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나온 바깥은 대명천지였으나 바람은 그 사이 기세를
더하여 대지의 흙먼지를 일떠세웠다.
내 중국식 얼굴은 "리발 점" 실내의 얄궂게
크기만 한
거울과 작별하는 순간부터 내 눈 앞에서 사라졌으나
우리들 어린 시절의 역사성을 띤 꼬랑내는 내가 바깥으로
나왔어도 내 코에서 사라질 요량이 아니었다.
나는 집에서 기다리는 마나님 앞에 감히 나타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가까이 있는 정류장에서 28번(선) 버스를
탔다.
지난번처럼 동시장(東市場)으로 가서 거리의 헌책 난전을
두리번거리며 냄새를 지울 심산이었다.
동시장 가는 길은 26선이 좋았으나 바람불어재치는
"리발 점" 앞거리에서 26선 정류장까지 걸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다가오는 28선 버스에 훌쩍 몸을 실었다.
"동시장 가는 길로 가장 가까운
곳에 내려 줘(요)!"
1원을 내며 내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이곳의 버스 차장 치고 조선말 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
주로 한족 여자들이 많이 하는 이 직업에 한족 남자들도
적지 않았으나 영리한 조선족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므로 내가 소리를 지른 것은 내 말을 알아들은
동승한 조선족 동포들의 도움을 청하고자 함이었다.
과연 조선말을 하는 여러 사람들이 내가 내릴 곳을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보다 나은 정류장이 어딘가에 대하여 신중한 차중
토론을 전개하였다.
"신화 서점" 하나 못 미쳐서 나는 내렸고 내 동포들에게
진실로 감사의 절을 하였다.
이런 동포 사회가 지금 와해되고 있다니 기가 찰 노릇
이었다.
지난번 왔을 때에는 동시장 입구에 누각이 하나만 있는
줄 알았더니 진행 방향으로 세 개나 되는 듯 하였다.
돌아올 길의 이정표로 단단히 입력을 해 두었다.
특히 가장 잘 지은 누각에서 시작하여
"개장국 집"
"개고기 집" "구육탕 집"이 즐비하여서 이 것만 유의하면
길눈이 밝지 못한 나그네라도 미아가 될 우려는 없을
성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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