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구자 노래비의 상흔과 O교수의 선각
“누가 아직 일송정 앞에서 증명사진을 찍지 않았으랴”, 라고 하면 탓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민족의 영산 백두산 관광길이 북한 쪽은 막혀있고 이 쪽으로만
뚫려서 숱한 순례 객들이 여기를 거쳐 가게 된지는 오래다.
나도 10여 년 전에 백두산이 열리자 높은 사람들 마음 변할까봐 얼른 연길과
여기 용정을 거쳐 백두산 영봉에서 감개무량을 추슬러 담은 사람이다.
그러나 “일송정 증명사진”들은 그때 이래 다니는 사람들 마다 달라졌다.
내가 처음 갔을 때에는 낡은 정자와 오래되지 않은 것 같은 가녀린 소나무가
보기 민망했으나 다만 선구자 노래가 새겨진 우람한 기석(基石)의 존재가
반분(半憤)은 풀어주었던 기억이 나는데 이번에 다시 와서 보니 그것도
많이 달라져버렸다.
원래 일송정은 정자를 닮은 소나무가 비암산 정상에서 낙락장송으로 그 위용과
자태를 떨쳐서 그렇게 통칭되었다고도 하나, 이리저리 내가 읽은 자료들을 꿰어
맞추어 보면 두 아름드리의 소나무 옆에 유서 깊은 정자가 실제로 있었기에
용정의 우리 동포들은 이 두 영묘한 실체를 합쳐서 독립을 향한 거룩한
표상으로 삼았던 것 같다.
그러기에 일제는 이 소나무를 포격 연습용 표적으로 하여 폭파하였다고도 하고
소나무 밑 둥에 독약을 넣어서 고사시켰다고도 하는데 아마도 두 가지 방법이
다 동원되었지 싶다.
우리 기상의 표상이 그렇게 한 가지 방법으로 호락호락 숨통이 끊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광복이 된 연후에는 뜻있는 분들이 소나무를 다시 심고 정자도 수축하고
선구자 노래비도 세우고 하는데 입구에서는 오래 동안 입장료를 받기도
했다.
10여 년 전 내가 방문했을 때에는 광주리를 머리에 인 조선족 동포 여인들이
죄송한 표현이지만 파리 떼처럼 버스에 달라붙어서 찰지고도 값싼 강냉이를
사라고 아우성을 쳤으나 지금 그런 사람들은 없었다.
솔직히 말하여서 이제 그런 사람들은 서울바람이나 연안 쪽으로 모두 돈을
벌러 나섰지 여기 바람이 휘몰아치는 비암산 기슭을 서성일 이유가 없으리라.
“어? 돈 받는 사람이 없어졌네?” 역사학자께서 놀라움을 표시하였다.
나중에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이야기를 했더니 최근까지도 있었다고
하면서 다행이라고 했다.
몇 년 전에는 거제도 군민 회에서 큰 돈을 들여 이 비암산 정상을 새로
단장했는데 “재주는 거제도 사람이 넘고---”, 그런 생각들도 했다는 것이다.
일송정 꼭대기에서는 용정 시내가 다 내려다 보였고 해란강이 굽이쳐 흐르며
독립의 염원과 한을 아직도 다 풀지 못한 듯 뿌연 연무 속에서 용트림을
하였는데,
바람은 사정이 없어서 채 못다 핀 진달래를 휘몰아쳐대니 내 몸 하나 가누기도
힘들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주화(州花)가 진달래로 지정된 것이 한 이태 되었는데
내버려두어도 산에서 잘도 피는 줄로만 알았던 이 꽃이 요즈음은 무슨 조화인지
다 죽어간다고 한다.
새로 심어놓은 소나무 몇 그루도 바람 앞의 등불 같아서 착근이나 하려는지
심히 걱정스러웠다.
조심스레 다시 내려와서 계단 맨 아래에 세운 우람한 일송정 비와 그 양 옆에
있는 노래비를 모처럼만에 다시 보니 아뿔사 “선구자 노래”와 “고향의 봄”
가사는 어디로 가고 생소한 “용정 찬가”와 “비암산 진달래”라는 가사만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이야기를 정리해 보면 기가 막힌다.
거제도 사람들이 이 곳을 단장할 때만해도 “선구자 노래” 비의 하단에
“이 노래는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1942년에 창작되어 용정일대와
만주 대륙에 널리 퍼졌다”는 내용을 새겨 넣었는데 노래 가사와 함께
이 글들이 사라진 것이다.
선구자 노래의 창작 전말에 대해서 처음으로 깊이 있게 유의한 사람은 날카로운
정론 평론가 O 교수였다.
조두남 작곡자의 말을 인용한 O 교수의 저술에 의하면, 1932년경 만주
하얼빈으로 윤해영이 이 가사를 조두남에게 갖고 와서 전하고는 표연히
사라졌는데, 아마도 독립지사가 아닌가 여기고 그는 가사에 이 곡을 붙였다는
것이다.
이 노래는 1963년에 갑자기 서울에서 가요 무대에 오르면서 사람들의 가슴을
적셨고 이래 7년간 기독교 방송의 “정든 우리가곡”의 시그널 뮤직이 된다.
(찻집 외양이 역사적 유물보다 더 나은데 사람은 없다)
O 교수가 연변문학에 대해서 연구를 시작한지는 20여년에 이르고 있는데
십여 년 전에 벌써 윤해영 연구를 통하여 이 작사자의 친일가사 행적,
예컨대 “락토만주”등등을 지은 일에 안타까움과 비감함을 나타낸 바 있었다.
아무튼 그런 가운데에서도 선구자 가사의 높은 기백과 조두남의 웅혼한
작곡에서 O 교수는 한 가닥 위로를 받은 듯 하였는데,
최근 여러 사람들의 증언과 연구가 나오면서 이제는 작곡자 조두남이 언급한
부분에서도 석연치 않음이 발견되고 있는 모양이니 나도 답답한 심사를
어이할 길 없다.
더욱이 이러한 정황은 이 곳 당국의 일송정 관리에도 음양으로 영향을
끼쳐서 이 모양이 된듯하니 더욱 답답하다.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O 교수의 연변문학 연구에는 참으로 선견의 지혜가
있어서 선각자의 역할을 하였으며 국가적 차원에서도 모름지기 기둥역할을
하였다.
왜냐하면 연변문학에 대하여 북한 쪽에서는 초기의 항일가로부터 시작하여
광복 후의 인민군가 등에 이르기 까지를 모두 연변문학과 궤를 같이한다고
주장하는데,
우리 쪽에서도 일찍이 한국의 민족 문학 통사에 연변 문학을 대입한 것은
바로 O 교수였기 때문이다.
그가 나에게 이 곳 연변문학에 대해서 연구를 착수한다고 의미심장하게
말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세월은 유수와 같아서 벌써 20성상이라니---.
아무려나 “연변 문학 통사”에서 그의 이름은 항상 앞쪽 1-2페이지를
자랑스레 달린다.
이제 용정 기행을 마칠 때가 되었나 보다.
우뚝 선 선구자 노래비에서는 가사가 사라지고 용정찬가와 비암산 진달래가
들어섰지만,
일송정 석비 기단의 옆에는 그나마 다행하게도 선구자 노래의 전문이
검정색 석판에 새겨져서 붙어있었다.
우리 네 사람은 누구라 할 것 없이 그 앞에서 바람 소리를 반주삼아 크게
선구자 노래를 2절까지 불렀다.
이날 저녁 우리는 용정에서 연길로 들어오며 소화룡 조선족 마을로 가서
불가마를 하고 우리 조선 전통 음식을 맞보았다.
'동서 문학 산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연변 문학 소개와 일상의 영상 (0) | 2005.06.20 |
---|---|
브라우닝 시인 부부의 덜 알려진 시 세계 (0) | 2005.06.05 |
창씨개명 논란/윤동주 민족시인 서거 60주기 (끝) (0) | 2005.05.22 |
에드가 앨런 포우 평전(끝) (0) | 2005.01.30 |
에드가 앨런 포우 평전(4-3) 검정고양이 감상(2-2) (0) | 2005.01.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