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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의 집성촌

원평재 2018. 9. 4. 10:38






사색의 집성촌

                                                                     

정년퇴임을 한해쯤 앞두고 모교에서 대학도서관 신축기념으로 도서기증의사를 물어왔다.

선별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3000권이상이 되면 기증자 이름을 붙여서 문고 공간도 마련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런 횡재가 어디 있는가 싶었다. 얼론 승낙 답신을 내고 정리를 해보니

4000권 내외가 되었던가싶다.

모교 말고 내가 봉직한 대학의 중앙도서관도 규모에 있어서 대학가의 선두다툼을 하지만 이제는

어지간한 사람의 특별한 도서가 아니면 받아주지를 않는다. 관장 보직을 맡았던 나도 전관예우가

되지 않는다. 이유는 첫째 감당할 공간의 여유가 없어서 희귀한 장서가 아니면 수납되지를 않고

새로 수용하는 공간은 주로 전자도서로 채우고 있는 실정이다. 그 다음으로는 기증자가 주요

도서는 내놓지 않고 허접한 것들만 쓰레기 처분하듯 하니  아예 정년교수의 장서를 받지 않는다는

조례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자업자득이랄까. 또한 이공계나 사회 경제계의 경우 학문의 발전

속도가 하도 가팔라서 3-5년이면 교과서적인 장서가 그 의미를 잃는다는 현실도 작용을 하였다.

그런 현실 속에서 모교로부터 도서관 신축개관에 즈음하여 한 층을 졸업동문들의 기증도서로

채워서 그 의미를 부각하겠다고 하니 천재일우의 기회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많은 선배교수들이 퇴임 후 수많은 장서를 폐지로 처리하는 현실을 목도하는 마당에---.

물론 막상 책이 연구실과 집의 서재에서 실려 나갈 때에는 왜 일말의 감상이 없었겠는가.

자식들에게도 의논하지 않았더니 나가서 살고 있는 아들네와 딸네가 잠시 섭섭한 의견을 멀리서

내기도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바쁜 생활 속에서 모두 부질없는 의견일 따름이고 또 한글을

모르는 그 다음 세대에는 결국 쓰레기더미가 될 처지일 것이었다. 나는 아쉬움 없이 꽤 중요한

가치가있는 책들도 모두 모교에 기증을 하였다. 물론 내 아호가 있는 태그를 붙여서 내보낼 때

콧잔등이 시큰둥한 순간도 있었으나 이 또한 즐거운 비명에 다름 아니었다.

전공한 책과 재직 중에 번역한 책들, 그리고 어줍잖게 등단을 하여 막 펴낸 세권의 소설집과

한권의 수필집, 또 평론집도 감개무량하게 포함하면서 마치 역사가 흐른 후에는 고전이 될 수도

있으리라는 꿈같은 꿈도 함께 쓸어 담았다. 그리고 이제 이사 때마다 곤란하게 하던 책 무리들과는

아듀를 고하는 줄로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정년을 하고나서 부터는 고령사회에 불어 닥치는 출판의 열풍이라고나 할까,

수많은 문예지와 인문서적에 권두언, 수필, 소설 연재, 심사평, 기행문 등등의 청탁을 받으며 그

정기간행물들이 쌓이는데 그걸 어떻게 버리랴. 또한 창작집들을 내는 분들의 기증도서들도 밀려

오는데 채 정리할 시간이 없을 지경이다. 연구실의 빈 서가는 물려주고 나왔으나 집안의 빈 서가는

아쉬움의 흔적처럼 남아있더니 어느 사이에 다 차버리고 그렇다고 이 나이에 새로 서가를 주문

한다는 일도 우스운 듯하여서 이제는 그냥 맨바닥에 쌓아놓기 바쁘다. 그런 중에도 한번은 모교에

추가로 책을 보내기도 했으나 이제는 그쪽도 만원사례인 모양 같다.  

대구에 있는 친구 중 도서기증을 하여 나처럼 문고를 만들고 도서관내에 독서대를 확보한 친구

몇 사람은 아직도 연구 활동과 독서에 큰 도움을 받는 모양 같지만 나는 지척이 천리인가,

독서하러 KTX를 탈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여서 책들의 고향은 마음속에만 존재한다.  


도서관하면 터키의 에페소에 있는 셀수스 도서관이 생각난다. 지금은 코린트식 석조물만 남아

있지만 한때는 이 도시의 위용과 함께 고대의 책 12천권을 보관한 지성과 사색의 집대성, 집성촌

이었던 적도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도서관으로 들어가는 큰길 건너편 쪽으로는 환락가가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그 방향을 나타내는 발자국 형태의 행로가 남아있다. 우리도 예전에 대학도서관 출입을 하며 저녁

늦게 나오면 칠성동 굴다리 쪽으로 허름한 목로주점들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를 묶어서 논하던 지적 허영에 들떠있던 청춘시절이었다. 그 시절로 돌아갈 수야 없지만

그곳으로 다시 한 번 가까운 장래에 가보고 싶은, 그러나 그 흔적도 희미할 사색의 집성촌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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