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조선문 독서사에서

원평재 2005. 3. 31. 07:53

초대 받아서 간 "조선문 독서사"에서의 기록 입니다.

 

제가 맡은 부분은 주로 서양의 소설 부분이었는데 단순히 작품을 읽고 감상을

말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독회가 조금 더 진행되면 주제, 성격, 구조,

등등의 뉴크리티시즘 방식의 글 읽기, 나아가서 조금 기술적인 분석,

예컨대 작품의 배경, 상징성, 톤, 스타일 등에 관해서도 시간이 남으면

토론을 하였습니다.


진지한 토론이 끝날 때쯤 참가자들이 말하는 결론은 한마디로 “해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보다 더 훌륭한 반응은 없다”라고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이런 결론이랄까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일종의 보고의 말씀을 들으시면서 여기

모이신 분들께서는 참 팔자 좋은 소리를 하고 있다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지만

책을 읽는 가장 기본적이고도 보편적인 목표는 바로 이러한 심신의 기쁨이

아니겠습니까.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라고 하신 성현의 말씀이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조선족 학교의 선생님들인 이 청중들은 매우 진지한 표정이었습니다.

벌써 11기째이며 한 기에 보통 60명이 수료했다고 합니다.)

 

제가 이 방면에서 이름이 좀 나니까 이번에는 여러 산업체들로부터 와서 강의를

좀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인천의 남동 공단에서 고급 기계, 정밀 기계를 만드는 데에서 이런 높은 수준,

전문가적인 독서 지도를 부탁하는 것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학업이나 교양이 부족한 근로자들로부터 못 배운 부분을 보충해

달라는 부탁으로 알았습니다만 막상 가보니 모두 그 방면의 기술 수준이 최고급인,

일본의 최고 기술자들과 경쟁을 하는 그런 분들이었습니다.


기업주는 이런 분들에게 최고의 헬스 클럽 회원권을 주기도 하고 마음껏 술을

마셔보게도 하고 등산도 사장님이 함께 다녀보았으나 독서 운동을 일으킨 이후만큼

생산성이 높아지고 작업 능률이 올라간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동양정밀” 같은 기업체에서는 손톱만한 크기로 모터를 제조하여 자동차의 윈도우를

올리고 자동 현미경을 오르락내리락하게 하는 정밀 공장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천체 물리학자는 초등학생들에게 해마다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이 오면

천체관측의 밤을 마련하여서 하루 저녁 별들을 관측하는 행사를 갖습니다.

“그런 건해서 뭘 해? 평생에 한번 참여할까 말까하는 어린 학생에게 무슨 영향을

주겠다고?”

나의 친근한 놀림에 그가 정색을 하였습니다.

 

“그래, 이 하루저녁의 체험이 수많은 미래의 갈릴레오를 만들어 내는 거야.”

감수성이 강한 나이의 청소년들에게 이런 기억은 결정적인 순간에 판단의 잣대가

되고 인생을 거는 계기가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도박 효과는 결코 아니지요.

 

(독서사 간판과 안마, 개장국 집의 옥호가 나란히 걸려있습니다. 그래도

번화가를 찾아 나선 독서사의 모습이 의연하고 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