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공항에서 두시간 십오분만에 가볍게 오키나와의 나하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여행의 목적이랄까, 마음의 행로는 언제나 자유로운 영혼의 추구, 일상에서의 문득
탈출이 아니겠는가.
가까운 섬나라 오키나와로 향하는 내 마음은 특별히 그러하였다.
마치 아무 준비도 없이 무인도를 찾아서 떠나는 기분이랄까. 무방비의 전율과 함께.
원거리 여행에 식상한 내 심신은 오키나와가 가까이에 있다는 것만도 다행스러웠다.
정말 비행기는 이륙하고 얼마되지도 않아서 고도를 낮추더니 구름을 헤치고 금방
쪽빛 계열의 태평양 큰물 위를 낮게 유영하는게 아닌가.
그리고 그것도 금방,
찰랑이는 에메랄드 물결 속에서 소라와 거북의 등같은 자그마하고 오밀조밀한
뭍을 찾아내더니 가볍게 터치다운을 한다.
나하 국제공항!
그런데 짧은 비행시간 도중, 내 마음에는 비행운같은 구름이 끼기 시작하였다.
그 시간에 쪽잠이나 잘 것을, 잠깐 시간에 부지런히 들여다본 인터넷 정보망에서는
류큐 제도로 구성된 오키나와 땅의 역사와 현상이 그렇게 만만한 동화의 나라만은 아니라는
사실들을 깨우쳐주었다.
늦게야 대오각성인가, 차라리 미리 공부를 좀 하고 올것을~,
아니야 그랬다가는 마음만 더 무거워졌을걸, 오지 않았을지도 몰라.
일상이나 여행이나 세상사에서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가 가능하랴.
그냥 여행객의 가벼운 마음으로 갈 데까지 갈 때까지 가 보는거야.
여행객의 마음에 구름이 낀 원인은 인터넷에서 본 다양한 오키나와의 정보 중,
삼별초와 율도국, 오키나와 왕국의 흥망사 그리고 태평양 전쟁의 마지막 격전 등등의 키워드가
마음의 그물망을 뒤흔든 탓이었다.
다만 다행인 것은 보딩브리지를 벗어나 공항 밖으로 나오니 해풍이 서늘하게 환영인사를 한다.
공항 밖에서 이곳 체류의 젊은 한국인 가이드를 만났는데 말씨와 제스추어가 일본인같다.
예의 바른 점은 장점이나 일본인 특유의 단정함이 단점같기도 하다.
첫번째 관광지는 오키나와 월드, 류큐 왕조의 아름다운 옛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인데 나중에는
전통 "하부 춤"이라는걸 공연하면서 뭐 대단하다고 사진도 잘 찍지 못하게 한다.
춤사위가 비밀이란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거의 광적으로 사자상을 곳곳에 암수 구별하여 세워놓고있다.
여염집 지붕 위에도 물론 올라가있다.
이 작은 강토에도 한때 사자들이 있었고 그래서 파도처럼 끊임없이 닥치는 외세의 방어를 위한
토템이 되어 그들의 생활 속에 자리한 모양이다.
전통 춤마당과 사자 상을 보니 다음은 류큐 국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차례이다.
류큐국은 1429년, 쇼하시 왕(일본어: 尚 巴志王 )에 의해 작은 부족국가들이
통일되며 건국되었다.
애초 이보다 조금 앞서 고려시대 삼별초가 1273년(원종 14년)에 제주도에서 몽골군에 패한 후
오키나와로 들어와 류큐국(슈리국, 首里國)을 건국했다는 설도 있다. 우리 식으로 바라본 단순한
애국전설이 아니다. 류큐 문화의 전통 속에 바로 이 시대부터 고려의 축성 방식과 문물, 특히
기와 막새 문양, 생활 풍습 등이 갑자기 등장한다.
3박4일간의 여정 중 하루를 왕궁인 슈리성(首里城)에서 보냈는데 여러 모습들이 고려성의 특징
이라고 한다. 제주도에서 해류를 따르면 이쪽으로 자연스레 이동이 되는 점도 보통이 아니다.
지금도 한국산 쓰레기, 라면 봉지 등이 해류를 따라 많이 흘러들고있다.
한편 "홍길동전"의 마무리 부분에서 길동은 조선의 현실에 절망을 하고 "율도국"으로 가서 그의
이상을 편다고 되어있는데 그곳이 어디메일까?
물론 이상향의 전설, 예컨데 바이킹의 발할라 같은 곳은 세상 어디에나 있지만, 하여간 홍길동이
찾아간 발할라는 이곳 오키나와라는 전설도 그럴싸하게 존재한다. 귀담아 들어볼 정황이다.
옷깃을 여밀 필요도 있다. 현실에의 불만과 절망은 어느 시대 어느 곳에나 존재할 수 있으나
오늘날 우리나라의 갈기갈기 찢어진 민심을 돌아볼 때 홍길동의 심사에 동정이 간다.
슈리국, 류큐는 한때 일본, 조선, 중국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의 왕조들과도 무역을 하는 등
전성기를 보낸다. 하지만 16세기 후반 명나라가 활발히 무역을 재개하고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세력이 커지면서 류큐의 세력은 급격히 쇠퇴한다. 1609년 일본은 전국시대가 끝나고 지역정권인
사쓰마 번이 침공해왔다. 류큐의 수도 슈리성(首里城)은 함락되며 일본의 조공국이 된다.
류큐국은 중-일 양쪽에 모두 조공을 바치나 일본은 끝내 류큐국을 멸망시키고 일본의 영토로
편입시켜 오키나와 현을 설치하였다. 류큐국의 쇼타이 왕은 일본 메이지 정부에 의해 강제로
토쿄에 이주당해 후작에 봉해지진다.
이 과정은 우리나라의 경우와 똑 같아서 비분강개가 치민다.
(일본이 류큐를 침략하는 과정은 조선 침탈과정과 비슷했는데 1879년 완전 합병에 앞서
1872년, 메이지 정부가 임의로 류큐를 번(藩)으로 바꿔버렸으며, 이듬해에는 외교권, 사법권을
빼앗고 고유언어를 금지시키고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였고, 본토의 일본인을 섬으로 이주
시키는 등 사실상의 동화정책을 펼치게 된다).
류큐는 이제 일본식으로 "오키나와"라고만 불리게 된다.
왕국의 부침과 멸망과는 별도로 관광은 계속된다.
특히 하늘에서 보던 에메랄드 바다와 그 해변 연안으로 글래스 보트를 타고나가서 배의 유리
바닥으로 심해를 구경하는 맛이 남다르다.
아름다운 바다 물고기의 헤엄치는 모습은 아름답고 앙징스럽다.
관광의 행로는 다시 오키나와 현청 소재지 나하 시(那覇市)의 아메리칸 빌리지로 향한다.
쉽게 비교하자면 우리의 용산 미군기지와 이태원을 연상하면 되겠다. 주둔 규모는 우리보다 크고
역사도 더 오래되었으며 아울러 미군의 숫자도 훨씬 더 많다. 미군과의 혼혈도 벌써 3-4세까지
이르러서 신세대 인종이 넘실댄다.
문자 그대로 큰 마을을 이루니 아메리칸 빌리지가 아닌가 싶다.
류큐인들은 원래 일본 왜인들보다 몸이 큰 편인데 혼혈족들은 더욱 일본인들보다 크고 언어도
영어를 많이 쓴다.
나하 북쪽의 후텐마(普天間) 미해병기지, 가데나(嘉手納) 미공군기지에는 성조기와 일장기가
나란히 걸려있다. 태극기와 성조기가 어깨를 함께 한 광경에만 익숙한 시야에는 묘한 부조화를
보는듯하다. 하지만 사실은 지금까지 내 식견이 좁은 탓이다.
아메리칸 빌리지에서는 오키나와의 현대사를 생각하게 된다.
1945년 2월 10일 패색이 짙은 일본 어전 회의에서 일왕은 항복 의견을 내놓았으나 오키나와에서
일전을 결하자는 것으로 결론이 난다.
일본 본토에서의 결전을 피하되 항복을 최대한 늦춤으로써 전후 처리에서 유리한 입장을 갖자는
묘책이었다. 패전의 경우에도 일본이 두 토막 나지않고 속국 오키나와를 미국에 할양함으로써
도마뱀 꼬리 자르기 전술을 펴자는 꾀가 나온 것이었다.
결국 두 토막이 나버리고 전후 체제의 마무리 단계에서 참화를 겪은 곳은 한반도가 된다.
오키나와 전투의 개황을 간략히 살핀다.
1945년 3월 26일 새벽, 미군은 오키나와 본섬 동쪽에 있는 "게라마" 에 상륙한다. 미일간
최대 지상전이 시작된 것이다. 4월 1일에는 오키나와 본섬 동해안에 미군이 상륙했다.
그로부터 약 3개월간 거대 병력 54만명의 미군이 류큐의 왕성 옛터에 투입되었다. 이에 비해
일본군의 병력은 겨우 6만여명, 부족한 병력을 채우기 위하여 만 14세에서 70세까지의 오키나와
남성과 여학생까지 전쟁에 강제 동원된다.
세계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고 비참했던 오키나와 전투는 희생자 총
30여만 명 중 류큐 주민이 22만여명, 미군이 약 1만 2천명, 일본군이 약 5만 5천명, 징용이나
종군 위안부로 끌려온 한국인 약 1만명으로 군인보다 류큐 민간인 사상자가 훨씬 많았다.
한국인 희생자의 위령탑은 관광 코스 그 어디에도 없으니 통탄할 일이다.
오키나와 북부의 토카시키라는 섬에는 아리랑 위령비가 있다고 한다.
일본군이 패하여 마지막 자결이 강요될 때 수많은 현지 주민들뿐만 아니라 위안부로 끌려왔던
우리나라 젊은 여성들도 포함되었는데 그 원혼을 달래고자 한 초라한 비석이라고 한다.
위령비는 21명의 위안부 여성들이 이곳에 끌려왔다가 1945년 3월 26일 일본군에 의해서
학살당한 사실을 1997년 10월 14일에 기록하여 우리쪽 뜻있는 사람들에 의하여 세워졌으나
그 경과는 소상하지가 않다.
오키나와에서도 발길 닿기가 쉬운 곳에 이러한 위령비가 세워지기를 기원해본다.
미군정은 "오키나와"란 일본식 용어 대신에 원래의 "류큐"를 장려했으며 일왕의 연호사용도
금지했다. 류큐인은 일정기간의 자치 뒤에는 독립할 수 있다는 희망에 부풀었다.
1962년 사모아 독립에 이어, 1970년 피지와 통가 등 류큐보다 면적이 작고 인구가 적으며
역사도 일천한 태평양상의 여러 군도들이 독립국이 되자 류큐 독립도 이루어질 것
같았다. 류큐의 독립지사들은 일본제국에 무력 점령되었던 옛 류큐 왕국을 류큐 공화국
(琉球共和國, Republic of the Ryukyus)으로 되살리고자 "류큐독립당"을 창당하였다.
하지만 1972년 5월 15일, 미국은 일본에 오키나와 반환을 선언한다.
그 후 류큐는 다시 ‘오키나와’로 불리게 되었고 일본 본토에서 오키나와로 가던 국제선은
국내선이 되고, 우측으로 달리던 차량은 좌측으로 달리게 되었다.
미국은 거대국가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막기위하여 "목걸이 전략"을 쓰고있다.
남태평양의 여러나라와 달리 오키나와는 중국의 바로 아래 목줄에 위치해 있으니 필리핀,
대만에 이어 일본 본토와 이어지는 주렴의 주요 부분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10만 여명의 오키나와인들은 예전같이 일본의 식민지 속인으로 학대 받지는 않고있다.
또한 쏟아져 들어오는 중국 관광객들은 우호적 고객이기도 하다.
대만까지는 배로도 두시간 거리이고 맑은 날은 육안으로도 보인다고한다.
지정학적으로 묘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하겠다.
우리말 관광 안내판이 관광객 쪽 수에서 벌써 앞서가는 중국어의 위쪽에 아직은 자리잡고 있는
현상이 언제까지 갈 것인지, 전략적으로 그냥 지속될 것인지---.
3박 4일 관광객의 마음이 공연히 가볍지만은 않다.
이곳 해양 엑스포 박물관은 1975년의 해양 엑스포를 기념하여 1976년에 개관하였다.
산디에이고의 시포트 박물관을 본따왔다는데 돌고래 쇼가 일품이었다.
이곳에서도 동물 보호협회가 있어서 반대 시위를 하지나 않는지 궁금하다.
하지 않을 것이다. 하더라도 일종의 문화인 흉내, 체면치례 쇼만 하고 실속을 차릴 것이다.
만좌모, 만명이 앉아도 좋다는 석회암 해안가의 평지, 코끼리 모습의 해식암 풍경이 절경이다.
오키나와 시내 최대 번화가인 국제 거리에 들어왔다.
오키나와 번영, 부활의 기적을 상징한다는 "1마일 거리"이다. 우리의 명동 거리나
로데오 거리에는 못 미치지만 여기는 시골 바닥이 아니던가.
우리나라 관광객 못지않게 중국인들이 휩쓸고 다닌다.
국제 거리에 옆으로 터진 전통 시장, 서울로 치면 가로수 길에 세로수 길 같다는 비유가 적당
할는지---.
지상 전철의 역 이름에 한글이 친절하게 붙어있다.
국제 거리
전통시장
관광 일정 중의 하루는 슈리성(首里城) 관람이다. 오키나와 류큐 왕국의 수도이자 고려 삼별초의
전설이 서려있는 이 성은 제2차대전 때에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최근 다시 재건, 축조되어
관광객들을 맞고있다.
쇼하시가 류쿠왕국을 세운 이후 450년간 역대 국왕들이 머물던 슈리성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대부분 파괴되었으나 1992년부터 재건을 시작하여 현재는 복원이 거의 완료된 상태이다.
성은 중국의 건축물과 매우 흡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오키나와가 지리적으로 대만과 중국 본토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 상기된다.
성으로 올라가면 먼저 수례문(守禮門슈레이몬)이 길손을 맞이한다.
수례문은 16세기 초에 건축되었으나 파괴되었다가 1958년에 복원된 것이다.
이 문은 지폐에도 등장하는 오키나와의 상징이다.
이날은 비까지 내려서 나그네의 발길은 더욱 착잡하다.
일종의 상실감 같은 것이 작용하였달까,
최근세사에서 소멸된 일만명 동포, 해류의 끝에서 이곳에 가까스로 닿았던 삼별초, 그리고 홍길동,
모두 빗속에서 일렁이는듯 하다.
사실 그냥 즐거운 마음으로 지나가버리면 그만인 것을 공연히 심사가 어지럽다.
사족을 달자면 수리성은 유네스코 역사 유적으로 등재되었다지만 사실은 유적지만 그런 자격을
얻었다.
성벽과 본체의 정전은 모두 새로 재건, 재축조되었기에 자격을 얻지 못하였다고 한다.
멀리 나하 항구가 보인다.
대항해 시대에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대선단도 들렀던 곳이라고 한다.
지금은 크루즈 선박이 정박하여 관광객들을 쏟아낸다. 나그네의 심사가 복잡하다.
(오키나와 기행 끝)
글룩 / 오르페오와 에우디리체 중 '정령들의 춤'
Gluck, Christoph Willibald 1714∼1787, 墺)
Dance of the Blessed Spirits
James Galway, flute
'에세이, 포토 에세이, 포엠 플러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좋은 만남 10월호 (드라큘라 성) (0) | 2016.10.06 |
---|---|
국제문예 가을호 (시 두편, 논단 하나) (0) | 2016.10.04 |
제2회 한글작가대회와 경주 재난에 대한 선언문 낭독 (0) | 2016.09.27 |
여행작가 9-10월호 (0) | 2016.09.09 |
더블린 2 (제임스 조이스, 트리니티 칼리지, 시내 풍경) (0) | 2016.09.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