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사람들에게 바칩니다)
북한산 포럼 (이야기가 있는 신춘 수필)
김유조
C 형!
“정 이월 다가고 삼월이라네”
옛 가락이 흥얼거려집니다. 세월이 참 빠릅니다. 이제 강남 갔던 제비들도 돌아오겠군요.
쏜살같은 세월에 나이만 축내고 있으니 한심합니다.
겨우내 위축되어 글밭을 멀리했는데 봄 향기 풍겨오니 절로 글 춤이 나옵니다.
들은풍월대로라면 소설 장르는 무너져가고 수필에도 시 같은 수필, 스토리가 있는 산문,
현장 기록물 등등 종류가 많으니까 이번 제 편지글은 세태반영의 “풍속 산문”이라고
이름 지어 봅니다.
긴 글을 기피하는 추세라면 스마트 폰으로 읽는 수필, 곧 스마트 수필, 심지어 “경 단편”
이어도 좋겠군요.
주제는 우리 주위에 늘어만 가고 있는 치매와 우울증 관련입니다.
무대는 우선 지하철인데 차츰 산행 쪽으로 올라갑니다.
#1. “영 안 들리네! 전화기가 뭐이래?!”
노년 석에 앉으신 영감님이 불평 가득히 외칩니다.
하하, 그런데 가만히 보니 전화번호가 적힌 수첩을 휴대폰으로 착각하고 외치는
목소리입니다.
#2. “얘, 내 핸폰이 어디 갔지?”
이번 경우는 할머니가 자기 핸 폰을 입에다 대고 핸 폰 상대방에게 안타깝게 묻는
장면입니다.
“잘 찾아봐라 얘, 나도 지금 핸 폰이 어디 갔는지 없어졌어.”
할머니들의 동병상련, 해프닝입니다.
#3. 노인이 신발을 휴대폰처럼 얼굴에 대고 있습니다. 방금 핸 폰을 떨어뜨렸는데 얼른
주워서 귀에 댄다는 것이 벗어뒀던 자기 신발입니다.
떨어뜨린 핸 폰은 발에 꿰고 있습니다.
세 가지 경우가 모두 우리 시대의 희화적 표현들이지만 탄식과 함께 축복의 장면이기도
합니다.
사실 나이든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일은 온 인류가 추구해온 목표이자 목적이 아니었던가요.
이런 현상에 나는 한번이라도 회의하거나 이의를 달아 본 적이 없습니다.
인류사의 “장수 트렌드”에 시비를 건다면 수명을 다루는 신에 대한 오만과 불경으로 비칠까
두려운 탓인지도 모릅니다.
국가적 요양복지 비용을 근심하며 장수현상에 비명을 지르는 관계자들의 근심이야 당연히
국록의 몫으로 회계처리 되어야겠지요.
다만 장수 트렌드와 필연코 함께하는 주변인들의 우울증 신드롬은 내 몫의 관심사입니다.
말하기는 뭣 하지만 치매 진입의 바로 전 단계라고도 하는 우울증 혹은 조울증의 경우를
주위에서 심심치 않게 보게 되는군요.
확실치는 않아도 이 증세에 남성보다는 여성 쪽이 더 빨리, 더 많이, 더 깊게 빠져든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감수성의 차이 때문인가 합니다.
C형은 잘 나오시지 않지만 “재경 Q 고교 등산모임”이 있습니다.
거기에 간혹 Q 여고 졸업생들이 합류합니다.
모두 그간의 세속적 계급장은 다 떼고 할아버지 할머니라는 인생신분증만을 품고 나오기에
마음들이 편하지요.
아, 물론 완전 해탈은 아니고요. 이성간의 의식조차 해탈이라면 죽은 목숨 아닙니까.
산속이라지만 속세의 먼지는 다소 묻히고 다니지요.
우리의 고향인 Q 항구도시는 짠물이라는 오명도 있지만 Q라는 이름을 단 명문 남녀고교가
있어서 오랜 자랑이 아닙니까.
형이나 내가 거기 출신이라는 것은 기본축복인데, 가끔 Q 여고 출신이 이물 없이 끼어드는
날의 Q 고교 북한산 산행모임 날은 만복일입니다.
현대의 보편적 우울 혹은 조울에 시달리던 동문 향우들이 고교시절 회상하며 “큐하게,
또 쿨하게” 생활 속의 치유에 몸을 던지니 서로가 만복입니다.
“저 우울증이에요. 그런데 북한산 Q 포럼이 힐링 장이라고 향우들 간에 소문이 자자해요.
수련과 재미 충만한 분위기에 마음의 병도 고친다고요? 사추기에 사춘기의 가슴이 뛰네요.”
이런 식의 신고식은 보통 산정에서 점심을 할 때 거행됩니다. 정상주도 한잔하지요.
신고식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지만 어떤 Q 여고출신은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하고 노래를 불렀는데 정말 봄 처녀가 되어 그 계절이 가기 전에 마음의 병이 나은 적도 있고
어떤 가을의 여인은 낙엽 따라 왔다가 그 해가 가지전에 열매를 딴 적도 있었습니다.
일행 중에는 의사도 있고 수의사도 있고 약사와 변호사도 있지만 내색들은 않고 그저 전체
분위기가 진단, 처방, 조제, 주사 같은 처치를 셀프로 해버립니다.
북한산 포럼에 들어오면 늦어도 대략 석 달 열흘이면 병이 낫기 시작하지요.
백일기도 같은 효과라고나 할까요.
C 형!
위에서 말한 새로 들어온 사람은 이름이 “신선녀”라고 했는데 가명일수도 있지만 아무도
따지지는 않았지요.
다만 “신선”이나 “선녀” 쪽 보다는 어우동이나 황진이 쪽에 더 가깝다는 평가분위기가 금방
떴지요.
그런데도 역시 석 달 열흘 산행이 진행되면서 그녀는 서서히 “신선녀”가 되어간 것입니다.
그게 금방 쉽게 진행된 건 물론 아니고 사실의 과정은 이렇습니다.
한 두 달이 지나도 진도가 나가지 않고 소통은커녕 단절 분위기가 팽배하던 어느 산행의 날,
그녀가 정상 주를 몇 잔하고는 가슴을 풀어헤치고 사자후를 토합니다.
“너무 답답해요. 계급장만 떼니까 안 되겠고 이제 SSKK 경로로 나갈께요!”
SSKK?
모두들 암호 같은 뜻풀이에 골똘 하는데 성미 급한 그녀가 그날따라 다소 과음한 상태로 답을
내 놓습니다.
“SSKK, 시키면 시키는 대로, 까라면 까겠다 이것입니다.”
진정 심신을 낮추는 그 순간 그녀는 구원을 받습니다.
감출 것도 없이 현주소가 다 쏟아져 나오며 감정이 교류되는데 막히고 맺힌 데가 있을 리
없지요.
그런 날은 늦은 밤 노래방 치료 효과도 병진됩니다. 일종의 강화효과이지요.
“가로등도 아직 켜지지 않았는데 집을 찾아갈 수 있으랴”
이런 잠언이 강화효과를 합리화합니다.
C 형!
작년도 세밑에는 Q 여고 출신의 캐나다 교민이 홀연 나타났습니다.
12월 초였습니다.
역시 전설 같은 소문을 듣고 북한산 자락에 등장한 것입니다.
산행 복장에도 사치의 극을 달리는 경지가 있다더니 그녀가, 그녀의 옷이 그러하더군요.
무슨 아우터라던가, 뭐 겉옷 하나에 백만 원이 넘는다던가.
그건 그렇고 출국일자가 다음날인데, 미리 알고 출국날짜를 늦잡았더라면 다음 주 납회잔치에도
나오는 건데---,
그날 산행도 역시 환상적으로 끝날 무렵 그녀가 울 듯 억울해 하였지요.
비싼 아우터는 무관심과 무시 속에서 배낭 속으로 이미 벌써 사라졌고.
물론 평소 마음의 문을 꽉 닫고 살던 사람이 아무리 산속에서 도인들과 떼로 만났다 할지라도
금방 문을 열었다는 게 뻥이 아니냐는 논란이 따를 것입니다.
사실 신선녀도 경지에 도달하는 데에는 몇 달 걸렸잖아요.
하지만 환경조견에 따른 개인차가 있지요. 멤버 중에는 한때 심장수술을 오백 번도 더 넘게
집도한 외과 의사나 석 달 열흘 유라시아 대륙을 자전거로 일주하고 매스컴에 오르내리던
명사도 이곳에서는 묵언수행을 하는 분위기니까 그런 용광로에서 감기증세정도의 우울증이
어찌 금방 녹아내리지 않으리까.
아, 그런데 바로 그 다음 주 납회등반에 그녀가 또 나타났다는 것 아닙니까?
지난주에 받은 기쁨이 너무나도 크고 넘쳐흘러서 페널티를 물고 비행기 표를 바꾸었다고
합니다.
우울증 신드롬에 걸린 심신에 무언가 서광이 비치더라는 것입니다.
한해 산행을 마감하는 도인들의 납회대열에 다시 참여, 우선 묵은 때의 일부나마 벗기고
가겠다는 것입니다. 송구영신이 따로 없습니다.
“외국생활이 다 빠듯하잖아요, 자주는 못 와도 들락거리고 싶어요. 우울증 치료 받는 비용으로
여기 올래요. 이번 12월의 납회에서 해묵은 제 정신 일부도 산속에 버리고 갈래요.”
그녀가 백 팩에서 낮은 도수의 알콜성 스파클을 꺼내더니 일행의 술잔에 한 순배 돌리고
건배제의를 합니다.
“리멤버 디셈버!”
그녀의 절규에 포럼 멤버들이 모두들 잔을 부딪고 질세라 화답을 했지요.
“리멤버 이 멤버!”
그러자 신선녀 회원이 캐나다 여인의 인기에 발끈합니다. 아직 북한산 수양의 끼가 몸과 마음에
고루 효험을 발휘하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저 여자 모야, 늦게 들어와서 팜므파탈같아,”
아하, 이런 비교의식이 우울증의 덫이 됩니다.
일찍이 버트란드 러셀도 “모든 비극은 비교의식에서 나온다”고 하였지요.
하지만 여기 흔들릴 북한산 포럼이 아닙니다.
오래 암벽등반을 해온 Q 여고 출신의 “여성 빙벽 상” 수상자 미즈 강이 누가 담아온 시커먼
야관주를 한차례 돌리고는 매섭게 건배선창을 합니다.
한때 아이스하켄을 최고 난코스의 빙벽크랙 속으로 깊이깊이 처박듯 꽂아 루트 개척을 하고는
해머로 앵커를 단단히 박고 나서 “앙카아 바싸!”를 외치던 목소리가 카랑카랑합니다.
“이런 모임~~~~” 그녀의 선창입니다.
“흔치않아, 흔치 않아”
포럼의 남자들이 입을 모아 화답하는데 어깨춤과 율동까지 맞춥니다.
“아무렴, 북한산속 포럼에서는 팜므파탈인지, 팜므파탄인지는 숨 쉬지 못하지. 팜므파탄은
속세에나 있지.”
포럼의 도인 같은 어떤 대원이 한 치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장외정리를 하였습니다. (끝)
그려도 움직이는 한 폭의 비단
저기 빨간 단풍으로 색칠한 산은
의연히 손짓하며 우릴 부르네
대관령 아흔아홉 대관령 굽이굽이는
내 인생 초록물 드리면서 나그네가 되라네
저기 찬 바람 하얀 눈 소복한 산은
누구를 기다리다 봄은 머언데
저기 진달래 철쭉으로 불타는 산은
구름도 수줍어서 쉬어 넘는데
대관령 아흔아홉 대관령 굽이굽이는
내 인생 보슬비 맞으면서 나그네가 되라네
당시 작곡자는 KBS 방송 PD로서,
시인이며 방송극작가인 신봉승님과 손잡고 만든 곡.
대관령의 신비스럽고 변화무쌍한 사계절(四季節)의 모습을 담았다.
산안개를 보는 듯, 곡 첫머리 호른 연주가 인상적이다.
[자료출처 : 박경규의 제2작곡집 "동강은 흐르는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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