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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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마을에서 용정 시내로 돌아올 때에는 육도하(六道河)를 건너서 오는
길을 택하였다.
사라져가는 명동 소학교도 들리고 조선족들이 많이 사는 시골마을의 정취도
조금 더 들여다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올적과 마찬가지로 육도하는 항상 내 오른쪽에 있었다.
넓은 개천의 양안을 달린 셈인데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풍경들이었다.
예전의 명동마을은 회령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지신(地神)”이나
“삼합(三合)”, 개산둔(카이산툰) 등을 거쳐 용정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서
항상 우리 민족들이 많이 거주하였고 내왕의 중심점이자 분기점이었으나
여기에도 탈 농촌의 바람은 예외가 없었다.
명동 소학교도 이제는 문을 닫고 무슨 공장으로 모양을 바꾸느라고 벽과 지붕의
도색만 요란하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중국인 인부에게 물어보니 “당면”을 만드는 곳이라는 것을
겨우겨우 짐작할 수 있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차를 타는데 그래도 육도하를 낀 마을에서 조선족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몰려 놀고 있었다.
“세상에 중국의 농촌에서 어린이를 보다니, 그것도 억양은 높으나 바로
우리말을 하는 어린이들을---!”,
의외의 풍경에 여간 반갑지가 않았다.
물이 그렇게 깊고 맑았다는 육도하는 이제 수량도 별반 없었지만 다행하게도
내 어린 시절의 잃어버린 시골 풍경을 담고 있었다.
이 강이 어디로 흘러가느냐고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바로 “해란강”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빨리 일송정으로 올라가서 해란강을 굽어보아야할 차례였다.
하긴 그곳에서도 또 마음 아픈 일들이 많았지만---.
윤동주의 창시개명 시비에 대하여서는 나올 만큼은 다 나왔지 않나 생각한다.
“히라누마(平沼)”라는 창시는 일제가 윤동주의 집안에 강압한 결과였고 또한
동주가 일본 유학을 할 때에 서류를 제출하면서 어쩔 수 없는 공식문서가 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동주,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위에/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혀버렸습니다.//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라고 통절한 심사를 훑어낸 동주를 민족 문학사에
올려놓고 우리는 무슨 말을 하자는건가.
더욱이 그는 반일 독립운동에 나섰다가 옥사하였으며 생체실험의 대상이었다는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는 이즈음에---.
권영민 교수 등이 벌써 십여년 전에 윤동주 서거 50주년 기념 전집을 편찬
하면서부터 상고해낸 자료들을 오늘에 다시 음미하며 깊은 상념에 빠진다.
이육사나 한용운의 빛나는 이름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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