 실바〉(작곡연도 미상)의 작곡자로서 유명하다. 군악대용 작품을 많이 썼으나 그의 피아노 소품과

    성악 작품도 굉장히 세련되다. 그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도나우강의 잔물결〉도 원래는 팡파르용으로

    작곡했으나 피아노용으로 편곡했다.

    한 때 군악대장으로도 일한 적 있는 헝가리계의 오스트리아 작곡가 프란츠 레하르(Frans Lehar:1870~1948)

    를 가르친 적이 있다. 1889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작곡상을 받았다. 특히 요제프 라너(Joseoh Lanner:1801~1843)·

    요제프 슈트라우스(Josef Strauss:1827~1870)의 뒤를 이어 요한 슈트라우스(Johann Strauss) 부자와

    요시프 이바노비치(Iosif Ivanovich), 프란츠 레하르 등에 의해 빈 왈츠의 전성기가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