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시 (포토 포엠)

여름과 겨울, 그리고 누드 시 (첫 회)

원평재 2013. 1. 27. 16:08

 

 

 

 

 

 

제비를 기다리며/ 문정희

 

 

제비들을 잘 돌보는 것은 우리 집 기둥

말하자면 흥부의 영향이지만 솔직히

제비보다는 박씨, 박씨보다는

박 속에서 쏟아질 금은보화 때문이지만

아시다시피 나는 가풍을 잘 이어가는 착한 딸

처마 밑의 제비들을 두루 잘 키우고 싶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강남에도

제비들이 좀체 나타나지 않아

지하철역에서 복권을 사서

주말이면 허공으로 날리기도 하고

참다못해 빈 제비집에 손을 넣었다가

뜻밖에 숨은 뱀에게 물리기도 한답니다

포장마차에서 죽은 제비 다리를 구워 먹으며

시름을 달래며

솔직히 내가 기다리는 것은

박씨이거나 박 속에서 쏟아질 금은보화가 아니라

물 찬 제비!

날렵하게 사모님처럼 허리를 감고

한 바퀴 제비와 함께 휘익! 돌고 싶은 것은

누구보다 당신이 더 잘 아시겠지

 

 

- 1969년 < 월간문학 > 등단

 

 

 

 

너와 동침을 한다/ 고영민

 

 

시외버스를 탄다

운주사행 표를 들고 자리를 찾으니 한 여자

내 옆자리에 다소곳이 앉아

슬며시 다리를 비킨다

창문은 계속 풍경만을 버릴 뿐

말 한마디 붙이지 않고

순간 여자가 불상처럼 잠들어

나도 그녀의 이불 속에 입정한다

아, 너였구나

문득 내 어깨에 얹혀지는 머리

여자는 내 어깨 위 열반인 양 들고

삼천의 인연이었을 이 옷깃의 여자

등받이를 적당히 눕혀

외간 남자와 나란히 잠이 들었다

잠든 사이, 이불은 계속 울음을 틀어막지만

한 계집아이가 붉은 이불 속에서 기어나오고

미륵의 사내아이가 기어나오고

기어나오고,

날은 저물어 버스는 오체투지로

들녘을 넘고 고개 능선을 지나

마을마다 돌 하나를 올려놓는다

그녀와 하룻밤 천불천탑을 쌓고

와불을 일으켜 세울 즈음

누군가 어깨를 흔들어 깨운다

어쩌나, 첫닭이 운다

그러나 아, 진정 용화세계가 너였구나

헝클어진 머리와 옷매무새를 다시 추스르며

와불은 스스로 일어난다

성급히 차문 밖으로 나오니,

일주문 안으로 사라지는 여자

천천히 불상 속으로 들어가 천년을

그 자리에 누워 있다

 

 

- 2002년 < 문학 사상 > 등단

 

 

 

 

 

 

지난 8월에 훔쳐놓은 여름을 엄동설한에 불러온다.

문득 소설가 김승옥님의 중편 <내가 훔친 여름>이 생각난다.

그 제목을 훔친건 3년 전이던가.

슬쩍슬쩍 카메라 렌즈로 훔쳐서 담아본게 2009년 7월 23일의 블로그였다.

올 겨울에도 다시 제목을 훔쳐오려니 개인적 친분에도 불구하고 송구하여

제목을 달리해본다..

 

김승옥 선생의 중편 <내가 훔친 여름>은 회색빛 권태의 여정이자 그 기록이었다.

계절은 여름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하지만 맨해튼의 겨울도 그런 분위기를 씻어내기에는 역부족인가,

약에 취해 흐느적 거리는 군상을 붙잡을 수 있었다.

 

권태의 기록을 <누드 시>들과 비끌어 맨 것은 무리일는지도 모르겠다.

누드 시의 장르가 따로 정립된 건지도 아직은 불명이다.

"세계 한인 작가 연합"(비영리 법인)과 문예지 "문학과 의식"의 공식 공동 카페에

"누드 시" 방을 만들어서 치열하게 활성화 시킨 어떤 시인의 수고하는 모습에

처음에는 놀라움 못지않게 걱정도 앞섰다.

 

하지만 회가 거듭할 수록 그 내공이 만만치 않았다.

염려가 경탄으로 바뀌면서 내 그림과 맞짱을 뜨는가 싶다.

간혹 생활에 권태가 일렁일 때, 이런 시도는 빨래터에서 청량하게 흐르는

물의 역할이 되지 않을까

지금 음악도 분위기에 맞추어 플로어에서 흐느적거리는가 보다.

뽕짝 트롯이건만 지터벅, 블루스 변종으로 발만 밟지 않으면~. 

 

 

 

파안/ 고재종

 

마을 주막에 나가서
단돈 오천원 내놓으니
소주 세 병에
두부찌개 한 냄비

쭈구렁 노인들 다섯이
그걸 나눠 자시고
모두들 볼그족족한 얼굴로

허허허
허허허
큰 대접 받았네 그려!

 

 

- 1984년 시집 < 시여 무기여! >

 

 

 

 

 

봄날 오후/ 김선우

 

늙은네들만 모여앉은 오후 세시의 탑골공원

공중변소에 들어서다 클클, 연지를

새악시처럼 바르고 있는 할마시 둘

조각난 거울에 얼굴을 서로 들이밀며

클클, 머리를 매만져주며

그 영감탱이 꼬리를 치잖여----징그러바서,

높은 음표로 경쾌하게

날아가는 징.그.러.바.서,

거죽이 해진 분첩을 열어

코티분을 꼭꼭 찍어바른다

봄날 오후 세시 탑골공원이

꽃잎을 찍어놓은 젖유리창에 어룽어룽,

젊은 나도 백여시처럼 클클 웃는다

엉덩이를 까고 앉아

문밖에서 도란거리는 소리 오래도록 듣는다

바람난 어여쁜, 엄마가 보고 싶다

 

- 1996년 < 창작과 비평 > 등단

 

 

 

열애/ 이수익

 

때로 사랑은 흘깃

곁눈질도 하고 싶지.

남몰래

추억도 만들고 싶지

어찌 그리 평생 붙박이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나.

 

나주 서 있음만으로도

그윽이 바라보는 눈길만으로도

저리 마음 들뜨고 온몸 달아올라

절로 열매 맺는

나무여, 나무여, 은행나무여,

 

가을부터 내년 봄 올 때까지

추운 겨울 내내

서로 눈 감고 돌아서 있을 동안

보고픈 마음일랑 어찌 하겠느냐고

 

네 노란 연애편지 같은 잎사귀들만

마구 뿌려대는

아, 지금은 가을이다, 그래, 네 눈물이다.

 

 

- 1963년 < 서울신문 > 신춘문예 등단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 고영민

 

겨울산을 오르다 갑자기 똥이 마려워

배낭 속 휴지를 찾으니 없다

휴지가 될만한 종이라곤

들고 온 신작시집 한권이 전부

다른 계절 같으면 잎새가 지천의 휴지이련만

그런 궁여지책도 이 계절의 산은

허락치 않는다

할 수 없이 들려 온 시집의 낱장을

무례하게도 찢는다

무릎까지 바지를 내리고 산중턱에 걸터앉아

그분의 시를 정성껏 읽는다

읽은 시를 천천히 손아귀로 구긴다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이 낱장의 종이가 한 시인을 버리고,

한권 시집을 버리고, 자신이 시였음을 버리고

머물던 자신의 페이지마저 버려

온전히 한 장 휴지일 때까지

무참히 구기고, 구기고, 구긴다

펼쳐보니 나를 훑고 지나가도 아프지 않을 만큼

결이 부들부들해져 있다

한 장 종이가 내 밑을 천천히 지나간다

아, 부드럽게 읽힌다

다시 반으로 접어 읽고,

또다시 반으로 접어 읽는다

 

- 2002년 < 문학사상 > 등단

 

 

 

 

 

 

 

소설가 김승옥 님과 어느해 자리를 같이하였다. 김송배 님도 보이고~~~.

필담으로 나누어야하는 대화에서 권태 주제는 빠졌다.

 

 

 

 

 

한 남자만 사랑하는 건 따분하다고 말하는 그녀!
어떻게 하면 그녀를 독점할 수 있을까?


아내와 이혼 후 삶의 의욕을 잃고 방황하던 40대 철학교수 마르땅. 견딜 수 없는 외로움과 절망으로 거리를 헤매이던 그는, 어느날 밤 술집에서 낭패를 당하게 된 노신사의 술값을 대신 내주고 답례로 그림 하나를 받는다. 며칠 뒤, 마르땅은 그림에 적힌 주소를 보고 그의 집을 찾아가지만 관리인으로부터 그가 바로 전날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집 안에까지 발을 들여놓는 마르땅은 실내를 가득 채운 수많은 누드화와 한 여자를 만나는데... 그녀는 17살의 누드모델, 세실리아! 마르땅은 그녀가 노신사가 그린 누드화의 모델이자 그의 연인이었음을, 그리고 화가가 숨을 거두던 순간 그녀와 정사 중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한 남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여자의 정체가 궁금해진 마르땅은 그녀와 관계를 맺기 시작한다.

만남의 시작은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지만 세실리아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마르땅. 그는 열정적인 사랑 따위는 어리석은 것으로 여겼던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을 경험한다. 세실리아가 찾아오지 않는 날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매일 외출하는 것을 부모님들이 싫어한다는 그녀의 말에 새로운 그림 선생으로 위장, 부모님에게 인사까지 드린다. 그의 사랑은 연인에게 그녀 또래의 새 남자친구가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불같은 질투와 집착으로 변하게 된다. 매일 그녀의 전화만 기다리다 몰래 뒤를 밟기도 하고 일거수일투족을 캐물으며 세실리아를 독점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쏟는 마르땅.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선물 공세는 물론, 현금도 주고, 청혼까지 해보지만 세실리아는 두 남자와의 연애를 포기하지 않고 급기야 새 남자친구와의 여행경비까지 부탁하는데... 두 남자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고 믿는 그녀 앞에서 그녀만을 독점하고 싶은 마르땅의 욕망은 더욱 강렬해진다.

그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 세실리아가 죽도록 원망스러우면서도 그녀의 그림자라도 붙들고 싶은 남자 마르땅,
어떻게 해도 그는 이 사랑을 멈출 수 없다.

 

 

 

 

 

 

남편/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 1969년 < 월간문학 > 등단

 

 

 

 

브래지어 고르는 여자/ 최금진

 

 

브래지어가 탑처럼 쌓인 리어카 앞

아이 업은 갓 서른의 여자는

어떤 봉긋한 생각을 하며 브래지어 고를까

그녀도 어둠속에

돌아앉아 브래지어 채우며 쓸쓸해할까

일찍 가슴 동여매고 평평하게 살아온

청상과부 우리 엄마도

남모르는 두 개의 탑 가슴에 쌓고 살았던 것인데

빈 조개껍데기 같은 엄마

가슴속 패총에도 가끔 희망의 진주알 몽글몽글 잡혔

을까

아무렇지도 않게 만원에 두 장 외치는 남자 앞에서

수북이 브래지어 탑을 쌓는 여자

텅 빈 사이즈만 자꾸 가늠하고 있는데

캄캄한 몸 채운 끈을 풀고 샤워 끝낸 밤엔

그녀도 썰물 빠져나가는 소리 들을까

세상 모든 어머니들이 그런 것처럼

까닭도 없이 부끄러운 제 몸 가리며 한숨지을까

엄마의 서랍 속 낡아버린 브래지어가 기억하는

몽글몽글 콩알처럼 잡히는 아픈 것들 훑어내리며

그녀도 혼자 샤워를 할까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거기를 하염없이 씻을까

 

-1997년 < 강원일보 > 신춘문예 등단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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