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호 <내 마음의 편지>에 올린 에세이 한 편과 얼마전 돌아본 삼각지의 골목길 모습을
함께 올려봅니다.
계절의 여왕 5월?
새삼 노천명 시인을 들먹이지 않아도 오월은 계절의 여왕이다.
시인은 <푸른 오월>에서 “내 젊은 꿈이 나비처럼 앉은 정오(正午)/계절의 여왕 오월의 푸른
여신 앞에/내가 웬일로 무색하고 외롭구나.”라고 노래하면서 오월은 하루 중 정오에
해당하는 달이라고 직관하였다.
98세의 나이로 세상을 뜬 피천득은 태어난 달도, 세상을 떠난 달도 5월이었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그분께서는 <오월>이란 수필을 남겼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중략)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라고
청청한 오월을 노래하였다. 이양하의 “신록예찬”도 5월을 칭송하는 데에는 같은
색갈이었다.
그럼 정말 오월은 세상어디에서나 다 싱그럽고 희망찬 계절이며 젊고 화려한 시간으로만
충만한가?
10여 년 전, 중국 옌벤(延辺)에 있는 “연변과학기술 대학교”에서 한 학기 교환교수로
강의를 한 적이 있다. 이 대학은 한국계 미국인 김진경 박사가 창설하여 이제는 개교
사반세기를 바라보는 매우 특이한 교육기관이다. 또한 이 학교가 징검다리가 되어서 지금은
평양에도 이와 비슷한 “평양과학기술대학교”가 개교하였다. 그리고 두 대학 모두 한국
기독교계가 주축이 되어 모급과 지원의 기본 바탕을 일구어 놓고 있으나 현지에서는 서로
그런 내색을 하지 않고 묵묵히 교육 사업에만 매진할 따름이다.
“연변과기대”의 총장은 김진경 박사이지만 부총장은 중국 공산당 간부이고 현재는
“연변(조선족)대학교”에 행정적으로 연계되어 있으나 무슨 불편한 문제가 제기된 적은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여간 신기하면서도 조마조마하고 동시에 한국인에게 가슴
뿌듯한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이기도 하다.
나는 교회와 관계없이 자매대학 관련으로 3월 학기에 맞추어 떠나게 되었는데, 출발 바로
전 날 여러 교회에서 파송되는 교수와 지원인력들을 위한 예배에 우연히 참석한 바가 있었다.
겨울이 끝나가는 때라서 훈풍이 달콤하였고 날씨도 봄을 재촉하는 듯 따뜻하였다. 마음 또한
약간의 흥분을 맛보고 있었으니 거기서 만난 베테랑 교수들이 내의를 든든히 장만하고 옷을
두툼하게 입고 가라고 한 권고가 제대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튼 다음날인 3월 초하루, 옌지(延吉) 비행장에 발을 딛자마자 삭풍과 설한풍은 눈을 뜰
수가 없을 지경으로 불어재쳤다. 비행기로 두 시간도 안 되는 거리의 기상이 이렇게 다를
수가 없었다. 그 와중에도 대학에서 대기시켜준 고물 승용차를 털털거리며 타고서 썰렁한
기숙사로 들어가 보니 앞으로 영하의 동토에서 지낼 일이 꿈만 같았다. 다만 내가 하도
엄살을 부리는 바람에 숙소는 막 준공된 5층짜리 아파트로 옮겨서 자리를 잡았지만 날씨
탓에 문 밖 출입조차 하기가 싫을 지경이었다. 그런 중에도 시내의 가장 좋다는 백화점에
생필품 구입을 위하여 용감하게 진출해보니 출입문마다 크고 두꺼운 플라스틱을 세로로 썰어
치렁치렁 발을 쳐서 외부의 찬바람을 막는 형편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예전 영화에서나 보던
두터운 외투와 털모자들을 쓰고 다녔으며 마스크를 쓴 사람도 적지 않았다.
캠퍼스의 각 단과대학 건물과 기숙사 그리고 식당 등은 모두 유리창이 달린 복도로 연결되어
있어서 좀 과장하면 만리장성을 보는듯하였다.
“봄은 언제 오나요?”
내가 동료교수들에게 물어보니 여기는 봄이 3월부터가 아니라 5월까지 기다려야 시작된다는
천연덕스러운 답변이었다. 그리고 일단 5월이 되기만 하면 이 동토에도 신록이 울창하게
된다고 자신만만한 어조였다. 희망이 이토록 사람에게 용기와 인내를 준다는 사실을 그때
만큼 절절히 가슴에 새겨본 적도 없었다.
“오월! 이곳에서도 오월은 신록이고 계절의 여왕이구나.”
노천명의 시가 입속에서 맴돌았다. 하지만 그때까지는 이 동토에서 회색빛 말고는 찾을
색조가 없을 것 같았다. 캠퍼스 주변은 넓디넓은 과원이었는데 무언가 이름 모를 과수목이
끝없이 늘어서서 삭풍을 견뎌내고 있을 뿐 하다못해 빨간 페인트 칠 지붕의 관리사조차도
없이 황량할 따름이었다. 풍경이 그러니 그 속의 과수나무에 연두색이 돌고 마침내 꽃과
열매가 달린다는 설명이 크게 믿겨지지는 않았지만 기다림 외에 달리 대책은 없었다.
나중에 알게 되지만 그 나무들은 “핑구어리 (苹果梨))”라고 하는 신종의 과수목이었다.
핑구어리는 사과와 배를 접목하여 만든 신품종으로 춥고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맛과
수확이 좋은데 조선족 식물학자가 만들어서 중국 전역에 퍼져나가고 있다한다. 그래서
핑구어리 이야기를 할 때면 조선족 교수나 학생들은 언제나 자랑찬 모습들이었다. 하여간
연구실은 난방도 시원치 않았고 틈이 벌어진 창문으로는 찬바람이 비명을 지르며 미친 듯이
달려들었지만 이제 핑구어리의 신록이 방풍림처럼 눈앞에 일렁이었다.
끝 간 데 없이 심어진 핑구어리 나무의 잿빛 도열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내 모습은“위대한
개츠비”를 쓴 스콧 핏제랄드의 단편 “겨울의 꿈(Winter Dream)"을 생각나게 하였다.
그 단편의 무대는 미국에서도 추위가 유난한 북동부 미네소타였는데 그곳에 사는 시골청년
주인공은 겨우내 여름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이었다. 여름이 오면 동부 유명대학을 다니는
그 동네 출신 부잣집 딸이 돌아와서 그와 정염을 나누는 것이었다.
어느 사이인가 나도 그 청년의 입장이 되어서 5월만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마음이 되었다.
물론 5월만 기다리며 처량하게 지낸 일상은 아니었다. 학교생활은 재미와 의미로 가득한
나날들이었다. 영미문학사는 쉽게 풀어서 원어강의를 하였으나 영미소설은 우리말로 진행
하였다. 주강삼각주, 골든 트라이앵글 Golden Triangle 지역에 진출한 한국의 삼성, LG,
선경 등의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을 필생의 꿈으로 여기는 조선족 학생들은 영어도 중요
했지만 세련된 우리말, 서울말을 배우는 것도 크나큰 일이었으니 서울에서 금방 들어온 나의
따끈따끈한 표준 언변(?)은 강의 내용보다 더욱 중요한 요소였다.
연길 방송국의 아나운서들은 그때 이미 우리의 KBS 방송국에 가서 반년, 혹은 일 년 씩
훈련을 받았기에 북한식 말씨는 방송에서 벌써 사라지고 바야흐로 남쪽 표준말의 전성시대
였다.
한편 캠퍼스 안에는 외국인 전용의 교회도 있었다. 원래 건물의 쓰임새는 화장장이었다는데
교회로 고쳐놓아졌으니 그 심오한 하늘의 섭리와 의미는 여기에서 다시 일러 무삼하리오.
내국인(중국인)의 출입은 엄격히 금지되어있는 그곳은 예전 주한 미8군 교회에 특별
출입증을 얻어서 다니던 내 젊은 날의 초상을 다시 한 번 회상시켜 주는 바 있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오월이 드디어 연변에도 찾아왔다. 오월은 정말 연변과기대에도 찾아오고
핑구어리 과수원에도 구별 없이 찾아왔다. 다만 혼자오지 않고 동반자와 더불어 왔다.
그 동반자는 놀랍게도 폭설이었다. 겨우내 왔던 눈 보다 더 많이 폭설의 형태로 내렸다.
막 꽃이 피려던 핑구어리 과수원 회색지대에도 하루아침에 백설이 내려서 설화를 꽃피웠다.
나는 꿈을 앗긴 사람처럼 낙심천만이었지만 그곳 교수들과 학생들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눈싸움을 하며 즐거운 표정이었다. 나도 그제서야 정신을 차려서, 정신없이 교정을
누비며 5월에 내린 백설을 카메라에 담고 난리를 피워보았다. 이곳저곳 아무런 경계도
느끼지 못하며 한참을 그러다보니 어느 지점에서던가 묵직한 기념비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싸움 벌이던 학생들도 그곳에는 들어오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알고 보니
이 대학이 생기고 나서 자원봉사로 들어온 교수들 중 이미 돌아가신 분들은 화장, 그 재를
뿌린 곳이라고 한다. 만감이 교차하는 성스러운 구역이 아닐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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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설은 제 아무리 엄혹하여도 하루 만에 그치고 다음 날 부터는 춘설의 속성대로 급히 녹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핑구어리 나무에는 눈꽃 대신 말로만 듣던 백설 같은 흰 꽃이 금방
매달렸다. 자연의 추이를 어찌 무엇이라 거역하랴. 나 또한 그곳 환경에 적응을 하면서
휴일이 되면 지린(吉林)성 위쪽의 헤이룽장(黑龍江)성 등을 여행하기 시작하였다.
위도가 옌벤 보다 높은 무단장(牧丹江) 지역의 5월은 더 추웠다. 다만 위도로 보면 내
근친들이 살고 있는 뉴욕이나 피츠버그, 그리고 미시간 오대호 지방과 비슷할 텐데 그보다도
훨씬 더 추운 느낌은 무엇인가. 물론 난방과 교통수단의 탓이 제일 크겠지만 그 보다는
내 마음이 편치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하긴 개척시대의 미 동북부 지방도 어찌 혹한의
고통이 없었으랴만.
결국“5월은 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르면서 화려한 시어와 시적 사유를 줄길 수 있는 이
모든 본질은 모두 내 나라에서 내가 누리는 자연적 천혜와 함께 마음이 통하는 인적 은혜가
공존된 덕분이 아닌가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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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시인의 누이 윤혜원 여사(재작년 작고)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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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삼각지 로타리를 돌아본 기록을 올립니다.
삼각지에는 저 유명한 대구탕 집들이 있습니다.
약속은 그곳이었지만 인근 이태원, 전쟁 기념관등도 둘러보고 대구탕 골목집으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이태원 길입니다
전쟁 기념관으로 들어옵니다.
해군 함정의 조타실
광개토대왕비의 모형
삼각지의 대구탕 집으로 들어옵니다.
그 사이 시원하게 뚫렸습니다.
봉산집?
아, 헌책방
원래 여기는 양서가 흘러나오는 루트였습니다.
8군내의 매릴랜드 군인 대학생들이 학기가 끝나면 내다파는 영문학, 경영학 교재,
미군 현지처들이 보고 버리는 플레이 보이, 펜트 하우스, 스웜프 등의 옐로우 페이퍼,
KOBOL C-Language 등등의 컴퓨터 관련 도서들이 나오던 곳이었지요.
아~~~~~~~.
지금은 국내 도서들이 나와있군요~~~.
다시 시간여행~.
친구들이 미리와서 신호를 보냅니다.
스마트 폰으로 연결이 되어있었지요.
세월이 가도 대구탕 맛은 그대로인가 합니다.
이 근처에 최근 난리를 일으킨 해운회사와 관련이 있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만---.
어둠이 짙어질 때까지 차를 나누다가 헤어집니다.
시간이 아쉽습니다.
♬ Limelight - Mantov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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