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구 소설가의 생가터를 찾았다.
문학가들의 생가와 족적을 찾다보면 작가의 위상과 달리 그 흔적이 잘 보존되고 말고의 관련이
없음을 자주 보게된다.
이문구 소설가의 경우도 그 하나의 대표적 예가 되겠다.
그는 본디 보령시의 외곽에 있는 관촌마을에서 태어나서 우여곡절 끝에 중앙문단에서 크게
이름을 내고 활약하던 중 병을 얻어 요즘 세태로 보면 다소 일찍 작고하게 된다.
평소의 소탈한 성품대로 일제의 흔적이나 비문 등을 세우지 말고 오로지 태어난 생가 뒤쪽
소나무 언덕에 산골을 뿌려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세월은 흘러 그의 생가터 관촌마을은 도시화의 물결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질 지경이
되었다.
살던 집이나 비문이 세워져있고 사적지로 인정을 받으면 둘레 상당한 지역이 강제로라도 보존 될
터인데 그런 연고가 없으니 아파트 단지로 개발이 되면서 선생의 터전은 곧 사라질 형편에
놓이게 된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시청에서도 새로 문화재나 사적으로 지정해 줄 수가 없는 형편에 이르른 모양이다.
모두 개발 이익에 지배를 받게된 세태 때문이다.
안타까운 정을 모아서 시청이나 관계기관에 탄원서를 내고자 이날 뜻을 모았으나 그 결과는 누구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인근의 집들도 모두 양옥으로 개조되어서 예전의 모습은 찾을 길 없는 중에 그때의 모습을
상상해 보면 대략 이런 정도나마 되지 않았을까.
내 카메라가 괜히 남아있는 편린들을 근거도 없이 담아본다.
주위에는 이미 아파트 촌이 야금야금 들어와 서버렸다.
이문구 작가의 집은 주인이 두번이나 바뀌었고 옛집은 헐려서 양옥으로 바뀌었다.
흔적이라고는 관촌길이라는 이름 뿐이었다.
그래도 주인께서 덕과 지혜가 있는 분이어서 문을 열어주었다.
예전에 에밀리 디킨슨의 고가를 매서추세츠에서 찾아갔다가 가택 침범으로 경을 칠뻔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할머니가 총을 들고 나왔었다.
소설 책인 <관촌수필>은 '일락서산', '화무십일', '행운유수', '녹수청산', '공산토월', '관산추정',
'여요주서', '월곡후야' 의 순서대로 총 여덟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락서산'에서 '공산토월'까지는 글쓴이가 고향에서 보냈던 유년 시절을 추억하는 내용으로
한국전쟁을 전후로 자신의 집안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관산추정'은 어린시절의 친구를 만난 이야기로 대천이 변모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나타난다.
'여요주서'와 '월곡후야'는 성인이 되어서 고향 마을을 다시 찾았을 때 겪은 이야기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정원에는 오래된 이름모를 나무가 서 있다.
연륜은 짐작하기 어려웠다.
석류 노목도 기품이 있는듯, 전설을 머금은듯~~~.
이곳에 작가의 산골은 부려졌다.
십여년전 이곳에 산골이 뿌려졌던 이야기를 김윤자 시인이 설명하고 있다.
김 시인과는 서초문협 회원으로 인연이 있다.
나도 개인적으로 가까운 김승옥 소설가로 부터 이때의 이야기를 조금 들은 바 있다.
여담이지만 김승옥 선생이 말문을 잃은 것이 바로 이때 일산으로 문상을 간 이후부터라고 한다.
그때가 몹시 추웠다고 한다.
본격적인 근대화, 도시화, 산업화의 길을 걷고 있던 70년대에 씌어져, 저자가 유년 시절을
영위한 농촌 공동체에 대한 그리움과 도시화의 물결에 훼손당하고 있던 농촌 사회의 아픈 세태에
대한 묘사를 통해 역설적으로 당시 우리 사회의 근대적 기획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수행하고 있는
연작소설이 관촌 수필이다..
전통적인 유교 사상과 반상 의식에 묻혀 있던 지방 토호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여주는 <일락서산>을 시작으로 <화무십일>, <행운유수>, <녹수청산>,
<공산토월> 등 5편을 수록했다.
요즘은 수능시험에 지문으로 나오는 작품이 또 주목을 받는다.
어디에서 들었던가
선생의 소설작품 <관촌수필>은 두어해 전에 시험에 출제되었다는 소식이 떠오른다..
유장한 문체의 이분 소설 작품이 시험에 출제되었다는 것이다---.
이상문 펜 이사장께서 탄원서 형식의 운동이라도 전개하겠다는 스피치를 한다.
야산 아래 멀찍이 관촌마을 표지석이 있다.
이 선생의 유적지로 주장하기는 좀 어떨까 싶고 그래서 이 표지는 허락을 받는게 아닐까---.
끝까지 아쉬움을 달래는 일행 중 일부의 마음을 버스 안에서 슬쩍 담아보았다.
이문구 소설가 평전
1941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으로 아버지와 형들을 잃고, 이어 어머니가 사망해 15세 때 가장이 되었다. 1961년도에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해 김동리 소설가, 서정주 시인, 등에게 수학하였다. 단편 소설『다갈라 불망비』(1963년)와 『백결』(1966년)이 김동리 소설가에 의해『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우리말의 참맛을 알게 하는 어휘와 문장으로 자신이 경험한 농촌의 현실과 농민의 문제를 그려내어 농민 소설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또한 계간 『실천문학』을 창간하고,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우리 사회의 민주화에 기여하였다. 대표 저서로는 장편 소설『장한몽』, 연작 소설『관촌수필』,『우리동네』,『유자소전』, 소설집『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등이 있으며, 산문집『지금은 꽃이 아니어도 좋아라』,『까치둥지가 보이는 동네』등이 있다. 1974~1984년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간사와 이어 1989년까지 「실천문학」대표로 일하며 민주화 운동에 사생활을 접어두다시피 함. 200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장이 되나 이듬해 발병으로 중도하차하고 2003년 2월 25일 타계. 문학동네 촌장으로서의 문단 통합적 활동과 민주화운동, 그리고 문학적 성가를 모두 인정해 문인협회, 작가회의, 펜클럽 등 문단 3단체가 문단사상 초유로 합동 장례식을 올렸으며 정부에서도 은관문화훈장을 수여함.
'에세이, 포토 에세이, 포엠 플러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단 문고와 내 친구 K 교수 (0) | 2014.11.05 |
---|---|
갈매못 성지와 구노의 아베마리아 (0) | 2014.10.29 |
PEN 헌장비 제막식과 문학기행 (0) | 2014.10.24 |
"리투아니아 여인" 번역 소식과 문학의식 기행문 (0) | 2014.10.22 |
외솔상 잔상 (0) | 2014.1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