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김승옥의 "싸게 사드리기"(2-2, 끝)

원평재 2005. 4. 26. 06:04

다시 서시장에서 동시장으로 진출 한 것은 그 무렵이었다.

특히 동시장에서 꽤 지적인 모습의 난전 주인을 만나면서 책 값은

서시의 반이면 된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정말 그 곳에서는 어지간한 것은 5원이면 통했다.

이 정도가 아마도 내 대학 시절의 헌책방 순례역정 때의 비용에 맞먹는

수준이 아닐까---.

 

그러던 어느날 나는 마침내 헌 책들의 멕카에 도달하였다.

연변대학의 제8 기숙사 지하실에 있는 두 곳 헌책방이 그 곳이었다. 

조선 문학하는 교수의 조교가 못내 미심해 하면서도 안내한 곳이었다.

빙고!

 

그 학생은 소중한 전적이 지하실에서 딩굴다가 나와같은 사람을

만나서 그 진가를 발휘하게 되어서 정말 기쁘다고,

기뻐하는 내 얼굴을 보며 나 보다 더 기뻐하였다.

 

알고보니 이 곳에서는 아주 주요 가치가 있는 전적,

예컨데 외형적으로는 하드 카바(조금 부실 장정이지만)이고

부피도 300페이지 정도 나가는 것은 4원,

그 이하는 2원이나 심지어 1원이면 족하였다.

아라비아 반도의 사막을 건너 마침내 멕카에 도달하였다고

그 누가 소리지르지 않겠는가.

유레카!

 

혹시  이 곳에서 곰보 아저씨나 그의 육감적인 아내 비슷한 사람은

상기 만나지 못하였느냐고?

글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이미 산업화의 레일이 깔린

이 도시에도 질주하지 않을리 없겠지만

조셉 콘래드가 벨기에의 수도 브뤼셀을 회색으로 본 것과는 또다른

의미에서 회색 빛 가득한 이 도시의 낡은 책 취급 장소에

그런 욕망의 걸물들이 나앉아 있을는지---.

미미한 수요나마 공급을 창조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 원리를

겨우 직관한 가난하고 선한 사람들의 이 먹물 시장 바닥에---.

 

희안하게도 이런 물건을 다루는 조선족 동포는 아직 만나지 못하여서

책 값을 흥정할 때마다 나는 한족들과 힘들게 씨름하였다.

(말하고 보니 이건 과장법이고 여기에서 무슨 값을 흥정하였으랴,

부르는게 제 값일 따름인데---.)

 

서울에서는 벌써부터 종이로된 서적 자체에 큰 무게를 두지핞는

시대에 돌입하였다.

이사 때마다 끌고다니던 저 무거운 "대영 백과 사전(Encyclopedia

Britanica)"도 이제는 CD 한두판 속에서 숨을 죽이고 엎디어 있으니

종이 책이 무슨 소용에 닿으랴.

 

나와는 다른 대학에서 선생하는 내 친구 하나는 평생 모은 책을 모두

봉직하는 학교에  기증하고 특별 컬렉션 코너의 명패도 붙이게

되었다고 몇해전에 자랑하였다.

정말 부러운 일이었다.

지금은 대학 도서관에서 그런 기증을 거의 받지 않는다.

모르는 사람들은 그게 혹시라도 새책 구입에 따른 리베이트같은 

일과 무관치 않으리라 지레 짐작이라도 해볼는지 모르겠지만

100만 장서를 가진 도서관의 관장을 해본 나는 사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옥션 체제에서 서적 시장은 벌써부터 투명하거니와

대체로 서적을 기증하려는 분들은 알짜 희귀본은 자기 서재로 모시고

그 나머지, 말하자면 학문적 가치나 물리적 건강상태가 유효일자의

백척간두에 있는 책들에 대한 청소 역할을 기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평가 팀이 먼저 출장을 가서 현장을 살피는데

피차간에 성공하는 확율은 매우 낮다.

 

그런거라도 받아두면 좋지 않으냐고 할지 모르지만 이 또한 물정을

모르는 순진한 발상이다.

낱권의 책이 장서가 되려면 엄격한 분류에 따른 태그를 옆구리에

차야하는데 그 비용과 작업이 수월치 않을뿐더러,

더우기 마그네틱 띠를 두르는 시대도 지나서 이제는 스마트 카드의

칩에 반응하는 값 비싼 장치를 둘러야 책이 제 역할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으니 허접 쓰레기 일보 직전인 퇴물들을 감당하기란

불가능이다.

또한 공간 문제와 건물의 하중 문제도 뒤따른다.

결국 도서관 운영의 메가 트렌드는 디지털 라이브러리, 전자 도서관

체제로 급속히 이전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이곳 연길은 종이 책이 대접을 받는 곳이다.

그래서 나도 의미있는 기증의 기회를 꿈꾸어보기도 하지만

세상이 하도 빨리 변하니 사정이 어떻게 될는지는 아직 모르겠다.

이 곳도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IT산업이 급속도로 발달하고 있는

경제 사회이다.

 

 

예전 우리나라의 "청계천 고본점"과 아직도 성업중인 일본 도쿄의 "간다 서점가"에서는

오래된 잡지나 전적들의 값이 많이 나갔으나

여기에서는 오래된 책 보다 나온지 얼마되지 않은 책들이 더 값이 나가니

내 가치 체계에는 가끔 혼란이  온다.

(물론 희귀본은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이지만---).

 

내가 오래전 미시간 주립대학이나 코넬 대학의 used book store를 누빌 때도

그런 신구 가치의 혼란과 곤혹을 느꼈었다.

반세기 전의 "새터데이 리뷰"를 오래되었다는 죄목을 걸어 파지 값에 구입한

기억이 난다. 

미시간의 이스트 랜싱에 있는 "Gibson's"라는 바보 같은 책방에서였다.

 

헌 책방 이야기를 이제는 덮고싶은데 옆에서 누가 옛 기억을 더 짜내보라고

강요한다면,

글쎄, 내가 다니던 헌 책방 골목에도 미모의 중년 여성 두사람이

어느 해이던가 가게를 열었던 기억이 난다.

"현대 문학"이 창간호 이래로 정갈하게 서가에 꽂혀있었고 일본과

미국에서 나오는 에로스 황색 잡지도 입구 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미8군에서 나오는 책들에 루트가 있다고 인근에서 쑥덕거렸다.

나도 부지런히 다니면서 짜장면 값을 갖다바쳤고 "훈몽자회"나

"동국정운"같은 보물을 그곳에서 찾지는 않았지만,

플레이 보이니 펜트 하우스, 그리고 스웜프 같은 잡지의 표지에

내리 꽂던 청년의 시선으로 언뜻 그녀들을 바라보기도 했겠으나,

"싸게 사들이기" 책략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