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 폭포를 완전 관람하는 행로는 약간 복잡하다.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로 부터 비행기를 갈아타고 잠비아의 리빙스턴으로 들어온 다음에는 다시
육로로 짐바브웨에 들어가서 이 거대한 폭포 관람의 첫 발을 떼게 된다.
입국사증을 내려고 45달러를 내면서까지 이런 경로를 거치는 것은 우선 이 폭포가 두 나라에
걸쳐 있기 때문이지만 열한군데의 관람 포인트를 따르는 것이 일목요연하기 때문이다.
물론 잠비아 쪽에서도 대 장관이 펼쳐지고 또한 상류 쪽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두 지역을 모두 섭렵하는 것은 기본에 속한다.
일단 육로로 두 나라에 걸친 거대 폭포를 답사하고 나면 마침내 헬리콥터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서 이 장대한 흐름을 관조하는 방식이 더해져야만 완전관람이 완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짐바브웨 쪽 빅토리아 폭포 입구에 세워져 있는 탐험가 리빙스턴의 동상
빅토리아 폭포 혹은 Mosi-Oa-Tunya는 잠비아와 짐바브웨사이에 위치한 폭포이다.
빅토리아 폭포는 스코틀랜드인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서 지었으며, 현재는 짐바브웨에서 사용하는 이름이다.
토착 이름인 Mosi-Oa-Tunya는 잠비아에서 공식적으로 사용 중이다.
세계 유산 목록은 두 이름 다 인정한다.
빅토리아 폭포는 너비 1.7 킬로미터와 높이 108 미터의 규모이다.
리빙스턴이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한 이래 30년 동안 유럽의 사냥꾼·낚시꾼·선교사들이 들어왔다.
컬럼버스가 그러하듯 리빙스턴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양갈래 길이다---.
그는 아프리카를 상인과 군대가 드나들도록 하여 기독교 선교활동을 쉽게 하겠다는 즉,
아프리카를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어 선교사들이 쉽게 드나들도록 하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실제로 리빙스턴의 탐험으로 발견된 지역은 모두 영국 식민지가 되었다.
더구나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사람들을 자신과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기독교 전파로 계몽해야 할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여겼다.
물론 이러한 사고는 리빙스턴만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프리카를 검은 대륙이라고 낮춰
부름으로써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려는 제국주의 시대 유럽인들의 사고방식이었다.
폭과 깊이가 나이애가라 폭포의 2배 이상인 이 폭포는 강이 최대 너비인 곳에서 강과 같은
너비로 펼쳐져 있으며,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최대 108m의 낙차를 이루며 떨어진다.
연평균 유수량(流水量)은 935㎥/sec이다.
폭포에 가까워져도 강의 흐름이 빨라지지 않으나, 우렁찬 폭포소리와 물안개로 폭포에 다가
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때문에 칼롤로로지족(族)은 이 폭포를 '천둥치는 연기'라고 불렀다.
폭포 가장자리에서 45m 떨어진 곳에서도 폭포소리가 천둥소리같이 크게 들리며, 물보라 벽이
공중으로 305m 이상 튀어올라 65㎞ 떨어진 곳에서도 이 광경을 볼 수 있다.
1905년에 폭포교가 완성되었고 1904년 불라와요에서 철도가 들어왔으며,
1938년에는 '제3협곡'의 사일런트풀에 발전소가 세워졌다.
잠비아 정부는 수력발전소를 포함해서 이 회사가 소유하고 있는 모든 이권을 사들였다.
작은 이구아나가 쉴새없이 다닌다.
저 포말, 물보라가 또한 장관이다.
천둥 연기, 물보라, 영어로는 무어라고할까
Thunder Spray~
잠비아 쪽에 서있는 리빙스턴의 동상
국경지대의 풍경이 재미있다~~~.
잠비아 쪽에서 바라본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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