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화 발해 유적지에서
연길에서 돈화로 떠나는 날은 밤새 폭우가 쏟아졌고 아침에도 비가 그치지 않아서
내색은 않았어도 심란했다.
목적지가 주는 함의(含意)가 이런 날씨를 가져왔나---, 조심스런 과객의 마음에는
만감이 교차하였다.
하지만 일단 배낭을 메고 아파트 앞에서 박 기자를 만나고 나니 발해 사에 대한
두 사람의 공동 열정이 시너지가 되면서 폭우도 오히려 감로수의 역할이었고,
뜨거운 열기는 물기를 수증기로 만들어 허공으로 날려버릴 따름이었다.
과연 빗줄기는 우리가 연길 역에 도착할 즈음에는 간헐적이 되더니 마침내 구름의
형상으로 하늘을 시나브로 멤 돌 뿐이었다.
돈화까지 두 시간 반의 기차여행은 창밖의 광경으로 하여 또 한번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었는데 발해사가 급한 여기에서 다시 더듬을 여유는 없다.
돈화는 역전에서부터 연길과는 또 달랐다.
우선 도시의 골격이 크고 넓어서 쾌적함이 엿보였고 삼륜차가 홍수를 이루는
진풍경도 여행객을 표방한 우리에게는 상큼한 양념이었다.
물론 사람이 페달을 밟는 구식은 보기 딱하고 거북했으며, 모터가 원동력인
신식은 또 전통미가 없는 등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눈매를 벼른 과객의 입맛은
까다롭기만 하였다.
우리는 신식을 타고 돈화 빈관으로 10분가량의 짧고 진기한 또 하나의
작은 여행 끝에 일단 체크인을 하였다.
이미 박 기자가 연길에서 여행사를 통하여 예약을 해 놓아서 400원 전후의 고급
숙방이 150원 정도로 우리를 기다리는 참이었다.
일류 호텔의 품격은 물론 세상어디에나 똑 같았다.
돈화에서의 우리의 일정은 정각사로부터 시작하였다.
박 기자의 유창한 중국어는 여기에서도 발휘되어서 택시 값 흥정에도 그 진면목은
유감이 없었다.
박 기자는 작년에 한달 보름간 “동북 3성”의 “경상도 촌”을 사진 취재하여서
“동북 3성의 경상도 마을”이라는 글과 사진이 절묘하게 엮어진 보도 기사와
이후에 나온 보도 책자로 큰 반향을 일으켰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이번에는 1년의 휴식 년을 맞아 여기 과기대에서 중국 문화,
정치와 함께 한어(漢語)를 현재 4개월째 수강하고 있는데 단기간에 한어 실력이
이 정도로 능숙하다면 누가 한어 배우기를 두려워하랴.
특별한 사람으로부터 또 하나의 진기한 체험을 하는 순간이었다.
(발해의 왕족과 특히 정혜 공주의 묘가 있는 육정산 제2 봉우리의 고분군은 아직
외부와 차단된 속에서 정밀 발굴과 심층적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가 정각사부터 찾은 이유는 이 절이 있는 돈화 시 남쪽 5킬로미터 거리의
육정산(六頂山)이 발해의 강역을 최초로 아우른 성터였기 때문이었다.
육정산이란 이름은 원래 여섯 봉우리의 산세에서 나왔는데 높이는 600미터 정도라서
높지 않았으나 발해 터, 그러니까 지금의 흑룡강 땅 덩어리가 대부분 대 평원이어서
그만하면 웅자에 다름없었다.
아무튼 육정상의 첫째 봉우리에는 예부터 작은 사찰이 전해져 내려오다가 문화대혁명
때에 폐쇄되고 그 스님이 미국으로 가서 엄청난 돈을 번 다음 최근에 거대한 비구니
승의 사찰을 중건하고 있다고 한다.
과연 그 규모는 대단한 바 있었고 아직도 건축은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는 중국식 사찰의 위용을 감상하고 호수의 건너편에 서있는 육정산의 두 번째
봉우리로 향하였다.
(육정산 옛 뭇 묘지라는 표석이 밖에서도 보이고 그 뒤로는 정밀 발굴 현장이
보였다. 일반 공개의 날이 빨리 오기를 바라면서 떠날 수 밖에 없었다.)
아까 타고 온 택시를 기사의 권유를 뿌리치고 정각사 입구에서 버렸던 일에 잠시
후회감이 들기도 하였으나 금방 점잖은 중국인 기사를 새로 만날 수 있었다.
중국여행의 어려움에 교통 부분이 크게 들어가는데, 첫날은 매사가 이런 식으로
형통하였다.
(이 표지석들은 물론 철장 밖에 있는 정문 입구의 안내문들이었다.)
10여분 거리에 있는 육정산의 두 번째 정상과 그 주변에는 발해의 정혜 공주 무덤과
귀족들의 떼무덤이 있는데, 요사이 다시 정밀 발굴 작업이 진행되고 있어서 철제로
둘러쳐친 담 안으로는 출입이나 사진 촬영이 금지되는 등, 매우 민감한 지역이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바깥 동쪽 평원 지역에도 수많은 평민들의 무덤이 넓은 들에 산재해
있지만, 이 부분 역시 어느 정도의 접근이 허용되는지는 중앙정부의 원칙선과
아울러서 현지에서의 운용의 시각차이가 엄존할 것이었다---.
우리는 무리한 접근이 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기본상” 적절한 “수평”을
유지하여 절제 하였을 따름이었다---.
비가 온 후의 흐릿한 날씨가 주는 느슨한 분위기에 편승할 생각은 조금도 없이
긴장감 쪽을 택하였다.
민감한 지역은 되도록 빨리 빠져나와서 큰 길에서 조금 기다리자니 빈 택시가 금방
또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첫날의 발걸음은 대체로 이렇게 운이 좋고 “헐하여서” 내일에 벌어지는 고단한
일대장정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찾아가야할 곳은 동모산이었다.
동모산은 고구려의 유장인 대조영이 속말말갈과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서 처음으로
나라를 열며 지켜낸 산성인데 지금 행정구역상으로는 돈화시의 외곽인 성산자 촌에
속하고 높이는 이 또한 600미터 정도이지만 산세가 예사롭지는 않았다.
운전기사도 공연히 신이 난 듯 속도를 많이 내다가 동모산을 훌쩍 지나치게 되어서
되돌아 오는데,
아뿔사 교통경찰로부터 속도초과로 100원 상당의 벌금을 떼이게 되었다.
그래도 그는 언짢은 내색을 않고 동모산이 멀리 보이는 “성산자 촌”으로 차를 몰고
가서 우리가 하염없이 오래토록 사진 찍는 모습을 기다리며 지켜보았다.
성산자 촌에서 본 동모산에 대한 감회는 진정 남다른 바가 있었다.
하지만 그 동네의 한인(漢人)들은 그 산에 올라가 본 적이 있다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동네의 돌담들은 모두 구멍이 난 검은 화산석이어서 발해의 기본이 돌 문화와
대 평원의 문화임을 짐작케 하였다.
대조영의 성씨는 당연히 “대”씨인데, 우리 주변에서는 “태”씨로 다소 변모했음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우리는 다시 돈화시에 있는 오동성으로 갔다.
오동성과 동모산의 관계에 대한 견해에는 여러 학설이 따르지만 고구려 시대에
환도산성과 평원성인 국내성을 함께 갖고서 통치와 외적의 침입에 양수겸장으로
대비하였던 방식과 같은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역사의 펄떡이는 맥락과 통시적 지혜의 흐름을 함께 짐작하고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이 오동성의 현재의 모습은 초라한 두기의 석조물에 불과하다. 몇 년 전 과는
그래도 달리 이제는 빈 공터도 한켠으로 마련해놓았고 주변 청소도 정결하게 하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초라한 표석을 얼른 버리고 차라리 인근의 인가와 노인들을 만나보았다.
박 기자의 통역에 따르면 노인들이 어렸을 때에는 큰 돌로 된 이 성채가 꽤 높고
길었는데 이토록 파괴된 첫 번째 원인은 왜인들이 나무를 벌목하여 목재공장을
세우느라 성벽의 돌을 빼다 쓴 탓이라고 한다.
그 다음은 인근 사람들이 집을 지으며 뽑아 쓰느라 이제는 폐허가 되었는데
그러다보니 곳곳에 줄지은 집들의 주춧돌은 모두 크고 네모로 각이 진 화산암
성채 돌이었다.
심지어 우리는 담벼락이나 지붕에서 유약을 바른 막새기와도 발견했는데 연대가
천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는지 여부는 아마추어의 경지를 넘어서지만 마음만은
섬찟하였다.
발해의 기와는 수키와나 막새기와가 모두 연두색 유약을 발라 구운 것이라고 하지
않던가---.
탄식을 안고 우리는 오늘의 마지막 탐사지인 24괴석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오동성이 이 지경인데 괴석들인들 안녕할는지---, 걱정이 앞서는 순간이 아니라
그 유적지를 찾기나 할는지 근심이 몰려오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일진이 좋은가, 발해의 력사(力士)들이 음영으로 우리를 따르고
인도 하는가---.
벌금 딱지를 떼인 운전기사는 그래도 싫은 내색 없이 어릴 때 놀았던 그 괴석지를
찾아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과연 그 유적지는 돈화 시에서도 지개발이 벌어지고 있는 후미진 곳, 도로가 끝나는
곳, 철로가 옆으로 지나는 곳에 있었다.
다행히 이 곳도 그나마 표석이 두기 나란히 서 있었는데 표석의 모습이야 이 또한
초라했지만 그 뒤 울타리 속에 안존한 24기(정확하게는 22기)의 거대한 주춧돌
모양의 괴석들은 시대가 내뱉는 폄하의 꼬락서니를 천년이 지나서도 의연히
묵살하고 있었다.
우리는 숙연히 그 괴석들의 의미를 천착해보며 재개발 지구의 모래더미에 표석이
반은 묻혀있는 꼴을 의미심장하게 못 본체 했다.
이 괴석이 어떤 거대 구조물의 초석이었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발해 건축물의 거대함 그 자체에는 상상력의 차이가 없었다.
벌금까지 문 중국 청년 기사에게 우리는 약속보다 많은 100원을 쥐어주고 빈관으로
들어왔다.
저녁 먹은 이야기를 꼭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요량이 가지 않는 마음으로 조금 더 사족을 붙이면 이날 저녁 식사는 돈화 최고라는
“한성 구육 집”에서 맛있게 먹었고,
“가무청” 출입까지 기어코 했다는 정도로 첫날의 보고를 맺고 싶다.
공연한 분란을 예방코자 발해사에 대하여 깁는 말(補語)은 삼갔음을 부언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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