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화장터 가는 길이 어디요?”
내가 마침내 그렇게 물어보았다.
학교 부속 교회가 캠퍼스의 뒤쪽으로 가깝긴 해도 아직 한번도 가보지
못했었는데 부활절 예배를 보러 오늘은 부랴부랴 아파트에서 출발했기에
찾기가 좀더 힘이 들었던 것이다.
연변에 와서 거의 한달이 되었으나 저 추웠던 첫째 주는 시내 호텔에
있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 다음부터 도 매 주일마다 이사하는 날,
세탁기 오는 날, 식탁 오는 날, 책상과 소파 오는 날, 전화와 인터넷
설치 파동(!)으로 또 며칠간 집을 지키고 있어야 하는 등으로 게으른
사람의 핑계잡기 꼭 좋은 일들이 있어서 이제껏 차일피일 하면서
오늘 아침은 부활성회의 날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더욱이 그동안 행정 일을 보느라 학부 강의 없이 대학원 세미나만 하던
차에 이곳에 와서 객원 교수 발령을 받고 1주에 3시간을 신나게 강의하고
어제 오후에는 조선족 교사들의 모임에 가서,
“미국학교에서의 독서 지도”라는 제목으로 한 시간만 하라는 강연을
90분 이상 신나게 떠들었더니 아침에는 목이 잠기고 몸살, 감기 기운까지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메일을 열어보니 위의 주제로 블로그에서 LA에 사시는 Joanne
님 에게 부탁했던 자료와 설명들이 좀 늦게 도착해 있었는데
그 전말은 이 양반이 부활성회를 준비하시느라 내 블로그의 협조 요청
내용을 늦게 열어보게 된 때문이었다.
“학교에는 교회가 있을 것이고 부활 예배가실 것이지요?”
이런 대목에서 아차하고 컴퓨터 모니터의 시간을 보니 벌써 10시 가량이
아닌가.
또 틀렸구나, 포기를 하는데 집사람이 “여기는 한 시간 늦잖아요.”한다.
아, 금쪽같은 한 시간이 예비 되어 있었던 것이다.
택시를 타고 달려서 학교 정문 앞에서 차를 버린 다음,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바깥쪽으로 바삐 돌며 교회를 찾는데 그 동네 사람들이 하나같이 잘 모르겠다고
한다.
학교 교회를 동네 사람들이 잘 모를 수도 있겠고 혹시 외국인 교회를 안다고
나서기가 어려운 처지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중국에서도 이제는 종교의 자유가 있지만 외국인이 전교를 한다던지 함께
예배를 볼 수는 없다고 한다.
아편전쟁 이래, 서세동점의 뼈아픈 역사적 체험을 가진 나라의 고민이 엿보이는
대목이었다.
아무튼 지척에 두고 교회 찾는 일에 바쁜 내 머리에 이 교회가 예전의 화장터를
개축하여 세워졌다는 유명한 일화가 떠올랐다.
더욱이 강대상은 바로 화장 로가 놓여있던 바로 그곳이라는 이야기도 생각이
났다.
당국에서는 외국인 교회의 인가에 난색을 표하다가 마침내 화장터를 내놓게
되었다고 한다.
아,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가.
이 세상 하직하고 천당 가는 길목의 화장터에 이 교회는 반석(베드로-Peter)을
깔고 마련된 것이었다.
내가 그 화장터를 물으니 그제야 모르는 사람이 없고 과연 붉은 벽돌로
쌓아올린 화장장의 굴뚝도 눈에 들어온다.
이제 그리로 가는 길에는 예전에 내가 자란 시골마을의 가로수들이 두 갈래로
그대로 뻗어있고 그 길 양편의 과수 목에는 벌써 물이 조금 차오른 듯하다.
그래도 결국 지각을 하여 들어가 본 교회의 내부는 완전히 개조를 하여서
바닥은 돌을 깔았고 천정도 가운데가 올라온 삼각형 모양의 굵은 대들보
여럿이 하늘로 받치는 밝고 시원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목측으로 500좌석은 실히 되어 보이는 예배 석은 이미 꽉 차 있어서 우리는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기도와 설교와 예배 인도가 모두 영어와 우리말로 진행되었는데 신도들도
각양각색이어서 황색, 백색, 흑색의 인종 전시장이었다.
강대상 옆의 흰 벽은 오버 헤드 프로젝터의 훌륭한 영사막이 되어서 우리말,
영어, 러시아어, 한자 등등이 투영되고 있었지만 지배적 언어는 물론
우리말이었다.
(내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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