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봄 학기에 중국 연변에 있는 대학에 객원교수로 떠나서 한 학기를 지내고,
가을학기에는 뉴욕에서 교환교수로 체재하다가 1년 만에 귀국하였다.
봉직하는 기관으로부터 예우를 끝까지 받은 셈이어서 고마울 따름이었다.
연변, 연길에 도착한 날은 2월의 마지막 날이었는데 비행장에서부터 소위
만주 추위와 세찬 바람에 귀가 떨어져나가는 줄 알았고, 시내로 들어와서는
석탄을 때는 매연 때문에 숨이 막히는 듯하였다.
오성홍기 앞에서 중국 국가를 들으며 신학기는 시작되었고 그 식전에서 중국 정부로
부터 객원교수 임명장을 받으니 감회가 유난스러웠다.
또한 중국의 동북 변방에 우리말이 펄펄 살아있다는 것이 신기했고
200만 동포들이 한국과 북조선을 때로 동경과 동정으로, 또 때로 애증이 엇갈리는
시선을 진자(桭子)처럼 왕복시키고 있다는 사실이 긴장과 경이감을 더해 주었다.
사실 연변 생활 6개월간은 무척 짧은 현상학에 불과했지만, 그 본질은 우리나라의
60년대 엄혹했던 현실과 비슷하여서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 여행을 한 환영이 아직도
얼른거린다.
중국과 미국의 소수민족 문학을 천착코자 했던 내 본래의 목적은 처음에는 추상과
낭만의 수준에 머물렀는데 그 대학에서 내 준 아파트로부터 내다본 한 길 건너
조선족들의 고난 참담한 삶의 모습을 보고는 강단 학자로서의 내 자세가 너무나
오만, 비겁, 왜소하게 느껴졌고 그들을 위한 실천적 행동이 무엇일까를 진정
“타는 목마름”으로 찾아 나서게 하였다.
“차이나는 차이나는 곳이다”라는 화두가 북경과 상해를 두루 다녀 본 내 시야에
극명하게 다가오면서 우리 핏줄들은 왜 이런 질곡을 항상 오래 겪어야만 하는지,
길 건너 공동변소에 아침부터 줄줄이 서서 바지가랑이를 움켜쥐고 있는 내 남녀
동포들을 멀리 내려다보며 어느새 눈가에 서린 “교만”의 물 끼를 닦아보기도 하였다.
하루의 시작을 이런 식의 통과의례와 함께 하며 캠퍼스로 들어가면 우리 조선족
남녀 젊은이들의 패기만만한 모습이 큰 위로가 된다.
강의실에서 출석을 부르면 “따오(到)!” “Here I am." "Sir"라고 하는 답변들이
우렁차다.
전원 기숙사 생활을 하는 그들의 밝은 얼굴의 뒷전에는 그러나 위에서 본 그런
힘든 배경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연변의 자생적 조선족 문학에 대한 초기의 내 접근 방식에도 문제가 있었다.
연변에는 “연변 문학”과 “연변 녀성” “로인 생활” 등의 월간 문예지가 정부
기관지로 나오고 있을 만큼 조선족 문학 수준이 높았다.
이 잡지들을 편찬하는 문인 및 공산당 간부들과의 교유는 나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고, 그들과 연변 문인 협회 회원들에게 서울의 문단 소식을 좌담과 강연의
형태로 전할 때에는 가슴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문예지 속에 담긴 콘텐츠, 내용을 들여다보면서 또한번 충격을
느꼈다.
중국의 동북 3성에 사는 200만 우리 동포들은 지금 정체성 해체의 위기를 맞고
있다.
소위 “서울 바람”이니 “출국열” 때문에 숱한 젊은이들, 특히 여성들이
서울, 동경, LA, 뉴욕, 상해 등, 해외나 연안지대로 나갔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방황을 하면서 전통적인 조선족 사회는 급속히 붕괴되고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며 황량해진 내 마음을 쓰다듬는 손길이 세 군데에서
나왔다.
첫번째는 그 곳에서 국문학을 가르치는 안동 대학 출신의 교수님에게서
나왔다.
정년 전에 명퇴를 하고 이곳에 온 일흔에 가까운 이분은 처음 길림성 농촌
오지에서 “안동마을”을 발견하여 기쁨과 경이의 마음으로 여러 해 그 곳을
도와나아 갔으나 그 마을은 몇 년 사이에 급속히 붕괴되었다.
그 과정은 한편의 드라마, 비극적 과정이었으나 여기에 경과를 다 올릴 여유는
없다.
이제 그분은 연길 시내에 “조선문 독서사”를 세워서 조선족 교사들에게 우리말과
글을 갈고닦게 하고, 또한 그분들이 학생들에게 독서 지도 교육을 하도록 많은
자료와 방번론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나도 시간 나는 데로 열심히 이곳에서 강연도 하고 봉사의 흉내라도 내고자 하였다.
그 다음으로는 이곳 대학에서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는 사학자 한분을 만난 일이었다.
그 분은 나를 데리고 고구려의 잘 알려진, 혹은 어둠에 묻힌 옛 강역의 유적지들을
탐방케하였고 그분의 소개로 향토 사학자와 비 제도권 문인들을 만나서 감추어져
있거나 덜 알려진 역사 유물과 유적들을 정신없이 찾아 볼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이런 자료들은 급속히 중앙정부의 통제 속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허겁지겁 글과 영상으로 이 자료들을 일단 채집하였다.
이 기록들은 “블로그”와 내가 등단한 계간 “문학 마을”에 옮겨놓고 있는데 언젠가는
단행본으로 출판할 계획을 세워놓았다.
마지막 위안의 손길은 "Y 일보"의 박 기자로부터 나왔다.
연변 과기대에 1년간 연수를 와있는 박 기자는 그 전 해에 잠시 이곳을 취재한 적이
있어서 고조선, 고구려, 발해의 옛 강역을 두루 섭력한 관록이 있었고
당시 숨죽이고 있던 많은 역사적 기록과 조선족 언론인, 우국지사들을 알고
있었는데, 이분들을 다시 찾는 고난의 여정을 나와 함께 저 흑룡강 성 러시아
국경까지 함께 하였던 것이다.
곳곳에서 보고 만나는 유적과 조선족 우국지사들과의 해후는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우울한 기분을 다소나마 씻어줄 기회이자 위안이었다.
연변에서의 한 학기는 속절없이 지나가고 나는 우리 선조들의 옛 강역을 솔직히
무거운 짐을 벗듯이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뉴욕의 허드슨 강변에 있는 자식과 며느리와 손자가 사는 집에서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보며 고난의 조선족 동포들을 버린듯한 공연한
자괴감에 가끔 놀래곤 했다.
다행히 이번 가을에 연변에서는 중국 동북지역 경제 발전과 민족 공동체
주제의 국제학회가 열린다는 초청이 왔다.
그곳에 참석하는 것으로나마 내가 비겁하지 않다는 증명을 그곳 선조들과
동시대인들에게 하고 싶다.
(끝)
'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북공정 지대에서(호태왕능, 장수왕능, 순장묘, 쪼다 (0) | 2005.05.07 |
---|---|
다시 연길에 내리는 오월의 눈 (0) | 2005.05.07 |
동북공정 지대에서(프롤로그) (0) | 2005.05.03 |
따오(到), 평등주의 (0) | 2005.04.28 |
김승옥의 "싸게 사드리기"(2-2, 끝) (0) | 2005.04.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