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힐리야, 옛땅! 연변과 만주 벌판

발해 거울이 담긴 경박호 가는길(2-1)

원평재 2005. 7. 4. 06:47
 

발해 거울이 담긴 경박호 가는 길(2-1)


미국의 비트 작가 잭 케루악이 소설 작품, 『On the Road(노상에서)』를 쓴 것은

1950년대 말이었다.

한참 후에 우리나라에 그 번역소설이 나오자 나도 금방 읽고 감동하였다.

청년 비트닉스였던 작가는 이 비트족(族) 이야기를 “in a white heat” 속에서 썼다고

했던 것 같다.

단숨에, 백열과 같이, 아니 섬광처럼 썼달 까---.

 


                                  (돈화 빈관 인근에서)

동부에서 현실에 혐오와 염오를 느낀 청춘남녀들이 고물차를 하나 공동으로 사서

저 잘 닦아놓은 미국의 고속도로를 달리며 현상타개에 나서지만 결과는 항상 낭패였다.

 

60년대의 한국에서 파노라마처럼 그 장면들을 상상하는 갓 청년의 마음은 안달과

조바심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 건강은 회색을 표방하면서도 항상 푸르고 싱싱하였다.

할 일이 없는 조국의 현실은 실로 암담했으나 학군단 소위로 군대를 갔다 왔더니

아무 할일 없던 사회가 그 사이에 너무나 많은 일들을 쏟아내 놓고 별안간에 초기

산업 사회로 들어가고 있었다.

고속도로가 놓인 것은 그런 많은 사건 같은 일들 중의 한 기호학일 뿐이었다.

 


                                          (돈화 시가지)

 

지금 현대 중국을 건설하는 이 곳이 바로 그런 지경일 것이다.

북경이나 상해보다도 이 곳 동북3성의 젊은이들이 그런 의미에서는 보다 나은

인생 기록을 당대에 엮어내고 노년에는 더 많은 추억 반추의 행운을 누릴 것이

확실하리라.

 

이번 발해의 유적을 개인 차원에서 탐사하면서 나와 박 기자는 교통수단에서의 수많은

곤욕을 치러내었다.

우스개이지만 어쩌면 이번 여정의 첫날을 정각사, 절집으로부터 시작하고는,

그 저녁을 “구육집”에서 마감했기에 곤욕을 치른 건가, 아니면 일진 탓인가, 농담을

나누기도 했으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현대 중국 건설 대장정의 사립문 단계에 있는

이 동북지방에서 벌어진 필연이라고 생각하면 합리적 해석이 되리라.

 


(흑룡강 성의 북쪽에 있는 큰 도시 가목사로 가는 이정표와

도로 공정 단위 회사를 알리는 표지판)

 

사실 지금 이 곳은 시멘트 고속도로 공사가 이곳저곳에서 수도 없이 벌어지고 있었다.

새로 건설되는 곳도 많았지만 개중에는 부실하게 발라놓은 공로(公路)의 아스팔트를

모두 걷어내고 재시공에 열심인 곳도 적지 않아서 이게 또 교통장애 유발의 원인이기도

했다.

이런 부실 때문에 성급 관리들과 시장까지 줄줄이 감옥으로 엮여 들어간 사례도 얼마

전에 있었다고 한다.

 


(목단강 버스는 시내 몇군데 기착지를 들러야했다. 하긴 뉴욕의

그레이 하운드도 두어군데 그렇게 들러서 시외로 빠져나가지---. )

 

아마도 내년이면 이런 경험은 아쉽지만(?!) 못해 볼 것이다.

도로 사정이 마침내 업그레이드되는 원년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현재 여기에 내가 글과 영상으로 올리는 사연의 대부분은 이런 맥락에서

벌어진 현상학임을 꼭 전제하고 싶다.

 


(길림성의 목재는 유명하다. 이 보다 훨씬 큰 트럭에 실린

임산물들이 많이 눈에 띄었고 임업국 건물도 매우 컸다.)

 

돈화 빈관에서 푸짐한 뷔페로 아침 식사를 마치고 경박호로 가기 위해서 호텔을 나선

시간은 9시였다.

우리 일정은 산천과 호수의 경개가 좋은 경박호에서 일박을 하고 다음날 발해진에 있는

저 유명한 흥륭사와 상경 용천부의 고성터를 보고 동경성을 거쳐서 목단강 시로 가는

것이었다.

 

경박호에서는 전력빈관이라는 곳에서 작가 류연산 인민대회 위원이 연락해 놓은

흑룡강 출판사의 림승환 편집, 번역 책임위원과 주말여행을 함께 하기로 되어있었다.

말하자면 이 곳 출신이자 가까운 목단강 시에서 활동하는 VIP 작가와 동행하는 여행을

목전에 둔 것이다.

 

전화로 연결된 림 선생은 경박호로 오는 여정이 생각보다 오래 걸리리라는 주의를

우리에게 주었으나 이제껏 어려움이 없는 여행을 해온 우리는 방심하였다.

돈화에서 목단강행 버스를 타고 가다가 싱샨(杏山)이라는 곳에서 내려서 아무거나 타고

경박호로 들어가면 되는 간단하게 보이는 여정이 아니던가, 지도상으로는---.

 


(호객꾼과 제복의 복무원들 사이에서 상황 판단을 하는 박 기자.)

 

돈화의 아침나절, 우리는 택시를 타고 목단강 행 버스 터미널로 자신만만하게 갔더니

그런 버스는 없다는 것이다.

결국 택시를 대절해서 가야하는데 400원을 내라는 거다.

말 같지는 않지만 난감하여 제복 입은 여자 복무원에게 물어보니 그제야 호객꾼들을

야단치면서 또 다른 터미널로 가라고 한다.

우리는 이번에는 인력거를 타고 그리로 옮겨갔다.

 


 

그 이름도 반가운 “목단강”이 그 곳 흰 벽에 붙여놓은 출차 시간표에서 우리를 내려다

보고 웃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다소 양미간을 찌푸렸다.

출발 시간표에는 한 시간을 더 기다려서 10시 40분에 버스가 떠난다는 것이다.

여행지에서의 기다림에는 이력이 나 있었지만 “림 선생”과의 약속이 우선 한 시간쯤

차질이 나는 순간이었다.

이 차질은 앞으로 한정 없이 늘어나는 차질의 서곡일 뿐이었다.

 

마침내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목단강행 버스의 개찰이 시작되었다.

포니테일 노랑머리를  얄궂게 흔들며 설치던 아가씨들은 우리와 동행은 아닌 모양

이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중형 규모였는데, 돈화를 벗어나는 데에서만 한동안을 헤맸다.

정류장 두엇을 들러서 가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교외를 빠져나가다가 임산물을 가득

실은 대형 추럭에 의해서 방해를 받더니 드디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이유로 다시

돈화 시내로 들어왔다.

시내 구경을 두 번 씩이나 하는 즐거움 보다는 림 선생에 대한 미안감만 더 쌓여갔다.

 

박 기자가 직행 버스는 없느냐고 호기심 수준으로 차장 아가씨에게 질문을 했더니

과하여 야한 화장술의 입술에서는 “메이요(沒有)” 라는 부정문만 씩씩하게 흘러나왔다.

버스는 일단 산업도로쯤 되는 데로 우회하여 들어서더니 이윽고 지방 국도를 유유히

달리는 것이다.

 

지방의 느린 차량들을 날렵하지도 못한 우리의 중형 버스가 추월하는 사태가 연속

되었는데 우리의 마음은 신이 나거나, 진땀이 나거나, 아니 둘 다이거나---,

그런 싱거운 생각 속에서도 차는 6월의 신록을 헤치고 정신없이 달려가서 불안한

여행객은 꼿꼿한 눈매로 풍광을 유여(游旅) 없이 감상할 따름이었다.

 

나중에 흑룡강 성에 들어서면서 더욱 놀랐지만 중국이 과연 넓기는 넓었다.

막 지나온 길림성은 산이 많고 그에 따라 목재가 많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들판이

산세에 밀리는 것도 아니었다.

펜실베니어 턴파이크를 따라서 뉴욕으로 들어오는 길에 산과 들판이 함께 위용을

자랑하던 풍광과 비슷하달까---, 과연 거대 국가 중국임에는 틀림없었다.

 

차는 곳곳에서 정차하여 지방의 농부와 보따리장수들에게 교통의 편익을 십분 제공

하였고 때로는 열 두어 명의 “고등중학생들”을 1원씩 받고 한두 구간 태워주기도

하였다.

박 기자가 옆에 앉은 여학생에게 졸업 후에는 어디로 가느냐고 했더니 북경의

“청화 대학”을 가고 싶다는 야무진 대답이 나왔다고 한다.

한 때는 우리나라도 그러하였던 단정하게 교복입은 학생들의 절도 있는 모습에 현대

중국의 희망이 걸려있었다.

 

버스가 흑룡강 성으로 들어오면서 풍경은 많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우선 흙의 색깔이 점점 검어지기 시작하였고 들판은 진정 대평원 모습의 실재를

과시하였다.

미국의 미시간, 오하이오, 일리노이로 연결되어 내려가는 중서부 대평원 프레어리

지방이 바로 여기에도 전개되고 있었다.

내가 미국을 자꾸 갖다 대는 것은 현대 인류사의 두 패권 국가를 맞비교하는 측면도

있지만 도무지 우리나라에서는 빚 댈 장면이 없기 때문이었다.

 

길은 점점 험했다. 산길이라는 말이 아니다.

흑룡강성에서는 이제 넉넉한 예산으로 도로를 확대하여 포장하는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이고 있어서 넓히려고 파놓은 길, 그로 인한 외길 등, 당분간은 다른 도리가 없을

듯 했다.

더욱이 간밤에 내린 폭우가 길의 요철을 더욱 심하게 해놓아서 엉덩이에 불이 나고

허리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흡연 공해에도 시달렸으나 정겹기도 했다.)

 

두어해 전에 태국에서 캄푸치아의 앙코르 와트를 향하여 대여섯 시간 달리며 허리와

엉덩이를 단련시킨 이력이 떠올랐다.

그래도 마침내  멀리 영안(寧安) 시가 보이자 희망과 기대감에서 차장아가씨에게

“이제 싱샨까지는 얼마 남았느냐”고 박기자가 물었더니 이 아가씨가 꽤 거친 말투로

우리의 기자 동무에게 무슨 말을 내뱉는다.

내가 무슨 소리였느냐고 물어보았더니 “기다리면 어차피 버스가 가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으냐”고 핀잔을 주었단다.

 


                              (미녀 여자 복무원---)

 

현실적으로나 철학적으로나 차장의 말이 절대적으로 옳았다.

함께 탄 중국의 승객들 중에서 그런 우둔한 질문을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정시에 차가 운행되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었다.

모두 현실 유착과 철학적 사유에 익숙해 있어서 그럴 따름이었다.

 

버스 차창으로 마침내 경박호의 일부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길이가 50킬로미터인 이 거대하고 길게 뻗은 화산호는 멋진 미태의 일부만

보여줄 뿐, 전라의 모습은 쉽게 내비쳐주지 않았다.

그저 청나라 복장에서 유래했다는 “치파오”의 찢어진 치마 틈으로 시선을 유도할

따름이었달까---.

 

우리는 이 호수의 좁은 목에 흙을 부어 건너편으로 길을 낸 곳에서 아무렇게나 용변을

볼 기회를 얻었다.

덕분에 사진도 몇 장 찍었다.

아름다운 경박호를 바라보며 경박하게 생리를 해결하고 달리기를 다시 이십 여분 후에,

마침내 차장의 철학적 사유가 옳다는 것이 명증되었다.

조그만 마을 싱샨(杏山)의 넉넉지 못한 모습이 예상의 두 배인 네 시간 만에 우리의

시야에 어차피 들어왔던 것이다.

 


         (경박호가 미태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카누가 이채로웠다.)

 

싱샨은 작았지만 경박호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다.

여름 한나절, 아무 소리 없이 적막 속에서 “아이스께끼”를 파는 그늘 집 아래에서

묵묵히 기다리는 시골 사람들의 무표정 위에 나는 내 유년시절 낙동강변의 어른들

얼굴을 이중인화 시켜 보았다.

 


 

갑자기 약게 생긴 사람이 하나 나타나서 택시를 대절하라고 중국말로 외쳤다.

값은 400원이라고 하였다.

박 기자가 200원에 하자고 얼렀더니 슬그머니 사라졌는데 나중을 예측했더라면

400원이라도 그게 나았을는지 몰랐다.

 


                   (싱샨에서 호객하는 택시) 


(계속)