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뽈 드 방스"를 황혼에 출발하여 "아비뇽"에는 밤중에 도착하였다.
이어 새벽부터 아비뇽의 올드 타운, 한때 교황청이 있던 성채 안으로 들어갔다.
아비뇽은 중고등 서양사 시간에 "아비뇽 유폐사건 Avignonese Captivity"으로 익히게 된 곳이다.
지금은 "아비뇽 유수(幽囚)"라고 하는 모양이다.
로마 교황청 쪽의 시각으로 보면 유수, 프랑스 쪽의 시각으로는 유폐인가, 아니면
그 말이 그 말인가--. "바빌론 유수"에서 의미와 표현의 대칭을 본다.
파리에서 남쪽으로 680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아비뇽은 프로방스 지방의 중심 도시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잇는 도로의 요충지라는 위치 덕분에, 일찍부터 지방 상업의 중심지로
번영을 누리며 남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중세 시대 로마 교황청과 프랑스 사이의 세력 다툼이 끊이지 않을 때는 로마의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옮겨 오면서 가톨릭의 중심이 되었던 적도 있다.
1309년 클레멘스 5세부터 68년 동안 7명의 교황이 아비뇽에서 체재했는데, 바로 이 사건이
유명한 ‘아비뇽 유수’이다.
1995년 구 교황청과 그 주변 건물들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교황 궁(Palais des Papes)에는 8개의 탑이 있다. 현존하는 최대의 성채 가운데 하나인 교황 궁은
두개의 건물로 되어 있다.
그중 팔레 비외(古宮:1344~42)는 엄숙한 분위기를 풍기는 반면, 팔레 누보(新官:1342~52)는
건축소품들과 장식물들이 많아 화려한 느낌을 준다.
작은 예배당이 많이 있으며 14세기의 프레스코로 장식된 대규모 예배당도 3개 있다.
교황 궁이 있는 성채 입구
도로 표지에 님므(Nîmes)가 보인다. 이번에는 이곳을 들리지 못하여 아쉽기 그지없다.
님므는 고대 로마 시대로부터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으며, 로마 유적지가 많이 남아 있다.
청바지 데님(denim)은 ‘ 님므(Nimes)의 옷감’이라는 의미를 가진 ‘드 님므(de Nimes)’로부터
유래되었다.
님므의 "꺄레다르 현대 미술센터"도 유명하여 이우환 화백도 전시를 한 것으로 기억된다.
그보다 가장 아쉬운 일은 알퐁스 도데의 출생지라는 점이다.
하지만 도데는 넓게 보아 전체 프로방스 지방의 작가라고 보면 마음의 위안이 된다.
아이젠하워 장군도 이곳 아비뇽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다.
성채로 들어오자 아름다운 아비뇽의 처녀가 미소로 맞이한다.
프랑스의 시인. 19세기에 프로방스 어문학의 부흥을 주도했고, 1904년에는 문학과 언어학에
이바지한 공로로 노벨상을 받았다.
1854년에 몇몇 친구들과 함께 프로방스어와 관습을 유지하기 위한 모임인 '펠리브리주'를
창설했고, 나중에는 범위를 남부 프랑스 즉 '오크어의 지방' 전역으로 넓혔다.
"오텔 드 비유"는 시청이라는 뜻이다. 호텔이 아니고~~~.
아비뇽 다리 (쌩 베네제 다리)라는 표지가 보인다. 아비뇽을 떠날 때 들린 곳이다.
교황 궁(청) 건물과 광장
교황청 건물 입구
아비뇽은 이탈리아와 프랑스문명의 교차점으로 번영했으나 1,789년 대혁명때 파괴와 약탈 을
당해 황폐해졌으며 지금은 여름에 연극과 페스티벌이 열리는 장소가 되었다.
역사에서는 아비뇽 유수라고 부르는데 고대에 유대인이 바빌론에 강제 이주된
고사를 본떠 “교황의 바빌론 유수”라고 한다.
13세기 말부터 교황권에서 벗어나던중에 프랑스왕 필리프 4세 는 삼부회의를 소집하여
제후와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은후 1,303년에 성직자의 국왕에 대한 납세를 금지한 교황
보니파시오 8세 와 싸워 승리한다.
교황이 사망하고 추기경들이 분열하자 1305년 프랑스왕의 입김으로 선출된 교황
클레멘스 5세는 리옹에서 대관식 을 갖는등 프랑스 왕 의 강력한 간섭을 받았으며 다시는
로마 로 돌아가지 못한다.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십자군 전쟁이 실패한후 프랑스로 돌아온 템플(성전) 기사단 은
신도들로부터 토지등을 기증을 받아 거대한 부를 축적해 프랑스왕의 시기심을 샀다.
필리프 4세는 1,307년에 이들을 이단으로 고발 하고 잔인무도한 고문으로 기사 54명을
화형 에 처하고 재산을 몰수할 때 교황은 국왕의 위세에 굴복하고 동조 하였다.
이단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해산된 템플 기사단은 후일 유럽 문화의 곳곳에 신비주의의
흔적을 남겨놓았다.
비밀 결사 ‘장미 십자회’, ‘프리 메이슨’ 등에 템플 기사단의 문양이 사용되었다.
지금도 중세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과 영화에 빠짐없이 이 기사단이 등장한다.
교황청 건물 꼭대기의 황금 성모상이 아름답다.
교황청 건물 옆쪽에 있는 소궁전은 미술 박물관이 되었다.
아비뇽” 하면 1907년에 파블로 피카소가 그린 “아비뇽의 처녀들 Les Demoiselles d'Avignon”
을 떠올리게 된다.
이 그림이 발표된 다음해에 미술평론가 루이 보셀이 화가 조르주 브라크의 그림을 묘사할때
처음으로 "입체파" 란 용어를 사용하니, 입체파의 시조는 "아비뇽의 처녀들"이 차지한다.
하지만 사실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아비뇽은 바르셀로나 인근의 거리 이름이며 처녀들이란
그 거리의 창녀들을 지칭한 것이라고한다.
"아비뇽의 처녀들"은 지금 뉴욕의 MoMa 미술관에 수장되어있다.
에스파스 잔느 로랑, 즉 잔느 로랑 병원이라는 간판이 눈길을 끈다.
곧 가게 될 아를의 에스파스 반 고흐 생각이 미리 떠오른다.
반 고흐가 유폐 되었던 정신병원을 이름한다.
저 성문 밖으로 나오면 론 강이 흐른다.
신의 계시로 지어진 론 강의 석조 다리 아비뇽의 다리(Pont d'Avignon)
생 베네제 다리(Saint-Bénézet)라고도 한다.
생베네제 다리 Pont St. Benezet 는 1,188년 신의 계시를 받은 양치기 베네제가 건설했다는데
17세기에 홍수로 붕괴된후 22개의 아치중 교각 4개만 남아 있다.
12세기 베네제라는 양치기 청년이 ‘론 강의 중심인 아비뇽에 다리를 건설하라.’라는 신의 계시를
받고 아비뇽에 와서 사람들에게 전했지만 그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고 한다.
이에 주교를 찾아갔지만 주교 역시 믿지 못하고 시험 삼아 거대한 돌을 론 강으로 옮겨 보라고
했는데, 그가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혼자 힘으로 돌을 옮겼다.
그제서야 사람들이 그의 말을 믿고 함께 다리를 만들었고, 청년의 이름을 따서 생 베네제 다리
라고 이름을 붙였다.
12세기에 지어진 생 베네제 다리는 원래는 목조 다리였다가 석조 다리로 다시 지어졌으며,
다리 위에는 생 베네제 기도실이 있어서 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왔다.
17세기에 론 강이 범람하면서 22개의 아치 중에서 4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무너졌는데
지금까지도 보수하지 않고 4개의 아치만 남겨져 있는 상태이며, 오늘날 아비뇽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론(Rhon) 강 상의 유람선, 론강은 R의 프랑스 발음상 혼강으로 들린다.
다음 기착지인 "아를 지방"으로 연면히 흘러간다.
아비뇽유수 [Avignonese Captivity]
1309∼1377년까지 7대에 걸쳐 로마 교황청을 남프랑스의 론강변의 도시 아비뇽으로 이전한 사건.
고대 유대인이 바빌론에 강제 이주된 고사를 본떠 '교황의 바빌론유수'라고도 한다. 13세기 말부터 세속 권력이 신장하자 프랑스왕
필리프 4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싸워 아나니사건(1303)으로 우위를 차지했다.
그 결과 1305년 선출된 프랑스인 교황 클레멘스 5세는 프랑스왕의 강력한 간섭을 받았으며, 로마로 들어가지 못한 채 프랑스에
체류하게 되었다.
교황은 초기에 아비뇽 북동쪽에 있는 카르팡트라스에 정청을 설치하고 아비뇽에 거주했으나, 제4대 클레멘스 6세 때인 1348년
프로방스 백작 겸 시칠리아 여왕으로부터 아비뇽을 사들여 파리 왕궁을 모방한 호화스러운 교황청 궁전을 건조하였다.
제6대인 우르바노 5세 때 일시 로마로 복귀하였으나 교황청의 주요 기능은 아비뇽에 잔류하였고, 그레고리오 11세에 의해
본격적인 로마 복귀가 이루어질 때까지 역대의 프랑스인 교황이 독자적인 프랑스적 교황청 행정을 담당하였다.
일반적으로 유수 시대는 중세 교황권의 몰락기로 간주하고 있으나 근년의 연구에서는 클레멘스 5세에 의한 교회법, 교회재판
제도의 확립, 제2대 요한 22세에 의한 교황청 재정·징세기구의 재정비 등 근세적 성격의 혁신이 있음을 인정하고, 궁전 건축을
비롯한 미술 면에서의 번영과 휴머니즘 학회의 보호·장려 등의 측면을 인정하여 이 시기를 재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교회분열기인 1378년 로마에서 우르바노 6세가 선출되자 프랑스인파(人派)는 이에 불만을 품고 대립되는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내세워 또다시 아비뇽에 교황청을 열어 1417년까지 존속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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