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 문학 산책

창씨개명 논란/윤동주 민족시인 서거 60주기 (끝)

원평재 2005. 5. 22. 18:43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명동마을에서 용정 시내로 돌아올 때에는 육도하(六道河)를 건너서 오는

길을 택하였다.

사라져가는 명동 소학교도 들리고 조선족들이 많이 사는 시골마을의 정취도

조금 더 들여다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올적과 마찬가지로 육도하는 항상 내 오른쪽에 있었다.

넓은 개천의 양안을 달린 셈인데 내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 풍경들이었다.

예전의 명동마을은 회령으로부터 두만강을 건너 “지신(地神)”이나

“삼합(三合)”, 개산둔(카이산툰) 등을 거쳐 용정 가는 길목에 위치하여서

항상 우리 민족들이 많이 거주하였고 내왕의 중심점이자 분기점이었으나

여기에도 탈 농촌의 바람은 예외가 없었다.

 


 

명동 소학교도 이제는 문을 닫고 무슨 공장으로 모양을 바꾸느라고 벽과 지붕의

도색만 요란하였다.

안으로 들어가서 중국인 인부에게 물어보니 “당면”을 만드는 곳이라는 것을

겨우겨우 짐작할 수 있었다.

 


 


 

착잡한 마음으로 차를 타는데 그래도 육도하를 낀 마을에서 조선족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몰려 놀고 있었다.

“세상에 중국의 농촌에서 어린이를 보다니, 그것도 억양은 높으나 바로

우리말을 하는 어린이들을---!”, 

의외의 풍경에 여간 반갑지가 않았다.

 


 

물이 그렇게 깊고 맑았다는 육도하는 이제 수량도 별반 없었지만 다행하게도

내 어린 시절의 잃어버린 시골 풍경을 담고 있었다.

이 강이 어디로 흘러가느냐고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바로 “해란강”으로

들어간다고 한다.

 


 

빨리 일송정으로 올라가서 해란강을 굽어보아야할 차례였다.

하긴 그곳에서도 또 마음 아픈 일들이 많았지만---.

 


                             (해란강 위의 용문교)

 

윤동주의 창시개명 시비에 대하여서는 나올 만큼은 다 나왔지 않나 생각한다.

“히라누마(平沼)”라는 창시는 일제가 윤동주의 집안에 강압한 결과였고 또한

동주가 일본 유학을 할 때에 서류를 제출하면서 어쩔 수 없는 공식문서가 된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한 동주,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위에/내 이름자를 써보고,

/흙으로 덮혀버렸습니다.//따는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라고 통절한 심사를 훑어낸 동주를 민족 문학사에

올려놓고 우리는 무슨 말을 하자는건가.

 

더욱이 그는 반일 독립운동에 나섰다가 옥사하였으며 생체실험의 대상이었다는

증거가 속속 나오고 있는 이즈음에---.

 

권영민 교수 등이 벌써 십여년 전에 윤동주 서거 50주년 기념 전집을 편찬

하면서부터 상고해낸 자료들을 오늘에 다시 음미하며 깊은 상념에 빠진다.


이육사나 한용운의 빛나는 이름과는 또 다른 차원에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