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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여인" 번역 소식과 문학의식 기행문

원평재 2014. 10. 22. 01:24

 

 

 

 

 




 


이문열 소설가의 "리투아니아 여인"이 현지 리투아니아 어로 번역되어 출간된 소식을 전합니다.

3년여에 걸친 난산 끝에 나온 결과이고 언어 사용 인구로 보아 결코 많이 팔리지 않을 악조건에서

집념으로 이루어낸 결과인가 합니다.

 

계간 문예지 <문학의식> 가을호에 올린 리투아니아 기행문도 올립니다. 

음악은 리투아니아 출신 "이네사 갈란테"의 "아베 마리아"입니다.

 


리투아니아 공화국 대통령 궁


 

리투아니아 기행 

                                                                                            

 

발칸 7개국 여행이 우리나라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재촉하더니 이제는 발틱 3국이

흔한 말로 "뜨는" 추세이다.

두 지역이 발길을 끄는 까닭에는 두루  몇가지가 있겠지만 우리나라 관광객들의 기호와

문화수준도  만만치 않다. 이제는 단순 관광을 재치고 보다 다른 요소, 예컨대 역사의식

같은 것이 발동하는가 싶다. 그것도 영웅호걸이 호령한 거대 국가 지역 보다는 우리처럼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지켜내기 위하여 역사의 단련을 호되게 받고 그 치열한 형상을 간직한

나라들, 말하자면 요새 뜨는 나라들이 바로 그런 예가 될듯 싶다.

여행도 이제는 먹고  마시는 공간의 확보가 아니라 연민과 공감과 동감의 기회 포착에

그 중심을 잡고 있으니 여행사나 가이드들도 더욱 분발할 일이 아닌가 싶다.

 

 

발틱 3국은 특별히 역사나 지리에 흥미를 갖지 않은 사람으로는 그 이름을 외우기도 힘들다.

관광사에서는 흔히 "에-라-리"라고 통칭하는데 순서는 음운상 그리 된 건지 북해 쪽에서

아래로 내려 부른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매력의 등급은 아닐 것이다. 내 경우 인상적 순서라면 

리투아니아를 맨 앞에 두고 싶다.

고백컨데 이문열 작가의 소설, "리투아니아 여인"이 영향을 끼쳤는지도 모르겠지만 

호수 위에 떠있는 아름다운 트라카이 성채, 또 저 기이한 십자가의 언덕(Hill of Crosses),

그리고 수도 빌리우스와 제2의 도시로 내려앉은 타우나스의 갈등, 등등이 내 시야와 의식계를

어른거리는 탓도 큰 것같다

특히 대소항쟁의 상징 십자가의 언덕은 독립을 쟁취한 지금도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또 다른 사유를 이끌어낸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도 개별화가 아니라 아이러니 하게도 집단화에

의지하려는 인간 본능의 적나라한 표출은 아니겠는가---.

 

리투아니아로 들어가며 쓴 일기를 열어본다.

"리투아니아로 들어서서 수도인 빌니우스로 향한다.

간간히 비를 만난다.

원래 리투아니아라는 이름은 리에뚜바에서 나왔는데 뜻은 "비"라고 한다.

자살율이 세계 1위, 매일 술을 마시는 사람을 가리키는 "자뽕"이라는 말도 있다고한다.

마약이 심하여서 매일 주사기를 돌려가며 맞는 족속들도 있다고한다.

전에 북유럽 3국,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를 다닐 때에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것 같다.

이제는 우리나라도 그런 이야기에서 자유롭지 않지---." 

 

리투아니아는 북유럽(북위 55도)에 위치한 인구 3백만의 조그마한 나라,  

국토면적은 우리나라의  1/3수준이고 국민소득은  2만불,

1991년 소비에트 연방에서 독립했는데, 지금은 나토와 유럽연합(EU)회원국이다.

 러시아, 독일, 폴란드 등 지역의 강국과 인접해 있는 약소국으로서 이민족 지배에 의한

피점령 역사로 점철되어 있는 고난의 역사,

빌니우스는 인구 528000명의 리투아니아 수도로 발음나는대로는 빌뉴스 혹은 빌리우스 등

인데 Vilnius라는 뜻이 어쩌면 "새마을"이 아닌가 싶다. 이전의 수도는 카우나스였다니

더욱 그러하다. 한편 카우나스는 역사적으로 수도의 위치를 갖고 있다가 새마을에 모든

것을 빼았긴 아픔을 간직하고 시민들은 항상 불온한 심리상태를 유지한다니 세상사 모두

만만치가 않다.

 

반대로 빌리우스는 오랜 역사적 위상을 되찾아온 느낌이다.

 도시를 지키는 요새, "새벽의 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러시아 정교회, 성 카지미엘스 성당,

빌리우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외부를 자랑하는 성안나 교회, 리투아니아 대통령궁, 빌리우스

국립대학교, 젊음의 거리인 보케츄거리, 성배드로 바울 성당 등 옛 문화의 화려함이 그대로

남아있다. 강대국 사이 피점령국으로서 고난의 역사를 이제는 떨쳐버리고 지금은 평온한

도시로 옛 모습의 일부를 보여준다.

카우나스로 달려가면서 아름다운 호수의 성채 <트라카이 성>도 들러본다. 요트를 타고

들어가 본 꿈결같은 곳이지만 함께한 집사람이 지갑을 도난 당한 험한 기억을 추억으로

만든 곳이기도하다. 유럽이 대통합을 이루면서 외지인 좀도둑들이 늘었다고도 한다.

 

트라카이 호수 성을 떠나 리투아니아의 북부 시울레이에 있는 십자가 언덕으로 향한다.

리투아니아의 독립 전쟁사 중에서도 최근세사인 1918년의 희생이 계기가 되어 이곳

언덕에는 십자가 동산이 생겼다.

 

소비에트 연방 시절에는 리투아니아의 독립의지를 꺾고 기독교 신앙을 말살코자 낮이면

불도저가 언덕을 밀었고 밤이면 사람들이 다시 세우는 십자가의 전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독립을 이룬 지금은 개인적인 추도의 뜻과 기원을 담아서 십자가를 이곳에 심으려는 사람들이

전 세계에서 몰려온다고 한다.  몇 년전만 해도 규모가 지금의 1/3정도였는데, 최근의 추산에

따르면 십자가 수가 5만여에 이른다는 집계도 나왔다.

 1993년 로마교황 성하의 방문으로 더 유명해졌다고 한다.

이제 이 신산한 역사의 나라는 "리투아니아 여인"이라는 소설 속에서 김혜련이라는

주인공으로 육화되어 그 신산한 기시감을 반추케 한다. 

 



한국인이자 미국인이며 리투아니아인이기도 한 그녀, 뮤지컬 음악 감독 ‘김혜련(Helen Kim)'은

뛰어난 음악적 재능과 카리스마 넘치는 리더십을 지니고 뮤지컬 음악 감독으로서, 또한 시립 교향악단의

지휘자로서 매스컴을 장식하며 화려하게 부상한다. 그녀의 불꽃같은 사랑과 3년 만의 파경, 그리고 눈부신 성공

이면의 좌절, 또다시 이 땅을 떠나고야 마는 고독한 유목민적 예술가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주인공 김혜련의 할머니는 1940년대 리투아니아가 소련에 병합될 당시 둘째 딸만 겨우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정착했다. 미국에서 자란 혜련의 어머니는 대학에서 한국 유학생과 결혼해 혜련을 낳았다.

이렇게 리투아니아계 미국인 어머니와 한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혜련은 한국과 미국에서 자라며 다국적

정체성을 갖추기도 하였고 혼란스러움 속에 빠지게도 된다. 그리고 신산한 삶의 여정을 걷는다~.


 

사족을 붙여본다.

나레이터는 이문열 작가 자신이라든지, 리투아니아 여인은 박칼린 교수의 분신이라는 말도있다.

나레이터가 글 중에 한국의 홍위병에게 당한 한국판 "문화혁명"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 더욱

작가와 주인공의 이중인화 억측을 자아낼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또 두 등장인물 간에 단 한번의

근친상간같은 관계가 있었다는 대목에서 속물적 확인 충동도 잠시 일어나게 하지만 모두 작품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고 작가들이 겪는 수모일 수있다.

 

"리투아니아 여인"은 현지 한국 교민의 번역과 빌뉴스 대학교 교수의 감수로 얼마전에

리투아니아 어 판이 출판되었다고 한다. 강인하게 보존되어 온 고유어의 존재에 찬탄하며

어려운 언어로 번역에 임해 온 여러분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다시한번 리투아니아를 생각해본다.

 

(끝)

 

                                                     

 














 


Ave Maria 모음


Caccini 아베마리아

Giulio Caccini 1545-1618

Inessa Galante

이탈리아 로마 출생. 그의 오페라 <에우리디케 Euridice>(1600)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의 하나로 꼽히고 있고, 카메라타의 중심 인물인 카치니( G. Caccini 1545∼1618)와 갈릴레이(V. Galilei 1520∼1591)는 최초로 반주가 딸린 서정가곡을 만들었는데,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곡 '아베마리아'가 바로 카치니의 작품입니다.



slava Caccini 아베마리아

리베라 소년 합창단 Caccini 아베마리아

 

 


마리아 (Maria) :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


가톨릭·동방교회 등에서는 성모(聖母) 또는 성모 마리아라고 존칭한다. 신약성서에 의하면 갈릴리 지방 나자렛 마을에 살았고, 목수 요셉과 혼약하였으나 천사의 계시로 처녀잉태하였다. 출산이 임박하여 헤로데왕의 호적 일제조사 명령이 내려 베들레헴으로 갔으나 숙소를 잡을 수 없어 교외의 동굴 안에 있는 마구간에 들었다가 거기서 예수를 낳았다. 그런데 헤로데가 베들레헴에 장차 왕이 될 아기가 태어났다고 찾아온 동방의 박사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믿고, 이 영아를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화난을 피해 일단 이집트로 피신했다가, 후에 나자렛으로 돌아와 그리스도가 공(公)생활을 시작하는 30세 무렵까지 그 곳에서 조용한 생활을 보냈다. 그리스도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다가, 마지막에 십자가에 처형되자 그 십자가 곁에서 끝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나누었다.

현재 가톨릭의 교의(敎義)에 의하면 마리아는 죽은 후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것을 ‘성모승천(聖母昇天)’이라고 한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신심(信心)은 초대교회 때부터 성(盛)하여 구세주의 어머니로서 숭배되었고, 은총의 중개자로서도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다. 따라서 마리아를 기리는 축일도 많은데, 주의 봉헌축일(2월 2일), 성모의 원죄 없으신 잉태(12월 8일)가 그 주된 것이다. 예로부터 마리아는 회화 ·조각 ·음악 등의 소재가 되어, 화제(畵題)로서는 《성모 영보(聖母領報)》 《성모자(聖母子)》 《피에타》 등이 알려져 있으며, 걸작이라고 할만한 작품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음악에서는 아르카텔트나 구노의 가곡 《아베 마리아》가 유명하다.  

아베 마리아는 그리스도교의 가장 대표적인 성모 찬가로, 고금의 작곡가의 손에 의해 수많은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가사는 라틴어로 되어 있고 루가 복음의 전반부와 15세기 중반 성 베르나르도의 시로 이루어집니다. 또한 아베 마리아는 가톨릭 교회의 주요 기도문 중 GLORIA(대영광송), CREDO(사도신경) 등과 더불어 가장 많이 인용되는 천사의 축복, 성모 영보 때의 마리아에 대한 찬미와 사촌 엘리사벳의 축하 노래가 어우러져 이루어진 기도문을 아름다운 선율로 옮겨 놓은 것이기도 합니다. 

 

이네싸 갈란테의 "아베마리아"

카메라타의 중심 인물인 카치니(G. Caccini 1545∼1618)와 갈릴레이(V. Galilei 1520∼1591)는  최초로 반주가 딸린 서정가곡을 만들었는데, 아름답기 그지없는 이 곡 "아베마리아"가 바로 카치니의 작품입니다. 이네싸 갈란테(Inessa Galante)의 목소리로 감상하시는 카치니의 "아베마리아" 또 다른 아름다움을 찾으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카치니의 아베마리아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세계 무대에 널리 알리게 된 이네싸 갈란테(Inessa Galante)는 리투아니아의 리가라는 도시에서 태어났습니다.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였던 어머니와 테너가수였던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에게 음악은 숨쉬는 공기와도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음악적 재능 또한 천부적이었답니다.

이네싸 갈란테는 1977년 리가 음악학교에 입학하여 Rachel Shulov에게 사사했고 학생 시절부터 리가 오페라 하우스에서 활동을 했습니다. 주로 동구권 국가들에서 연주를 했으며 Kirov Opera에서 정규 소프라노 가수로 활동하게 되면서 모스코와 키에브, 오데사로 그 활동영역을 넓히게 되었다고 합니다.

구노의 아베마리아

미국과 캐나다의 순회공연은 비평가들에게 그녀의 존재에 대하여 주목을 하게 만들었으며 예후디 메뉴인경과 주빈메타는 그녀에게 서부 진영으로의 데뷔를 제안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서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그녀의 서구 활동을 제약하는 커다란 요소였지요. 1991년 리투아니아가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하게 되면서 이네싸 갈란테(Inessa Galante)는 비로소 세계 무대로의 데뷔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92년 독일 만하임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Pamina 역할의 연주를 필두로 1993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오페라 "카르멘" 돈호세의 버려진 애인 미카엘라역을 호연하면서 마침내 이네싸 갈란테는 비평가들과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1995년 Campion Record에서 제작된 "Debut" 앨범의 선풍적인 인기는 세계 무대에 그녀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것이었다지요. 1996년 10월 스코틀란드 왕립 오케스프라와의 공연으로 영국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었고, 1997년 세계적인 첼리스트 로스트로포비치의 70회 생일을 기념하는 에비앙 페스티발에서 연주하였으며 같은 해 7월 뉴포트와 헐리우드 보울에서 연주를 했으며 1998년 12월 런던에서 연주를 하였습니다. 2000년 홀란드 플래티넘 디스트 어워드를 수상하였고, 2001년 1월 12일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공연을 하였습니다.

 

조수미의 "아베마리아"  

카치니의 "아베마리아



 

작은 거인 조수미는 인간의 영혼을 흔드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카라얀은 조수미에게 "신이 내린 소리"라며 총애했고, 프랑스 '르 몽드'지는 "요정들도 조수미의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라고 쓸 수 밖에 없었지요. 그녀의 음악적 업적을 짧은 글로 말하기에는 지금까지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이루었습니다.

그녀는 이미 DG, 필립스, 데카 등 세계 주요 음반사를 통해 이름만 들어도 눈부신 연주자들과 모두 15장 이상의 음반을 발매하였습니다. 94년 9월 조수미의 칠레 연주에서 에두아르도 페리 칠레 대통령은 "한국의 경제 발전은 잘 알려져 있다.

슈베르트의 "아베마리아"

하지만 이렇게 한 개인의 음악을 통해 국가의 이름을 떨칠 수 있다는 것은 더욱 놀랄 일이다. 오늘 처럼 한국이라는 나라가 높이 보인 날은 없었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조수미는 그 해 칠레에서 '94년 최고 예술가상'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1983년 서울대 음악대학 성악과 2년에서 휴학하고, 그 해 3월 이탈리아 유학을 떠납니다.

1985년 이탈리아 산타 체칠리아 음악원을 졸업한 후, 바로 이탈리아 Zonta 국제콩쿨 1위를 시작으로 각종 유명한 콩쿨을 휩쓸기 시작하고 1993년에 이탈리아 황금기러기상(Lasiola Doro)수상을 비롯,  그 해 미국에서 Gramy상까지 수많은 상을 수상합니다. 1986년에 이태리 트리에스테 오페라에서 "질다" 역으로 데뷔하여 1989년 카리얀과 솔티가 지휘한 '가면무도회'의 "오스카"역에서부터 현재에 르기까지  매년 수많은 무대에서 최고의 찬사를 받는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소프라노입니다.

 

 

수년 전 조수미를 주인공으로 한 방송사의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그녀의 성대(聲帶)는 하늘이 만들어준 가장 완벽한 구조를 갖고 있다며 놀라는 외국 전문의의 평가를 본 적도 있습니다만, 조수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첨언하지 않더라도 괜찮으리라 믿습니다.

 

 


Giulio Caccini 기울리오 카치니 1545-1618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라고도 한다. 로마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공부하였고, 1565년부터는 메디치가()를 섬기면서 주로 피렌체에서 활동하였다. 1570년대 조반니 데 바르디(Giovanni de' Bardi) 백작의 살롱에 모이던 카메라타의 설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1602년 피렌체에서 공연된 오페라 《에우리디케 Euridice》(1600)는 지금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오페라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새로운 단선율(모노디)을 개척하였으며, 그가 펴낸 《신음악 Le Nuove Musiche》(1602)과 《새로운 음과 새로운 작곡법 Nuove Musiche e nuove maniere di scriverle》(1614)은 초기 바로크음악의 지표로서 많은 작곡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이 새로운 단선율이란 기교적인 높은 성부의 음성과 훌륭한 꾸밈음에 단순한 코드의 베이스가 뒤따르는 양식으로, 바로크음악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 17세기를 포함하는 가곡 형식의 역사를 거론할 때도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바로크 음악 (Baroque music) :

1600년에서 1750년 사이의 바로크 음악은 극음악이 탄생한 1600년경부터 바흐가 죽은 1750년경을 말하는데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활동한 '카메라타 (Camerata)'라는 귀족 문예인들 모임에서 나온 새로운 음악 관념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대위법적 음악이 가사의 내용을 전달하는데 장애가 된다고 생각하여 가벼운 기악반주 위에서 가사가 명료하게 전달되는 새로운 음악 형태를 탄생시켰는데 이것을 단성음악, 바로 단음악(Monody)이라고 부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