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이 오면 가장 먼저 무슨 생각이 떠오르나요?”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면 세상 여러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초여름의 싱그러운 꽃향기를
떠올리지 않을까.
그럼 우리나라 사람들도 모두 그러할까?
모르긴 하여도 대부분의 우리네는 “한국전쟁”을 맨 먼저 떠올리지 싶다.
아니 어휘만 갖고 따진다면 “한국전쟁”이라는 말이 맨 위는 아닐지 모른다.
나이든 세대에게는 한국전쟁이라는 표현이 생소하다.
그들은 그냥 “6-25 사변”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 답을 할 것이다.
그들 중에는 전쟁터에서 직접 싸우고 피해까지 입은 피어린 당사자들도 꽤 있을 것이다.
숨어서 견딘 사람, 피란의 고통을 겪고 직간접 피해를 입은 사람들도 많으리라.
그런 세대에 속한 사람들로서는 민족 통일이라는 미명아래 저질러진 이 참화를 “전쟁”이라고
부르는 것만도 치가 떨릴 것이다.
최악의 평화도 최선의 전쟁 보다 낫다는 말도 있을 진데, “조국 통일을 위한” 전쟁이라고
미명까지 붙여서 부르는 이 행태를 어찌 역겹다고 하지 않을 수가 있으랴.
그러나 어쩌랴. 현실은 감정보다 보편화 객관화를 상위개념인척 하지 않던가.
전쟁을 겪고 직간접의 피해를 입은 세대로서는 이 난리가 “내전(Civil War)”이라는
분류 형식까지는 또 그렇다할지라도 “한국 전쟁(Korean War)”이라니 이 무슨 귀신 씨 나락
까먹는 소리이자 “말도 되지 않는 말”이냐 말이다.
사실은 그저 “6-25사변”이라는 표현처럼 변고, 변괴에 다름 아닐 진데 “한국전쟁”이라니
진정 이 무슨 변고, 변괴, 사변이란 말인가.
하지만 세상은 냉엄하다고나 할까,
지금 이 동란의 국제적 공식 명칭은 한국 전쟁, 韓國戰爭, 영어:Korean War, 6-25 전쟁,:
조선 전쟁, 朝鮮戰爭, 朝戰, :Корейская война이며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침공”
(이 부분은 국제적으로 비밀 해제된 많은 문서들이 이미 명증하고 있다)으로 발발하여,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과 함께 휴전에 들어간 “전쟁”일 따름이다.
심정적으로는 참으로 억울한 일이지만 받아들여야할 현실이라니 더욱 안타깝다.
필자는 중국 동북지방(옛 만주)의 어느 대학에 교환교수로 가있을 때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을
답사하기 위하여 주말이면 부지런히 여행을 다닌 적이 있다.
집안현의 저 웅혼한 광개토대왕비와 장수왕 능, 그리고 발해의 장미한 석조문화는 내 가슴을
뛰게 하는 대역사였는데 차츰 그 역사의 옆, 현실의 동구 앞에 치졸하게 세워진 시멘트
기념비들에 눈길이 가게 되었다.
그 거친 시멘트 조형물에는 “항미원조(抗美援朝) 기념비”라는 글자가 음각되어 있었고 그 안은
붉은 페인트로 덫 칠이 되어서 미학적으로나 심정적으로 보는 이를 편치 않게 하였다.
더욱이 그 항미원조비의 아래 혹은 뒤에는 중국인들에게 드문 김씨, 이씨, 박씨, 정씨 성의
이름들이 나열되어있지 않은가.
동북지역 여행에 이력이 붙으면서, 그런 기념비는 조선족들이 많이 사는 동네일수록 반드시
서있고 전사자들의 이름도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중국 국적의 의용군이었다. 내 마음 속의 “6-25 사변”은 별 수 없이
국제화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 전쟁”으로 모양을 달리하기 시작하였다.
항미원조전쟁 보다야 한국전쟁이 그나마 수용하기에 낫지 않겠는가.
들리는 바로는 최근 압록강 변 단둥(丹東)에는 거창한 “항미원조 기념관”이 개관되었고
우리나라 관광객들은 그 장대한 건물과 수집물들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어서 자신의
블로그에 열심히 올리는 모양이다.
물론 “우리의 소원-통일”은 언젠가 이루어질 것이다.
대박이든 잭팟이든 보난자이든 표현에 관계없이 숙명적으로 납북은 합쳐질 것이다.
그렇게 된 연후에는 남침이냐 북침이냐에 대한 책임소재도 희석되어질 것이고 수많은 무명의
희생자들은 끝내 들꽃 신세로 산화되고야 말 것이다.
중국과 소련의 허락을 받아내려고 애를 쓴 북쪽 지도자의 노력과 그 오판으로 일어난 전쟁은
마침 세계대전 후의 과잉 군수물자 떨이에 관심이 많던 신흥 강대국의 입장 속에서 3년 반
동안의 참화로 연소되었고---,
이른바 역사의 객관화라는 과정을 거친 그런 해설을 읽을 날이 올지도 모른다.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지금도 그 용어정의조차 애매한 가운데 “한국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
위도 38도선에서는 어느 쪽이 먼저라 할 것도 없는 소규모 총격전이 끊임없다가 마침내
북쪽에서 참지못하고 탱크를 앞세워---.” 정도로 말머리가 장식되지나 않을까.
웨스트포인트에서 98.14라는 거의 신화적 점수로 졸업을 한 승전의 영웅도 종내 국제
전략에서는 겨우 과락을 면한 수준임으로 판명되기도.
내전(Civil War)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일어났고 지금도 우크라이나는 내전상태이다.
스페인 내전도 유명하지만 미국의 남북전쟁도 이 시점에서 한번 음미해 볼 사례가 된다.
미국의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은 흔히 “1861~1865년 노예 제도를 폐지하자고
주장하는 북부와 노예 제도의 존속을 주장하는 남부 사이에서 일어났던 내전”이라고 요점정리가
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총성의 첫발은 남부 연합군이 당겼으나 지금 와서 그 사실은 전쟁발발 배경이라는 큰 프레임에
갇혀서 별 중요성을 갖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그 큰 프레임 즉, 오로지 노예해방의 신념에 불타는 아브라함 링컨의 북부 연방군과
노예제도에 집착하는 남부 연합군의 이념 다툼만으로 남북전쟁은 터진 것인가?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거창한 프레임의 이면에는 항상 뺐고 빼앗김, 실리와 욕심이 똬리를 틀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당시 북부는 상공업이 비약적으로 발전할 때여서 노동력과 대량 소비 시장의 확보가 급선무였다.
유럽으로부터의 지속적 이민도 이때쯤에는 간헐적이 되어 남부 흑인과 가난한 백인 소작농의
인력은 매력적인 자원으로 부각되었다.
또한 남부의 돈 있는 농장주들은 북부의 싸구려 공산품 보다 유럽의 세련된 고가 상품들을
소비하는 행태였다.
대륙횡단 철도 부설문제도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북부 연방은 우선 북쪽 노선을 건설하고
남쪽 노선은 다음으로 하자는 입장이었는데 남부에서는 당연히 불만이었다.
결국 노예해방이라는 지고한 믿음만이 전쟁의 원인 전부였으리라는 전제는 심플한 만큼 순진한
생각일 따름이다.
전쟁이 북부 양키의 승리로 끝나자 남부 딕시랜드에는 우선 전쟁 배상금이라는 어둠이 깔린다.
그러나 이 문제는 금방 시원하게 해결된다.
전후 한 두 해만에 연방정부의 집권을 노리는 양당의 정치가들은 남부의 표를 의식하여
경쟁적으로 배상면제를 약속하고 실천 된다.
그렇게 해도 헤게모니를 쥔 북부는 전후 복구 산업으로 특수를 누릴 일이 많았다.
하지만 남부의 자존심까지 금방 복구되지는 않았다.
남부 정서, 패배와 좌절과 절망을 안으로 삭인 남부 멜랑콜리는 “남부 탈주자문화(Southern
Fugitives)”이라는 특별한 정신적 영토를 형성한다.
그 명칭은 남부 문인들이 “더 퓨저티브스(The Fugitives)라는 문예지를 만든 데에서
유래하였다.
“삐친 사람들”의 문학이라고나 할까,
윌리엄 포크너, 테네시 윌리엄스, 카슨 맥컬러즈 등등 빼어난 문호들이 이 “삐짐”에 속한다.
좋은 문학은 서늘한 가슴, 삐친 마음에서 많이 빚어지고 삐쳐서나온다.
하지만 지금은 돈 있는 북부 사람들도 나이를 먹어 은퇴자가 되면 선벨트 지역이라고 일컫는
따뜻한 남부로 내려가면서 이런 정서는 희석되어 문학사에나 남는 형편이다.
그래도 예전에 세워진 남쪽의 기념비에는 남부의 명예가 강조된 왜곡된 기록이 많다고 하니
지역성은 인간의 본능인가 싶다. 동서독 통합 후에도 동부 폄하의 기세가 한 세대를 지나도
모두 해소되지는 못했다고 한다.
남남통합과 남북통일을 염원하는 우리들도 깊이 음미할 일이다.
유월이 왔다.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도 이달 21일이다. 6-25사변의 발발날짜가 하지에
가까운 건 우연의 일치일 따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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